우리 경상북도는 전국에서 가장 넓은 면적과 가장 많은 문화재를 자랑하는 웅도로서, 산업화된 도시와 전통적인 농어촌이 균형 있게 발전해 온 살기 좋은 고장입니다.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정신, 조선 유학의 선비정신, 국난 극복의 호국정신, 조국 근대화의 새마을 정신은 우리 지역을 기반으로 발전한 경북의 자랑입니다. 또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왔다는(朝鮮人才 半之嶺南) 옛말이 있듯이 우리 역사의 중심에 경북이 있었고, 그 원동력은 인재 양성의 교육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폭력이 배제된 학교는 좋은 학교이고, 좋은 교육이다. 하지만 현실이 과연 그럴까? 폭력이 없어져도 문제는 여전하다. 지금 한국의 학교와 교육을 ‘학교’와 ‘교육’으로 부를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는 출신대학이 한 개인의 카스트를 결정하는 사회다. 따라서 학교와 교육은 오직 대학의 입시만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미 교육과 학교의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대교육은 이미 파산한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와 교사를 조롱하는 근본적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이른바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되었다. 방학은 당연히 방학숙제가 있다. 방학에 어인 숙제냐 하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 노는 꼴을 못 보는 것이 학교고 어른들의 속내다. 숙제는 공작, 문제집 풀이, 일기 쓰기 등이었는데, 그 중 가장 괴로운 것이 산수 문제집이었다. 친구 몇과 꾀를 내어 분량을 나누었다. 고통은 이틀만에 끝났다. 일기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해 치웠다. 만들기는 방학이 끝날 때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와 친구들은 겨우 사나흘 만에 숙제의 족쇄에서 해방되어 기나긴 방학을 그야말로 산이야 들이야 돌아다니며 편편히 놀 수 있었던 것이다.
학교폭력과 잇단 학생들 자살, 학생-학부모의 교사폭력 등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총체적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권-공교육 회복과 관련한 법안마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1일 스승의 날을 앞두고 부산 A중학교에서는 여교사 B모(47) 씨가 2학년 C양의 복장 불량에 대해 "벌점을 줘야겠으니 교무실로 가자"며 C양의 손을 잡자 C양이 이 교사의 손을 뿌리친 뒤 되레 욕설하며 반항했다. 이어 C양이 교사의 뺨을 때리고 머리채를 휘어잡는 지경에 까지 이르러 결국 교사는 실신했다. 지난달 17일충북 음성의 한 여자중학교 과학수업 중에 실수한 교사에게 학생들이 "무릎을 꿇고 사과하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져 전국을 떠들석하게 했다. A교사는 '중력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덩치가 큰 B양과 왜소한 체구의 C양을 불러내 B양에게 C양을 잡아 당기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A교사는 C양이 B양에게 끌려가자 이를 '큰 힘에 작은 힘이 끌려오는 것은 중력의 원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한 B양은 울음을 터트렸다. 다른 학생들은 교사에게 "사과하라"고 몰아세웠다. 이 교사는 자세를 낮춰 "미안하다"고 사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수업시간 중에 A교사의 이같은 설명방법이 뭐가 크게 잘못됐기에 사과까지 했는가? 교권이 무너질 대로 무너졌고 사도(師道)는 땅에 떨어졌다.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한다"는 말과 함께 사장(死藏)됐다. 이 말은 제자는 참 스승의 모습만 따라야하지 참 스승으로서 모습이 아닌 것은 따라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스승은 제자에게 참되고 올바른 모습만 보여야지 그림자처럼 어둡고 나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교사가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면 학생도 따라서 피우기 마련이다. 존경해야 할 스승이 이유없이 학생을 때리는 그림자를 보이면 일부 학생 또한 그 그림자를 밟고 다른 학생을 폭행하고 심지어 자신의 교사와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학교 교사는 근로의 대가로 보수를 받는 직업적 교원(敎員) 이상의 특별한 존재로 존경받았다. 한 사람의 인생까지 바꿀 수 있는 선생이고 스승이고 은사였다. "선생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고 할정도로 교직이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던 시절에도 교사를 천직으로 택한 것은 그런 보람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한시름 덜게 된 선생님들이 신바람나게 교육에 전념해주기를 기대했다. 전보다 더 열성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빗나가는 아이가 있으면 제 자식처럼 바로잡아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신문 사회면에 실린 학생 집단 흡연 사진은 그런 소망을 무참히 무너뜨린다. 교직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가는데, 정작 '선생님'이 필요한 곳에서 선생님을 찾아보는 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다음은 조선일보 김형기 논설위원이 지난달 쓴 '선생님의 길, 교원의 길'이란 제목의 칼럼 일부 내용이다. 우리보다 먼저 학교 폭력과 교실 붕괴를 겪은 선진국에서는 교사들이 일찍이 '선생님'을 포기하고 생활인으로서 '교원(敎員)'으로 내려앉았다. 담임 개념도 사라졌다. 교직이 생계를 위한 일자리일 뿐이라면 매일 출근해서 아이들을 마주치는 일이 고역일 수밖에 없다. 미국·영국·호주 같은 나라에서는 초임 교사의 30∼50%가 5년 이내에 다른 직업을 찾아 학교를 떠난다. 사회도 자연히 그런 그들에게서 존경을 거둬들였다. 지금 15년 경력의 미국 중학교 교사는 한국(618시간)보다 450시간 많은 연간 1068시간 수업을 하고 연봉으로 국민 평균소득의 0.96배인 4만4614달러를 받는다. '선생님'의 길을 벗어난 대가는 그처럼 혹독한 것이다. 교사가 선비처럼 존경받는 스승이 아닌 월급 타는 교원으로 전락해 가는 우리나라도 지금 세태와 추세대로라면 선진외국처럼 '선생님, 은사, 스승'가 사라진 '교원'의 시대가 머지않아 도래할 것 같아 100년을 기다린 '교육 백년대계(百年大計)'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는 지난 30일 19대 국회 개원을 맞아 교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하라고 촉구한데 이어 오는 12월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의 교육공약에 교권 확립이 들어가도록 조직력을 모으겠다고 밝혔다. 교총 차원에서 교권 수호를 위한 호소문을 발표한 것은 교총의 65년 역사상 처음이다. 1991년 제정된 '교원지위 향상을 위한 특별법'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교사가 사회의 존경 속에서 긍지를 갖고 교육활동을 할 수 있도록 모든 배려와 협조를 다해야 하며, 교사의 보수를 특별히 우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9대 국회에서 이같이 교권회복이 가능한 다양한 법안을 조속히 마련하고 공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 정당한 스승의 가르침이나 지도에 반항하고 폭력을 가하는 학생에 대해서는 몇차례 기회를 부여한 후 그래도 안될 경우 강력히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켜 시행해야 할 것이다. 현행 중학교 전학권고, 유기정학처럼 가벼운 처벌 때문에 학생들이 교사에게 달려들고, 학부모는 자식을 옹호하지 않는가. 물론 자질있고 유능한 교사, 존경받는 스승이 교단을 지키고 제자를 가르치는 학교부터 만들어야 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자신의 잘못된 그림자를 학생에게 밟히지 않는 교사가 제자들에게 사랑의 매를 들고 훈계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원 편집국장 newsir@naver.com
요즘 디지털 시대라지만 ‘책’이라는 아날로그 방식의 독서가 뒷받침이 안 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영어와 수학이 아이들 성적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독서교육’이 안된 학생은 비록 영어 실력이 탁월하고 수학 문제 풀이 능력이 월등하다고 하더라도 최고의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요즘은 독서도 대학 가기 위한 하나의 요건이 되어서 책 읽기의 즐거움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멀리 보고 책읽기를 즐겁게 여기는 습관을 갖게 하는 것이 자녀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같습니다.
작년 12월 20일 대구의 한 중학생의 투신 자살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학교폭력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숨진 학생은 무려 9개월 동안 같은 반 친구 2∼3명으로부터 목검과 단소, 격투기 글러브 등을 이용한 폭행과 물고문,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한 24시간 협박과 강요에 시달렸지만, 보복이 두려워 부모님이나 학교에 차마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가해학생들은 맞벌이 가정인 피해학생의 집에까지 찾아와 폭력을 휘둘렀고, 그럴 때면 '엄마 언제 와'라는 문자메시지를 근무 중인 어머니에게 보낸 것이 어린 중2 학생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경기도 여주의 한 중학교에서는 선배에게서 후배에게로, 수년에 걸친 집단폭력 대물림이 알려져 충격을 주었다. 3학년 학생 10여 명이 2학년 학생 10여명에게 야산, 개천 다리 밑, 읍내 공원 등에서 집단폭행과 금품갈취를 계속하고 강제 자위행위 강요 등 성추행까지 저질렀다. 갈수록 커져가는 선배들로부터의 갈취금액을 감당할 수 없었던 피해학생들은 급기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1학년 후배들과 동급생을 상대로 금품을 갈취하는 가해자로 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올해 초 광주의 한 여고생은 새벽에 또래 여고생 3명의 전화를 받고 학교 앞으로 불려나가서는 머리채를 잡아 채이고 발길질 등 집단폭행을 30분 가까이 당했다. 가해학생들은 근처에 있던 신문배달원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폭행을 계속하다가 주민신고로 경찰이 출동하자 모두 달아났다. 피해 여학생은 경찰에게 “가해학생들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며 이들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고, 결국 이 사건은 관할 경찰서에 보고되지 않았다. 최근 유력한 한 중앙일간지와 한국교총이 공동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중·고교생 720만 명 중 이른바 '왕따(집단 괴롭힘)를 당하는 학생이 30만명(4.1%)에 이르고 있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 전국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교 2학년까지의 어린이와 청소년 3,5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0년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재학기간 동안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학생들이 23%이며, 이 중 54%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폭력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폭력 경험 학생의 14%는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20%는 많이 고통스러웠다, 27%는 고통스러웠다고 대답해 학교폭력 피해로 인한 고통이 방관하지 못할 수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막상 가해학생들은 '장난삼아' 학교폭력에 가해자로 참여하게 되고(40.2%),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재밌는 방법'을 찾으면서 폭력과 괴롭힘 수위가 끝간 데 없이 높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왕따 학생을 집단적으로 비방하는 인터넷 안티카페 개설, 핸드폰 메신저를 통한 집단 욕설 테러, 사진 협박이나 유포 등 첨단 통신기술의 발달과 함께 상대방을 괴롭히는 방법도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학교폭력의 원인은 다양하게 거론된다. 치열한 입시경쟁과 성적 제일주의로 인한 학업 스트레스, 과거에 비해 어려움에 대처하는 정신적 능력이 약해진 학생들, 또래 문화의 확산, 인터넷에 난무하는 각종 음란·폭력물과 게임, 전반적인 교권의 약화 등…. 그러나 거시적인 원인들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해학생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만큼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있는데, 부모들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어야 할 학교는 체벌금지 조항 등으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에 대한 제재력을 상실해 방관자나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피해학생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문제가 불거져 교사 개인과 학교의 인사·행정·평판상 불이익을 받는 것을 더 꺼리는 보신주의가 만연해 있다. 반면, 범죄나 다름 없는 강도 높은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학생들은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의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학생과 그 가족만 “왜 그리 약하냐”는 비난 속에 폭력으로 새겨진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흐느낄 뿐이다. 정부는 학교폭력 등 각종 위기상황 학생들을 상담-지원하는 'wee project(학생안전통합시스템)' 강화에서부터 경찰력의 학교 투입 등 강력한 대책들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폭력은 저질러서는 안 될 중대한 범죄라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반복교육을 통해 명확히 인식시키고, 학교폭력 발생 시 피해학생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가해학생들에 대해 강제전학을 비롯한 분명한 응분의 처벌과 집중적인 상담·치료 프로그램을 실시함으로써 제1의 교육현장인 학교에서 정의와 아동청소년 보호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사가 실질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그에 필요한 충분한 권한과 책임이 주어져야 하며 이에 장애가 되는 규정들은 과감한 개선이 필수적이다. 또, 학교폭력을 감추고 덮으며 “또래 아이들끼리의 일로 별 문제 아니다”는 식의 대다수 학교의 대처방식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최근 정부와 한나라당에서 교내 폭력을 자진 신고하는 학교에 대해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도 학교폭력은 당사자인 학교와 교사가 그것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이 올바른 해결을 위한 가장 중요한 첫 걸음임을 말해준다. 나아가 학생들의 인성교육 강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성 제고와 같은 근본적인 대책도 중요한데, 이것은 가정과 사회가 다 함께 노력할 부분이다. 지금 이 시대는 책임지는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아이들을 보호하고 바른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온 몸으로 책임을 감당하는 그러한 학교를 이 시대는 필요로 한다. 미처 피어보지도 못한 채 생명을 포기하는 어린 학생들의 고통에 더 이상 소극적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대구와 교육계, 이제 변화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대구경북연구원 지역교육팀 김세나
“나라의 모든 정치가 제대로 정비돼 있지 않아서 교육을 통한 교화를 일으킬 겨를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수 백년에 이르도록 잘하는 정치가 없었다. (諸政不修 未遑興敎 此百世之所以無善治也)”라고 개탄하였습니다. 선치(善治)는 바로 옳고 바르며 좋은 정치인데, 교육이 제대로 되어지지 않으니 ‘선치’는 있을 수 없었고, 선치가 없는데 어떻게 또 좋은 교육이 이룩될 수 있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교육과 정치는 안과 밖이고, 함께 돌아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절대로 하나만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영어능력평가, 즉 NEAT시험은 그 대상이 현재 고2부터 중3까지는 대입 수시모집에서 반영을 하게 되고 현재 중2부터는 수능에서 영어시험이 빠지고 NEAT시험으로 대체됩니다. 수시모집을 통해 거의 대학에 들어가는 왜관지역 학생들로서는 현재 고2부터 필수적으로 NEAT시험을 대비해야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NEAT시험을 학생의 입학기준에 반영할지 말지를 결정권은 대학이 갖게 됩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단체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고 동료와 협조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말이다. 그 반면 지적 점수(읽기, 수학, 과학적 소양)는 상위권에 속했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성적만 높으면 되지, 사회적 상호작용 점수는 살아가는데 필요없어"라고….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여러 가지 원리 중 하나가 바로 ‘경쟁’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하고 목표를 이루지 못해 좌절도 하면서 고민도 하고 반성도 하며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찾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주도학습’이란 말 그대로 내 아이가 스스로 납득할 만한 동기로 공부의 주체가 되어 학습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주도학습’은 21세기에 지식기반사회에서 지식을 잘 활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내는 능력을 발휘하는 창의적 인재를 만드는 학습방법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2011학년도부터 외국어고·국제고, 과학고, 일부 자율형 사립고의 학생 선발 방식을 개선하여 자기주도 학습 전형을 도입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자기주도학습’을 중요시하는 변화에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주목하고 있다.
'왜(?)'라고 물을 수 있는 아이는 이미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다. '왜'라고 묻는 아이의 눈동자를 가만히 보라! 수많은 별들이 그 속에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라는 의문은 관심이고 사랑이고 살맛나게 하는 호기심이다. 아이에게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하여 뭔가 하고 싶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 하고 싶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 ‘6단 논법’으로 말하면 좋다. ‘6단 논법’은 1968년 스티븐 툴민이 영국 켐브리지 대학 학위 논문<논술의 활용>에서 발표했다. 툴만은 1990년 미국에서 토론학회가 토론분야의 탁월한 학자와 공로자에게 수여하는 큰 상을 받았다. 그 후 ‘6단 논법’은 토론 논술 교과서와 국제토론 챔피언 대회에서 쓰이게 되었다.
필자가 아이들과 토론 수업을 할 때는 항상 ‘글보다 말이 더 힘이 세다’라고 토론의 중요성부터 강조하고 수업을 시작한다. 글이란 어떤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나 또는 글로 표현해야 될 특별한 상황이 주어질 때만 쓴다. 그러나 말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해야 한다. 글보다 말이 더 힘이 세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그만큼 말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오류란 논증에 있어서 저질러지는 잘못을 일컫는다. 오류는 주로 전제에 잘못이 있거나, 전제와 결론사이에 연관성이 부족하거나, 결론이 전제의 범위를 초월해 도출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내용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주장하면서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된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 보면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몇 년 전 일이다. 초등학교 5학년 된 아이인데 한우리논술원에서 필자와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두 가지 놀란 일이 있었다. 한 가지는 책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줄거리 요약과 독해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은 우선 시간적으로 일정한 시기를 지난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오래된 것이라고 다 고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고전이 되려면 현재의 비평가들이나 향유자들에게 잊히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고전은 '현재적'인 것이며 우리 곁에 생생하게 현전하는 것으로 후세에 전범이 될 만한 것을 말한다. '고전'이라는 말은 본래 사회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클래식'이라는 영어는 라틴어 '클라시쿠스'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 라틴어는 고대 사회에서 첫 번째 사회 계급, 그러니까 최상층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뒤 이 말은 '모범적'이거나 '최고 수준의' 작품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고전 문학이라고 하면 멀게는 옛 그리스 시대나 로마 시대, 가깝게는 근대 이전의 뛰어난 작품을 가리킨다. 동양에서도 고전을 규정하는 것은 이와 다르지 않다.
논설문은 자신이 경험한 일이나, 알고 있는 배경지식을 근거로 제시하여 주장을 펼쳐야 하는 글이다. 그런데 알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빈약하다면 자신의 주장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왜 옳은지를 증명할 수가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폭 넓은 독서를 통해 배경 지식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책 속에는 많은 지식과 지혜, 정보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과거와 현재가 다 들어 있다. 또한 미래를 비춰 볼 수 있는 거울까지도 들어있다. 굳이 필자가 강조하지 않더라도 독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을까.
서울대학교에서 2008학년도 입시부터 통합논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통합논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중-고생을 둔 학부모들이라면 올해부터 부쩍 듣게 되는 게 통합형논술 혹은 통합형교과라는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