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이른바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되었다. 방학은 당연히 방학숙제가 있다. 방학에 어인 숙제냐 하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 노는 꼴을 못 보는 것이 학교고 어른들의 속내다. 숙제는 공작, 문제집 풀이, 일기 쓰기 등이었는데, 그 중 가장 괴로운 것이 산수 문제집이었다. 친구 몇과 꾀를 내어 분량을 나누었다. 고통은 이틀만에 끝났다. 일기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해 치웠다. 만들기는 방학이 끝날 때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와 친구들은 겨우 사나흘 만에 숙제의 족쇄에서 해방되어 기나긴 방학을 그야말로 산이야 들이야 돌아다니며 편편히 놀 수 있었던 것이다. 구속된 방학 시간은 흘러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되었다. 방학인데도 학교에 나와 오전에 보충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교실에 남아서 공부를 하란다. 아주 가까운 친구 녀석에게 물어보았다. 방학 때 학교 나오지 않으면 결석이 되냐고? 친구는 법적으로는 탈이 날 것은 없다고 했다. 왜냐? 방학이니까! 방학은 배우는 것, 즉 공부하는 것을 내려놓고 쉬는 것이다. 방학을 둔 이유는 학교에 매여 몇 달 동안 공부를 했으니, 이제 집에서 쉬고 놀라는 뜻이 아닌가. 나는 방학의 정의에 충실하여 여름을 집에서 보냈다. 읽고 싶은 책도 읽고, 모자란 공부도 나름대로 보충했다. 그렇게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어느 날 나를 찾는 사람이 왔단다. 누군가 하고 나갔더니, 담임선생님이었다. 학교에 다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남은 스무 날 동안 나는 학교의 목줄에 묶인, 자유를 잃은 개가 되었다. 반항심에 맨 뒷줄에 앉아 소설책을 읽으면서 그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방학의 자유가 내게 허락되었거나, 아니면 내가 학교와 교사의 말을 맹종, 아니 순종하는 인간이었다면, 나의 인생을 또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그때의 담임선생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분 역시 방학의 자유를 상상하거나 누릴 수 없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방학의 대부분을 놀며 지냈던 것을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방학 때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것이, 교과서 아닌 책을 짬짬이 읽었던 것이 나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훨씬 더 깊게 끼쳤다고 생각한다. 방학은 그야말로 숨 쉴 틈 없는 학교생활에서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로운 시간이었던 것이다. 학생들에게 방학을 돌려주기를! 다시 말하지만, ‘방학(放學)’의 ‘방(放)’은 원래 ‘하지 않는다’ ‘내버려 둔다’ ‘놓아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방생(放生)’은 놓아주어서 살게 만드는 것이다. ‘방학’ 역시 배우는 것, 공부하는 것을 그만두고 쉬게 한다는 뜻을 갖는다. 통제로 이루어지는 타율적인 학습에서 놓여나 두뇌를 식히고 자신의 시간을 알아서 처분하라는 것이 방학의 원래 목적인 것이다. 그러니 방학은 원래부터 학생의 몫이다. 학생에게 수업을 강제하는 것, ‘교육적’이란 미명 아래 학생이 원하지 않는 집단생활을 시키는 것 모두 교육의 원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당장 대학 입시를 들먹이면서 반발할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그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이들에게서 방학의 자유를 박탈하는 교육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조선시대의 서당에서도 여름이면 당연히 쉬는 날이 있었고, 어려운 책보다는 쉬운 책을 읽게 하였다. 평소에도 지금처럼 하루 종일 공부만 시키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공부의 신이라고 할 만한 다산 정약용 역시 아이들에게 여름과 겨울 놀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정말 교육이란 것을 하고자 한다면 아이들에게 방학을 돌려주기 바란다. 끝으로 첨언하자면, 최근 해병대 캠프에서 고등학생들이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은 것도, 결국 아이들을 끊임없는 통제 속에 두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 학교는 이미 대학입시를 위한 병영(兵營)이 된 지 오래다. 그것도 모자라 군대식 통제라니 더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이다.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세상을 뜬 학생들의 명복을 빈다./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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