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쉽게 말하면 네 주제 파악을 하라, 즉 '네가 너 자신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알아라'는 말이다. 너의 무지(無知)를 알아 '무지의 지(知)'에 이르러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
정월 대보름달이 밝아오고 있다. 가장 큰 보름이라는 뜻의 음력 정월 보름인 1월 15일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가. 대보름날은 우리 민족의 광명을 반영한 대명절이다. 그러나 발렌타인-화이트데이를 해마다 기다리는 신세대들에게 대보름은 우리의 명절인가를 의심케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보름달은 밝디 밝게 떠오를 것이다. 신세대가 쳐
해바라기의 황금 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해바라기의 웃는 모습보다 붉은 슬픔이 전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러시아가 이 전쟁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들 수 있다. 우크라이나 국기는 위쪽 절반은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아래쪽 절반은 땅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단순하게 구성돼 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있는 노란 해바라기와 밀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색상과 형태가 너무 단순하지만 천지(天地)와 우크라이나를 표상하는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우크라이나는 밀과 옥수수, 해바라기씨유(油) 등의 최대 수출국이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해바라기씨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러시아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항구가 막히면서 수출이 급감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가 식량안보에 위협을 받고 있다. 해바라기는 우크라이나의 나라꽃(국화)이자 국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우크라이나 국민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나라와 조국을 상징하는 '태양의 꽃'이라 할 수 있다. 해바라기 외에는 이름에 '해'자가 들어간 꽃은 별로 없다. 영어로는 아예 '태양의 꽃(sunflower)'이다. 어쩌면 해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우크라이나의 국화(國花)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일편단심 조국을 바라보며 뜨겁게 사랑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해바라기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일부 사전과 인터넷 정보를 검색해 보면 아직까지 러시아 국화(國花)가 해바라기로 나온다. 사실이 아니다. 러시아 연방공화국 정부는 1998년 3월 옛 소련의 국화인 해바라기를 폐기하고 캐모마일을 러시아의 공식 국화로 정한다고 공표했다. 우크라이나 나라꽃 해바라기가 전쟁터의 꽃으로 주목받으면서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도시에서 지난 2월말 찍힌 짧은 동영상이 전 세계에 퍼져 눈길을 끌었다. 한 할머니가 총을 든 채 순찰 중인 러시아 군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다음과 같이 호통을 친다. “러시아 놈이 왜 여기 있어? 너희는 점령군이다. 파시스트다. 주머니에 해바라기씨나 넣어 두어라. 너희들 모두가 여기서 쓰러질 때 그 씨앗들이 해바라기로 자라날 것이다." 할머니는 전쟁터에서 왜 해바라기를 꺼냈을까. 소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군인에게 사살 당할 수도 있지만 되레 호통치는 할머니에게 세계인들의 감탄사와 응원이 쏟아졌다. 평소 국기와 국화에 나타나 있는 해바라기를 숭상하는 우크라이나의 국민적 정서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아직도 할머니의 절규가 너무나 생생하게 들려온다. 싹이 트기 시작하는 올해 봄 할머니의 이 영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1922년 발표한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라는 시가 떠올랐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우며,/추억과 욕망을 뒤섞고,/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생명을 길러주었다.“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서는 양측 모두 900여만명의 군인이 죽었고 700여만명이 실종됐으며, 2천200여만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혜영 인하대 영문학 교수는 "숫자로는 아무리 길게 늘어놓아도 전쟁의 참상을 실감할 수 없다. '사상자'나 '부상자'와 같은 추상적 용어로도 공포에 떨며 죽어갔을 사람들의 애타는 심정을 그릴 수 없다. 현대전이란 오랜 세월 이어온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터전은 무너뜨리고, 그 상처는 수치와 도표, 추상적인 개념과 전문화된 용어로 열거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의 참상을 실감하려면 경제학이나 정치학이 아닌 감정과 정서가 살아있는 사람들의 말, 바로 문학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처럼 새싹이 돋아나고 이 땅의 만물이 생장하는 4월은 현대인들에게는 가장 잔인한 달일지 모른다. 1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그 전쟁의 상흔과 황무지(폐허)에서 오는 황량함과 공허함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데 4월은 아무 일 없었듯이 이 땅에 돋아난 새싹의 생장을 재촉하는 봄비를 내리니 말이다. 사람들은 황폐와 절망, 공허 속에서 다시는 싹 틔우길 원치 않는데 봄과 자연은 어김없이 새 생명의 탄생을 되풀이하니 이 얼마나 잔인한가! 하지만 생물은 계속 생명을 이어 나가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너희는 아래로 쓰러지지만 씨앗은 (위로) 해바라기로 자라날 것"이라는 우크라이나 할머니의 은유적 호통은 우크라이나는 너희들이 아무리 짓밟아도 어디에나 씨앗이 뿌려지는 한 해바라기로 생장하듯 새 생명은 탄생하고 성장할 것이라는 신념에 가득 찬 선언으로 다가왔다. 전쟁의 잔인함에 그친 엘리어트의 '황무지'에 생명의 빛(태양)을 받은 '해바라기'가 새로운 희망을 심는 순간이다. 필자는 최근 끝없이 펼쳐지는 우크라이나의 드넓은 해바라기 평원을 무대로 제작된 걸작 'Sunflower'(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다. 1970년 상영된 Sunflower(해바라기)는 명배우 소피아 로렌과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주연한 이탈리아 영화다. 독자 여러분이 이 영화의 남녀 주인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영화를 끝까지 보고 결정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역사는 반복된다. 1970년 상영된 영화 '해바라기'는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그렸다. 영화 속 이곳은 전쟁 중 숨진 군인과 민간인들이 집단으로 묻혀 있는 곳이다. 2차 대전 중 400여만명의 군인이 드넓은 해바라기 평원에서 혈전을 벌였고, 전쟁으로 희생된 우크라이나인은 700여만명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다. 남편 안토니오(남주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신혼초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에게 동조한 무솔리니에게 징집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떠났으나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 지오바나(여주연 소피아 로렌)는 남편 사진 한 장만 들고 홀로 전쟁터로 가서 현지에서 백방으로 남편을 찾아 헤맨다. "독일군은 저 해바라기밭 아래 포로들이 직접 자기 무덤을 파게 했어요. 아마 당신 남편도 저 해바라기 아래 묻혔을 겁니다." 아내는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서 이런 말을 듣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군인들의 붉은 피 위에 해바라기가 자란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실제로 핀 붉은 해바라기가 더욱 슬픈 꽃으로 보였다. 영화 속 이 장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군인에게 한 할머니가 '해바라기 씨앗이나 넣어 두고 쓰러져라'는 메시지로 호통쳤던 영상과 오버랩된다. 붉은 피가 섞여 있는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황금 들녘에는 영화처럼 아직도 해바라기가 피고 있다. 1932~1933년 스탈린 치하의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약 3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참사로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독립한 러시아를 철천지원수로 여겨왔으며, 이번 러시아 침공에도 굴복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항전하고 있다. 15세 이상 관람가인 영화 '해바라기'는 필링박스(https://feelingbox.tistory.com)에서 한글자막과 함께 무료로 볼 수 있다. 필링박스에서는 세계적 명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한 영화 ‘카사블랑카’를 비롯해 세계적 고전 명작 등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애잔하고 구슬픈 해바라기 주제곡 'Loss of love'(사랑의 상실)를 들으며 노란꽃 물결치는 해바라기 평원을 보고 있노라면 바람에 하늘거리는 해바라기 꽃말 ‘일편단심’ ‘애모’ '기다림' 태양을 그리워하는 ‘사랑의 꽃’이 그려지리라.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다. 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우러러 사모하는 모화사상(慕華思想)과 주체성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사대사상(事大思想)이 뿌리깊이 박혀 있다. 지금도 약소국가에 대한 강대국 지배와 약자와 지방의 강한 중앙집권 체제에 익숙해져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목표로 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중앙집권적 식민지배체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국민은 이로써 뼛속까지 타율적이어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자신을 지배해 나가는 자율적 통치기반이 형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중앙집권을 하기가 쉬운 국가였다. 조선시대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노예 신분으로서 아직도 노예근성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누구에게 종속되어 책임지기를 싫어한다. 물론 왕과 권력자의 중앙집권에 반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왔다. 양반과 상놈, 지배자와 피지배자, 중앙집권과 지방지배 등으로 분명하게 구분돼 왔다. 이같은 뿌리깊은 노예근성을 바탕으로 왕과 대통령, 중앙집권세력 등이 지방으로 권력을 나눠주는 분권을 철저히 막아온 덕분에 지방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중앙은 돈과 모든 것이 넘쳐난다. 이를테면 지방(비수도권)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데 중앙(서울·수도권)은 비만으로 병들어가고 있다. 국토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50.2%가, 100대 기업 본사의 95%, 전국 20대 대학의 80%, 의료기관의 51%가 각각 몰려 있는 우리나라 같은 국가는 세계적으로 찾을 수 없다. ◆자주 재정권 없는 '무늬만 주민자치' '권력과 사랑은 서로 나눠 가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중앙은 지금까지 누려오던 돈과 권력, 온갖 혜택을 지방으로 나눠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1991년 지방의회선거와 1995년 동시 지방선거로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가 열렸다. 지방자치는 지방이 스스로 그 지역과 지역민을 다스리는 주민자치를 말한다. 그러나 군수와 시장, 도지사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주민 투표로 뽑기는 하는데 자주(自主) 재정권과 자주 입법권을 보장 받지 못하는 현재의 지방자치는 '무늬만 주민자치'라는 지적이 많다. 지방자치단체의 자주 재정권이 확보되지 않으면 지방분권 실현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세와 지방세 8대 2의 비율을 6대 4까지 확대하고 지역간 세입 불균형을 조정하는 재정 조정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방정부의 재정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중앙정부에 예산을 지나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입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국회의원들은 별다른 관심이 없다. 특히 중앙정부는 보조금과 교부세 등을 통해 지방정부(지방자치단체)를 통제하고 있어 지방자치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지방의 재정자립도는 1992년 69.6%에서 2015년 45.1%로 계속 떨어졌다. 지방분권 실현 방안 중 하나로 국세인 부동산 양도소득세를 지방세로 이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실례로 서울에 주민등록 돼 있는 시민이 소유하고 있던 경북도 칠곡군 땅을 팔면 양도소득세는 서울시에 내지만 법률 개정으로 경북도에 양도소득세를 납부해 도세로 운영하고, 칠곡군에 배분해야 수도권-비수도권 간 세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헌법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 국가’ 명시해야 나아가 진정한 지방자치는 각 지자체의 조례가 지역실정과 주민들의 요구에 맞게 제정할 수 있는 자주 입법권에 따른 세율조정 등이 선행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지방의 실질적인 자치와 분권을 이뤄 그야말로 국토의 균형발전을 꾀하지 않으면 국가적 위기는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중앙에 집중된 권력과 돈을 지방으로 나눠(분권·분산) 주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지방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헌법에 명시하는 개헌을 서둘러야 한다. 오는 3월 9일 실시되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권력 나눠먹기와 영구집권을 위한 내각제 개헌은 여기저기서 회자되고 있는데 '지방분권 국가’를 헌법에 명시하겠다는 등 획기적인 지방살리기는 대선공약으로 찾아볼 수 없다. 전국지방분권협의회와 경남신문 등 전국 9개 지역신문으로 구성된 한국지방신문협회는 지난달 27일 헌법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 국가이다’라고 명시하는 등 지방분권개헌 대선공약 촉구 결의대회를 가졌다. 대한민국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 제3항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 국가이다'를 넣자는 것이다. 또한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주민 자치권을 가짐을 기본권에 명시 ▶‘지방자치단체’를 ‘지방정부’로 격상하는 동시에 지방정부의 조직과 운영에 대해 자치권 보장 ▶‘자치법률’과 ‘국가법률’로 이원화된 법률을 통한 자치입법권 강화 등을 촉구했다. ◆일제가 조선을 쉽게 지배하기 위한 중앙집권 체제가 오늘날까지 내려와 권선필 목원대학교 교수는 오늘날 계속되는 중앙집권 체제에 대해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나라를 수월하게 지배하기 위해 바꾼 문화가 아직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권 교수는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힘이 중앙보다 더 컸을 뿐만 아니라 지방 세력의 힘이 강해 여러 가지 폐해도 있었다”며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가 지방에 처음 가면 면신례라 불리는 신고식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힘이 강했던 지방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마을헌법을 만들고 현재의 주민자치위원회 같은 기관을 만들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설명했다. 중앙의 권력을 지방으로 준다는 의미로 '분권'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같은 분권이 지방으로 갔을 때 각 지역이 스스로 하는 것이 지방자치고 주민자치다. 지역공동체의 최소 단위인 동·리(洞·里)가 없는 읍·면·동은 있을 수 없고, 읍·면·동 없는 시·군·구는 생각할 수 없으며, 시·군·구(기초자치단체) 없는 시·도(광역자치단체)는 물론 전국 17개 시·도 없는 대한민국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우월감을 갖는 중앙정부는 지방은 보이지 않고 무시하게 된다. ◆지방자치는 소국과민(小國寡民)과 상통 지방자치(자치분권)는 소국과민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소국과민(小國寡民)은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이란 뜻으로, 노자(老子)가 그린 이상사회(理想社會), 이상국가를 말한다. 노자는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생활은 풍요롭고 편리해지지만 인간의 노동을 감소시키고 게으름과 낭비, 생명의 쇠퇴를 가져온다며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 같은 이상사회·이상국가를 소국과민에서 찾았다. 소박하고 작은 소국과민(小國寡民)의 공동체는 최소한의 마을 단위에서 넓게는 지금의 지방자치단체까지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 주민 스스로 투표에 의해 이장(里長)을 뽑고, 이장은 주민들이 원하는 요구사항과 뜻을 받들어 소수에 불과한 주민들과 함께 자치규약에 따라 마을을 민주적으로 운영해 나간다. 이장은 마을에 중요한 안건이나 의결사항이 있으면 미리 공지해 마을 전 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이를 결정하고 가결한다. 이같은 마을자치는 고대 그리스 아크로폴리스(Acropolis)에서 꽃피운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다. 미국 독립 혁명의 기반이 됐던 'Town meeting'(마을회의) 및 프랑스 대혁명 당시 파리 민중의 자치조직이었던 'Comite section'(구역 위원회)가 비슷한 참여민주주의다. 조선시대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 규약인 '향약'(鄕約), 마을 주민들이 농사일 등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부락 단위로 만든 조직인 '두레'와 계(契) 등은 주민자치 조직의 근간이 됐다. 흔히들 지방자치를 민중의 의사를 직접 반영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는 '풀뿌리 민주주의'로 명명하기도 한다. 풀뿌리의 의미는 김수영 시인(1921~1968)의 대표 시 '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 마지막 연에 '풀뿌리' 시어가 나온다.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혹자는 ‘풀’을 가난하고 억눌려 사는 민중의 상징이고, ‘바람’은 민중을 억누르는 지배세력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처음엔 바람에 의해 풀이 누웠다가 일어난다. 그러나 나중엔 바람보다 먼저 풀이 누웠다가 먼저 일어나는 풀(민중)의 주체적 모습(삶)을 묘사했다. 첫 연에서 ‘풀’이 눕고 울다가 또 눕는 것은 흐린 날 비를 몰아오는 ‘바람’ 때문이라고 했다. 어두운 현실에서 억눌리며 사는 민중의 삶을 ‘풀’에다 비유한 것이다. 둘째 연에선 ‘풀’이 ‘바람’보다 먼저 눕고 울고 일어나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지배세력(바람)에 눌려 사는 민중(풀)의 굴욕적인 삶을 엿볼 수 있다. 셋째 연에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풀'(민중)의 반란이다. 날은 흐리고 ‘풀’이 눕고 일어나고 웃고 우는 것이 '바람'과는 무관하게 엇갈린 모순을 보이고 있다. ‘풀’이 발밑까지 눕고, 마지막으로 풀뿌리 채 눕는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이 발밑, 아니 보이지 않는 뿌리(근원) 깊숙이 정신까지 유린 당하는 느낌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그러나 피보다 진한 게 정치적 이념과 이데올로기인 것 같다. 오히려 종교는 달라도 크게 문제 되거나 서로 부딪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정치색깔이 다르면 서로가 옳다며 끝까지 싸우려 한다.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되다가 끝내 적이 되어 결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싸움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을 서로 문제 삼아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은 서로의 입장이나 개념을 분명히 하지 않고 목소리부터 높이다 보니 감정싸움이나 말싸움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등 정치적 용어를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거나 분명하지 않게 사용하기 쉽다. 이들 용어는 애매모호하다. 즉, 보수는 무엇을 어디까지 지키고 유지하는 것인지 그 범위와 경계가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시대적으로 앞선 국가에서 사용하는 보수는 후진국의 진보보다 더 진보적일 수 있다. 지금의 보수가 과거의 진보보다 훨씬 진보적일 수 있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화자(話者)는 물론 시대(시간)와 장소(공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자들조차 보수와 진보, 급진 등 정치적 용어를 혼동해서 사용하고 있으니 일반인들은 말싸움과 논쟁으로 소모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대다수 정치학자들은 보수의 반대를 진보로 주장한다. 여기서부터 정치적 이념, 나아가 이데올로기 논쟁이 시작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수'의 반대말은 '진보'가 아니라 '급진'이다. '진보'의 반대말은 '보수'가 아니라 '퇴보'(퇴행)다. 지금까지 이들 개념부터 잘못 정립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의 혼선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진보와 보수가 잘못 흘러왔다. 보수(保守)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는 입장이나 태도를 말한다. 보수의 반대인 급진(急進)은 목적이나 이상(理想) 따위를 급히 실현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변화의 속도에 따라 '반동(反動)-보수-온건-급진'으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바라는 태도에 따라 '진보와 퇴보'로 각각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를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파의 가장 끝 지점인 반동주의(反動主義)는 진보적이거나 발전적인 움직임을 반대해 강압적으로 가로막는 입장으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반동·회귀'의 위치에 서 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으로 내려오는 북한의 '김씨왕조'가 반동주의에 포함된다. 보수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 유지하는 입장을 취한다. 자유주의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이데올로기로 개인이 정치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힘에 의한 억압이나 부담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급진주의(radicalism)는 현존하는 정치체제나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온건한 개량·수정주의를 부정하는 주의다. 정치적 행동과 사상에 있어서 극단적인 좌파의 행동과 사상을 말한다. 필자는 리버럴리즘(liberalism), 즉 '진보적 자유주의(진보하는 보수)'를 신봉한다. ▶진보는 좌파의 전유물 아니다 "우리나라 진보의 경우 깜빡이는 좌측으로 넣고 차는 우측으로 몰았다"는 주장은 '좌파=진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진보와 좌파를 동일시하고, 우파에는 진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좌파가 진보를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가져가 효과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선동과 선전에 강한 좌파는 보수를 권력을 유지하는 '수구골통'으로 몰아간 반면 자신들은 사회와 역사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하는 진보로 미화시켰다. 어느새 진보의 반대가 보수가 됐다. 보수에도 진보에도 속하지 않는 일부 중도층은 '보수골통'으로 분류되기 싫어 진보 쪽으로 기우는 경향도 있었을 것이고, 진취적으로 멋지게 보이는 진보가 득세한 것은 당연하다. 민주주의에도 개인의 자유를 앞세운 자유민주주의와 정치·경제적 평등을 강조한 사회민주주의가 있듯이 진보는 좌파·우파 양쪽에 다 있다. 이를테면 진보는 좌파·우파로 구분해서는 안된다. 진보의 사전적 반대어는 보수·퇴보로 나온다. 그동안 우리는 진보의 사전적 반대말로 단순히 보수란 말로 거의 사용해 왔기 때문에 이같은 혼돈이 초래됐고, 좌파는 자기 진영에 유리한 대로 진보를 멋대로 이용했다. 좌파가 진보로서 변화와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각인해 놓은 결과 보수·우파는 자연스레 퇴보의 집단으로 매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수·우파가 역사의 죄인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좌파는 그럴듯한 진보를 앞세워 보수·우파를 잠식해 들어갔다. 이제는 좌파의 전유물처럼 돼 있는 진보를 우파(보수) 쪽으로 되찾아 와야 한다. 진보의 반대는 퇴보다. 따라서 진보의 이념적 스펙트럼의 반대를 퇴보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리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의 저자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등 진보적 학자들이 2019년부터 '진보에 대한 담론'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좌파의 진보 독점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최장집 명예교수는 "한국의 진보파가 이해하는 직접민주주의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뿐 전체주의와 동일한 정치 체제”라며 “진보파들은 제도권 밖 시민사회를 조직·동원하는데 사활을 걸었고, 이러한 흐름이 문재인 정부를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민주화를 주도했던 운동세력들의 다수가 ‘운동론적 민주주의관’의 경향을 보인다.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선과 악 등의 대립 항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념의 형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며 "운동권 학생들이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정치계급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전부터 '교조적 진보'의 틀에 갇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이비 좌파'의 진보의 민낯을 보지 않았는가! 최 교수가 지적했듯이 민주와 진보의 탈을 쓴 '사이비 좌파'는 진보와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퇴보시키는 전체주의식 체제로 흐르는 만큼 뼈아픈 자기반성이 요구된다. 자유민주주의보다 진보적으로 보였던 사회주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이비 좌파·진보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 동유럽과 구소련의 사회주의 체제 붕괴를 눈으로 목격하고도 말이다. 교조적 이데올로기와 순수한 이념을 구분하지 못했던 1980년대 학생운동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공산주의자'라고 발언해 재판에 넘겨졌으나 지난 9월 무죄 취지의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을 받은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1980년대 의식화 학습을 통해 젊은이들을 소위 뿅가게 만든 공산주의 이론은 ‘자유민주주의는 가짜’라는 것”이라 말했다. 고 전 이사장은 "공산주의는 자유민주주의를 놓고, 소수 부르주아가 다수 농민에 대해 착취하는 구조로 본다”며 “그래서 다수 농민이 소수 부르주아를 다스리는 세계가 바로 공산주의 이론”이라고 단정했다. 고 전 이사장은 공산주의 이론이 학생 운동권에 팽배했던 것과 관련해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은 권위주의 정부(군부독재)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달했다"며 "군사정권 하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좌절감이 좌익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로 흘러간 감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해 젊은이들은 공산혁명만이 길이라 생각했다"며 "전두환 군사정권을 타도를 위해 젊은이들은 차선으로 공산주의를 택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인류의 공상적(空想的)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지 진보의 산물이나 혁명의 결과물이 아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했는데도 사이비 좌파·진보주의자는 이에 승복하지 않는다. 다원주의 시대에 역행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내걸고 일인 일당 수령 독재를 펼치고 있는 북한을 보라. 공산주의는 수천만 농민들이 똑같이 주권을 가질 수 없다. 노동자·농민들의 주권을 중앙 공산당에 위임해 결국 주권은 중앙 공산당이 가진다. 나아가 공산당원들 역시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이들은 공산당 중앙위원에게, 중앙위원은 1인 수령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피라미드 구조가 바로 북한 독재체제의 실체다. 수령 1인 독재 체제는 마치 500년 '이씨조선'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김씨왕조'(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를 고착시켰다. 그래도 이씨조선은 왕에게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사간원(司諫院)은 물론 목숨걸고 임금에게 주청한 사림(士林)과 유생(선비)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어떠한가. 노동당 고위간부들이 태양 같은 어버이 수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심스레 말하는 태도는 왕조시대보다 더한 신격화(神格化)가 아닌가? 이게 사회주의(공산주의) 진보인가! 진보는커녕 역사의 퇴보이고, 역사의 반동(反動)이다. 주사파나 친북·종북을 외치는 무리들은 이같은 북한의 '김씨왕조'가 무엇이 좋아서 아직도 찬양하고 있는가? 이들에게 그렇게 북한이 좋으면 북한에 가서 살라고 하면 과연 몇 명이나 자원할까? 사이비 좌파·진보가 하루속히 착각과 환상에서 깨어나기를 촉구한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탈북자 출신의 박연미(27) 북한 인권운동가는 2014년 10월 아일랜드에서 열린 '세계 젊은 지도자 회의'(One Young World Summit) 연설을 통해 북한 독재 정권의 인권 참상을 고발, 세계적 주목을 받은 바 있다.(유튜브 시청 '탈북 미녀 박연미의 가슴 뭉클한 연설' 검색) 박연미 탈북자는 이 연설에서 "북한에서는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 바보라서 그런 걸 까요? 70년간 지속된 억압 속에도 왜 한 번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제 답변은 만약 자신이 노예라는 걸 모른다면, 만약 자신이 고립되어 있고 억압을 받고 있는 것도 모른다면 어떻게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을까요?"라고 되물었다.
"나는 정의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 정의가 내 어머니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다면 나는 어머니의 편에 설 것이다." 이 말을 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트 카뮈의 정의관(正義觀)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다. 아무리 훌륭한 정의라도 인간의 생존권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정의는 따를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LH 사태, 성남시 대장동 사태 등으로 온 국민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공익과 공동선(共同善)을 실현해 나가야할 공공기관이 공적인 직위를 악용해 되레 공공의 이익을 사익으로 취하는 악행을 계속 자행하고 있다. 국민은 공정과 정의가 무너진 현실 앞에 분노하고 있다. '불환빈환불균(不患貧患不均)'이다. 가난(어려움)은 참을 수 있어도 불공정은 참지 못한다는 의미다. 극심한 양극화로 국가공동체가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코로나19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공정과 정의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 큰 돈이 되는 일이라면 공직자의 윤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혼마저 팔아 버리는 그들에게 공정과 정의란 자본주의의 최고 가치인 황금만능에 근거로 하고 있다. 그들에게 정의란 곧 돈과 권력이고, 돈과 권력이 곧 정의다. 여기에 공공의 이익이나 공동선과 공정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없었다. 중국 송(宋)나라 유학자 육상산은 일찌기 '(백성은) 가난함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않음을 근심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이외수의 소설 '보복대행전문주식회사'에서도 인용됐다. 원래 이 말은 논어 계씨편의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불환과이환불균, 불환빈이환불안)'에서 유래했다. '정치를 함에 있어 위정자는 백성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불평등한 것을 걱정하며 백성이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불안해 하는 것을 걱정하라'는 의미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정의와 공정의 관점에서 볼 때 문재인 정권의 문제는 ‘선택적 정의’에서 비롯된다. 행정·입법·사법을 한 손에 장악한 정치권력이 자기 진영의 패권 논리를 정의와 동일시한 결과, 공정이 무너지고 총체적 아노미(anomie·무규범 상태)가 초래됐다"며 "정의를 자기편에 유리하게 선택적으로 적용한다면 그건 정의가 아닌 불의다. 동시에 범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가 ‘강자의 이익’으로 타락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문재인 정권의 선택적 정의는 정의의 보편성과 일관성을 거부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정신적 기초를 위협한다. 권력을 등에 업은 불의가 정의를 참칭하는 세상에선 상식을 가진 이가 공황상태에 빠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 울화증과 무력감이 널리 퍼진 배경"이라고 덧붙였다. ▶정의란 공정한 룰부터 세워야 도대체 정의가 무엇이길래 미국에선 10만부 남짓 팔린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한국에서 200만부 넘게 팔린 것일까?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정리됐을까? 아닌 것 같다. 이는 한국인들의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나 정의 실현의 강한 욕구가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한국이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느끼는 반증이다. 미국 사회는 38% 응답자가 불공정하다고 답변한 반면 한국은 2배 가까운 74% 응답자가 불공정하다고 답변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반영됐다. 한국에서 정치학이나 철학 전공자 외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정의에 관심이 많고 정의로운 사회을 위해 행동으로 보여주는 이유는 그 만큼 정의로운 사회에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내건 '정의사회 구현'에 정의가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며 강조했던 정의와 공정, 평등은 어디로 갔는가? '조국·추미애·LH사태'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공정 터널의 끝은 어디인가?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사회에서 정해진 룰(rule)이 공평하지 않다면 수많은 경쟁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정의란 게임이나 경쟁에서 룰의 공평성에 관심이 집중돼 있다. 자신이 경쟁에서 살아남느냐, 아니면 어느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정해진 룰이 결정적인 심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는 곧 룰이며, 룰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공평·정의의 차이 정의(正義)의 사전적 의미는 개인이나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다. 공정(公正)은 공평하고 올바름을 말한다. 공평(公平)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을 뜻한다. 정의, 공정, 공평은 비슷한 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나 사전적 의미로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우선 공평과 평등의 차이부터 살펴보자. 평등(平等)은 권리나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키가 큰 사람, 중키, 작은 키 세 사람이 담장 너머 야구 게임을 보는 현장으로 가 보자. 장신은 그대로 야구 시합을 볼 수 있고, 중키는 뒤꿈치를 들어야만 겨우 경기장이 보인다. 단신은 아무리해도 눈높이가 담을 넘을 수 없다. 그곳에 의자 세 개가 있다고 하자. 평등(平等)에 따르면 이 의자를 세 사람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키 큰 사람은 더 넓은 야구장이 보여 더욱 좋아질 것이고, 중키는 뒤꿈치를 들지 않아도 경기를 편히 볼 수 있다. 그러나 키가 가장 작은 사람은 의자 위에 올라서도 경기장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공평이 등장한다. 즉, 의자 3개 중 2개는 가장 키가 작은 사람에게, 1개는 중키에게 주어 이들 세 사람의 눈높이를 고르게 하는 것이 공평(公平)이다. 공정(公正)은 이같은 공평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불법이나 편법, 반칙, 청탁 등 부정이 개입되지 않도록 공적으로 바르게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평등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얼굴이 똑같은 사람은 없으며, 금수저와 흙수저 등으로 불평등하다. 이같은 불평등을 점차 공평하게 만들어 가는 공정한 사회 제도와 국가 정책이 중요하다. 즉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자본주의 병폐를 막고, 공평한 룰로 경쟁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정의롭고 공정한 국가다. ▶존 롤스의 정의 '공정한 분배' 『정의론』(A Theory of Justice·1971)이란 책으로 유명한 존 롤스(John Rawls·1921~2002) 전 하버드대 교수는 인류의 영원한 과제인 자유(자유주의)와 평등(사회주의)을 정의롭게 해결하느냐에 몰두했다. 존 롤스에 있어서 정의의 제1원리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롤스 정의론의 핵심은 자유주의며, 자유주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자유에서 찾는다. 누구나 국가 권력이나 사회 전체의 평등을 앞세워 자유가 침해되거나 개인의 자유가 희생돼서는 안된다. '자유의 제1원리'는 사상·양심(신앙)·언론·집회·결사의 자유와 거주 이전의 자유, 소유권 보유 등의 자유 등 자유주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대한민국 헌법에도 보장돼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제2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헌법 제23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고 각각 규정하고 있다. 롤스는 인종차별과 능력주의에 따른 부의 양극화 등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켜보면서 정치철학자가 된 후 평생을 '사회정의' 문제 해결에 천착했다. 존 롤스 정의론의 제2원리는 '차등의 원칙'이다. 그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못하는 차별적인 분배를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다만 차등 분배가 용인되려면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 즉 '최소 수혜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유리해야 한다. 두번째 제2원칙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고 균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 잘 만나 '금수저' '아빠찬스' 등 특혜를 누리는 것은 불공정한 만큼 정의의 원칙에 반한다. 롤스는 사회를 '상호이익을 위한 협동체'로 본다. 그에 있어서 사회정의의 핵심은 분배를 어떻게 공정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또한 분배를 하는 과정이 정의로우면 결과와 상관없이 정의로운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롤스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반대한다. 롤스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사회구성원이 만족하는 총량만 다루었을 뿐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그 총량이 어떻게 공정하게 분배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환구 전 교수는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재검토」에서 이같이 주장하면서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의 큰 이익을 위해 소수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을 정당화하며, 결국 노예제도까지 인정하는 파국을 초래한다고 덧붙였다. ▶마이클 샌델 "공정성 이전에 좋은 삶의 본질이 중요" 마이클 샌델은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고,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발표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으로 한국에 '정의 열풍'을 일으켰던 샌델 교수는 2010년 우리나라를 방문해 "정치의 핵심에는 공동선이 있어야 한다. 정치가 협소하게 경제에만 치중하면 이런 중요한 윤리와 영적 가치를 다루지 못할 수 있다. 사람들은 윤리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정치가가 나타나길 바라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쟁은 사회 제도나 조직의 목적, 그것이 나누어 주는 재화, 그리고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는 미덕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좋은 삶의 본질을 논하지 않고는 공정성을 말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라고 강조했다. 샌델 교수는 2020년 9월 『공정하다는 착각』이란 책을 출간해 미국 현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능력주의의 폭정: 과연 무엇이 공동선을 만드나?)이다. 샌델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해왔던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하고 보상해주는 능력주의 이상이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다며 이러한 능력주의가 제대로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 ‘공정함=정의’란 공식은 정말 맞는지 진지하게 되짚어본다. ▶롤스의 사회성과 샌델의 공동선·공공성 마이클 샌델이 비판한 롤스 교수와 정의의 공통점은 없는가? 롤스의 사회성과 샌델의 공동선(공공성)에서 정의의 합의점을 찾아볼 수 있겠다. 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나 홉스의 법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사회관계규범'으로서 사회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샌델도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동선(共同善)과 공공성(公共性)을 매우 강조한다. 그는 정의란 사회구성원의 행복을 극대화하고 자유를 존중하며, 미덕을 기르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샌델은 ‘논쟁이야말로 건강한 사회의 상징’이라며 사회구성원들이 정의가 무엇인가를 놓고 벌이는 끊임없는 토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사회적 담론'과 '공론의 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양식 교수는 "지난 20세기 우리 역사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역경 속에서 고도의 성장을 이룩해 선진국 반열에 올랐으나, 지금 불공정의 후유증을 혹독하게 겪고 있다. 극단의 시대를 거치면서 친일과 반일, 보수와 진보, 자본가와 노동자, 있는 자와 없는 자 등으로 사회구성원이 나뉘어져 있다. 그 결과 사회 구성원 각자가 개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삶의 목적을 두는가 하면, 내로남불의 편가르기와 행동에 익숙해져 있고 공동체는 갈라지고 또 갈라져 분열될대로 분열되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조화와 균형미가 사라진 것이다. 한 마디로 공공성과 공동선이 무너진 것이다"라고 했다. 김 교수는 "진정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공공성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선에서 다양한 논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독선과 주관을 넘어설 수 있다. 그것은 마이클 샌델의 말처럼 시민으로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생각하게 하여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경청에 익숙해져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라는 철학자 이진우 교수의 지적처럼 공정성과 공동선 등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논쟁이 없는 사회야말로 정의가 없을 것이다. ▶공동선과 개인의 자유는 상호보완적이다 2010년 우리나라에 ‘정의 돌풍’을 일으켰던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센델 교수가 2012년 6월 방한 시 자신의 정의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공동선, 공익은 민주주의 사회의 최고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동선이란 일반적, 추상적인 정의라서 여기에 살을 붙이기란 어렵다. 사회마다 공동선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다르다. 다만 민주주의가 잘 번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측정기준은 공동선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한 공적인 토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정치적 논쟁은 권력 다툼, 이익단체들의 자기 이익 중심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정치에서 돈의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자기 이익 위주의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공동선에 대한 토론은 자기 이익을 위한 정치논쟁이 아니라 참된 공동선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경제가 민주주의정치를 우리 사회에서 밀어내고 있다. 경제는 중요하다. 하지만 경제가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니다. 유홍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샌델 교수의 열망과는 달리 현대 다원사회에서의 정의 관념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자유와 평등, 정치와 경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분배와 인정 등의 제도와 관심들이 분화하고 교류하는 양상은 복잡하다.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각각의 영역은 고유한 정의 관념과 원칙을 자율적으로 형성해간다"고 주장했다. 유 교수는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의 역할은 영역별 자율성을 보장하면서 상호협력을 위한 통합을 유지해가는 것이다. 정치에서의 정의는 부분적 요소들 간의 ‘조화’의 문제다. 샌델 교수의 정의 담론에는 부분적인 ‘영역별 정의’와 전체포괄적인 ‘정치적 정의’의 구분이 불분명하다. 어떤 시공간의 맥락에서 어떤 정의 원칙이 타당한지 알기 위해서는 『정의란 무엇인가』 식의 기준 선택에 대한 논쟁을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라고 되묻는다.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판되었을 때 잠깐 공동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곧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가치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체주의 사회로 나가는 길을 닦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과거 이런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다르다. 과거와 같이 특정 정치세력의 선동이나 조작에 의해 일반대중이 일방적으로 조종당하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공동선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요소가 있다면 대중적 담론을 통해 결국 도태될 것이다. 오히려 공동선은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사회적 약자를 비롯한 다수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시켜줄 수 있다. 허울뿐인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시켜줄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공동선과 개인의 자유는 상호보완적이지 결코 배타적이 아니며,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공동선이 제대로 확립된 스웨덴이나 덴마크,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 개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며 공동선이 쇠퇴함으로써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사실상 위축되고 공동체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을 들었다.
1948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선포한 세계인권선언 제1조에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명시돼 있다. 바로 천부인권(天賦人權)이다.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권리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권리다. 자기보존이나 자기방위의 권리, 자유나 평등 등의 권리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초적 권리는 생명권(生命權) 즉, 인간의 생명이 불법으로 침해 당하지 아니할 권리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살 곳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식주(衣食住)는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기본권으로 다른 것에 의해 제한 받아서도 안된다. 따라서 천부인권은 자유와 평등 이전의 생존권이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원래 일치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은 『자유론』에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 한'으로 자유의 범위를 제한했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자신의 자유도 침해 당하지 않는다. 타인이 자유로울 때 자신도 자유롭고, 자신이 자유로울 때 타인도 자유롭다. 자신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는 평등하다. 이처럼 자유와 평등은 이분법적으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으로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사회적 가치다. 자유를 위해 평등이 제한되고, 평등을 위해 자유가 제한될 수 없다. 요컨대 자유의 이념과 평등의 이념은 원래 일치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와 평등 중 어느 쪽을 우선할 것인가? 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와 정부개입주의 사이에 늘 놓여 있는 인류의 영원한 과제다. 대표적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1980년 펴낸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평등을 자유보다도 앞세우는 사회는 결국 평등도 자유도 달성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면 자유가 파괴될 것이며, 좋은 목적을 위해서 끌어들인 힘일찌라도 결국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려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말은 결국 "평등부터 앞세우는 사회는 자유마저도 잃는다"는 의미다. 프리드먼은 자유보다 평등을 우선하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고, 정부 주도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정부개입주의(interventionism)는 잘못된 환상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프리드먼은 “정부의 역할은 개인의 생명과 재산, 자유를 지키는 일로 최소화해야 하며 정부의 힘은 최대한 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자유인이라면 각자의 삶을 정부 간섭 없이 자유롭게 계획하고 꾸려가는 자기책임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많은 국가에서 정부 역할과 개입이 계속 커지고 있다. 프리드먼이 우려한 자유보다 평등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개인의 자유와 책임보다 국가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정부의 재난지원금을 비롯한 보편적 복지가 대표적이다. 통계청의 올 2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분석해 보면 전 국민 재난지원금 효과가 사라지자 빈부 격차가 더 커졌고, 재난지원금 효과가 사라지면서 분배도 더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야론 브룩 미국 에인랜드연구소장은 “정부가 규제와 보조금 등으로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고 있는데, 그게 정치적 불평등이자 경제적 평등을 훼손해가는 과정”이라며 "국민의 개별적 자유를 지켜주지 않는 정부가 큰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여기서 자유란 무엇인가하는 근원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 보자. 민주주의국가에서 최상의 이념인 자유를 내가 지금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내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가 참된 자유가 아니라 국가 권력 등이 통치상 조작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가 보편적 복지 등으로 시민의식을 마취시켜 마치 시민들 자신이 자유를 향유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환각제는 아닐까. 나의 자유를 어떻게 나의 자유로 확신할 수 있는가.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누었다. 소극적 자유란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liberty from)를 말하며, 적극적 자유란 어떤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liberty for)를 말한다. 소극적 자유는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는 우리나라 헌법 21조 1항에 잘 나타나 있다. 적극적 자유란 개인이 지닌 개성과 가능성, 목표를 스스로 실현하는 자아실현(自我實現)이나 자아완성의 자유를 말한다. 적극적 자유는 자신의 의지와 이성에 따라 어떠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누구나 소극적 자유를 적극적 자유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나아가 자유를 집단에 적용하는 것도 금물이다. 자유를 집단에 적용하게 되면 집단의 구성원인 개인들에게 집단의 목표를 강요하게 되어 개인의 자유가 침해 당하기 마련이다. 파시스트와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 같은 전체주의자들이 국가 전체를 위해 개인의 자유와 희생을 강요한 결과 개인의 자유를 유린하는 전체주의로 전락하게 된다. 존 스튜어트 밀은 20세기 전체주의의 산물 공산주의 체제가 생기기 이전인 19세기 유토피아적 공산주의 모델을 향해 "과연 인간 본성의 다양성과 부합하는가”라는 문제 제기와 함께 “평등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라는 것은 가장 고귀한 인간 본성의 박탈”이라고 강조했다. ▶백범 김구의 정치 이념은 '자유 제일주의' 백범의 ‘나의 소원’ 제2장 ‘정치 이념’의 전반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김구 선생의 주장도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의 허울에 불과한 평등에 의해 자유의 속박과 박탈을 심히 우려하는 성정(性情)에서 나왔을 것이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되,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자 플라톤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The Republic)』에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플라톤은 여기서 소크라테스를 화자로 내세워 대화를 풀어가는데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트라시마코스에 소크라테스가 반박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를 바라고 통치하려 하지 않는다네.(중략) 그들 스스로 통치하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받는 가장 큰 벌은 자기들보다 못한 자들에 의해서 통치 당하는 것일세. 적격자들이 통치하기로 승낙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두려워하기 때문인 듯 하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마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인 양 권력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대신 이 일을 맡아줄 더 훌륭한 사람들이나 대등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어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다가간다네.”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자들에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말은 "그들 스스로 통치하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받는 가장 큰 벌은 자기들보다 못한 자들에 의해서 통치 당하는 것일세"에 해당한다. 이 말은 누가 해도 정치는 마찬가지라는 입장의 정치적 허무주의자와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민주시민으로서 정치의식을 환기시켜주는 명언으로 자주 사용된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투표 독려 차원에서 이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저질 정치인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유권자들이 심판해야 한다"며 후보자나 칼럼니스트 등은 목소리를 높인다. 즉, 당선되자마자 주민들은 뒷전으로 하고 오로지 자신이 다음 선거에 당선되는데만 힘쓰는 '정치꾼'이나 시정잡배(市井雜輩) 같은 자들이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표로써 신성한 참정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표해야 저질스러운 인간의 지배 막는다"는 말로 축약된다. 루이스 라모르는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순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투표하지 않는자, 불평할 권리도 없다"고 꼬집었다. 바꿔말하면 자신을 대신해 정치할 일꾼을 뽑는 중요한 선거에 무관심했거나 어떤 후보인지도 모른 채 편협된 지역적 정서 등에 이끌려 '묻지마 투표'를 한 결과 피해는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주인이고 정치인은 주인인 국민이 뽑는 지역의 일꾼이다. 때문에 국민 모두는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는가를 충분히 검증한 후 지역 일꾼을 선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머슴인 그들은 투표할 때만 머리를 숙였다가 당선되면 주인인 국민을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 가두리 양식장에 가둬 놓고 개·돼지 취급하게 된다. 결국 머슴이 되레 주인 행세하면서 가두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국민을 교묘하게 짓밟을 것이다. 국민 모두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들은 절대로 가두리를 치우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은 용으로 군림하면서 정작 국민은 개·돼지 취급하는 위선적인 '정치꾼' 같은 인물을 미리 파악해 절대로 뽑아주지 말아야 하고, 실체를 모르고 선출했다면 다음 선거에서 표로써 이들을 심판해야 한다. 자기이익만을 쫓는 '정치꾼'(politician)과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정치가'(statesman)는 제임스 클라크의 다음의 말에서 쉽게 구분된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훌륭한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정치 입문자가 가장 명심해야 할 명언이다. 국민 모두는 자신의 지역구 정치인이 정치꾼 행세를 하는지 정치가의 길을 가는지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정치인의 '왕도정치'와 정치꾼의 '패도정치' 정치인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정치꾼은 패도정치(?========>?? 道政治)를 지향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사단(四端)으로 하는 유가의 정치적 이상은 왕도(王道)사상, 즉 인덕(仁德)을 근본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다. 반면 패도정치는 인의를 가볍게 여기고 무력이나 권모술수로써 공리(功利)만을 도모하는 정치다. 맹자는 왕도정치를 이상적 형태라고 숭상했고, 덕이 없고 엄격한 법가에 의한 통치 형태를 패도로 경멸했다. 임금이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지 않고, 힘으로 굴복시키는 공포정치를 편다면 백성은 임금을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잘 말해 주고 있다. 오늘날 공자의 인(仁)에 의한 덕치와 맹자의 왕도정치를 덕목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훌륭한 정치인을 보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더구나 현명하다는 유권자들은 왜 이같은 정치인이 아니라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정치꾼을 계속 뽑아 주는 것일까? 지역을 위해 소신 있고 바르게 할 수 있는 인물임이 검증됐는데도 그를 뽑아주지 않는 것은 바로 사표심리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국의 지역구 선거에서는 지지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낮으면 '가장 나쁜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차선(次善)이나 차차선(次次善)의 후보'에게 표를 주는 '사표(死票·선거에서 떨어질 후보에게 던져진 표)방지 심리'가 발동한다. 이같은 사표방지 심리에 '밴드웨건'(band wagon) 효과까지 겹치면 능력 있는 올바른 인물이 선출될 가능성이 낮아 앞서 지적한 대로 선거가 끝나면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기 쉬울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은 일도 잘하고 능력도 있는데 정당 공천을 받지 못해 당선 가능성이 낮아 그에게 표를 주지 않고, 차선이나 차차선의 인물이지만 당선 가능성이 유력해 그에게 표가 몰리는 현상을 실제로 매번 경험하면서도 계속 되풀이되는 것은 유권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사표방지 심리와 밴드웨건 효과의 문제점에 대한 황진규 작가(철학흥신소 운영자)의 다음 글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밴드웨건' 효과라는 게 있다. 유행에 따라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현상을 뜻하는 경제용어다. 다른 사람이 사면 나도 사고 싶은 일종의 편승효과다. 정치에서도 밴드웨건 효과가 있다. 다수의 후보가 있어도 소수의 후보에게 표가 몰리는 현상이다. 쉽게 말해 '당선될 후보를 찍어줘야 한다'는 일종의 편승효과다. 예를 들면, 딱히 A후보를 지지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A후보를 지지하는 것 같아 좀 못마땅해도 A후보를 찍어주는 것이다. 선거가 임박하면 이런 밴드웨건 효과의 위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당선될 후보인지 아닌지 선거가 임박할수록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이런 밴드웨건 효과는 왜 생길까? 기본적으로는 최악(最惡)을 막기 위해 최악보다는 덜 나쁜 차악(次惡)을 선택한다는 마음탓일 것이다. 실제로 B후보를 지지하지만 '깜이 안 되는' C후보(최악)가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D후보에게 표를 주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밴드웨건 효과를 만든다. 밴드웨건 효과의 다른 원인이 있다. '사표방지 심리'다 사표방지 심리는 안될 것 같은 후보에게 표를 줘서 표를 죽은 표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A후보를 지지하지만 찍어도 안될 것 같아 B후보에게 표를 주는 경우다. 사람들은 사표방지 심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지 하는 사람은 따로 있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B후보를 찍는 거야"라며 자신이 전략적이며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은근히 자랑한다. 이같은 사표방지 심리는 '전략적'이며, '합리적'인 것일까? 아니다. 이건 전략적·합리적인 것이라기보다 '비겁함'에 가깝다. 이길 것 같은 사람에게 투표해서 알량한 성취감을 맛보고 싶은 것은 아닐까? 이런 사표방지 심리가 이해도 된다. 우리는 대체로 현실에서 패자가 아니었는가? 아니 승패를 떠나 제대로 승부 한 번도 걸어본 적도 없는 소시민들 아닌가? 그런 우리가 선거를 통해 간접적이고 잠시나마 기분을 만끽해보고 싶은 심정, 이해 못할 바도 없다. 그렇다고 해도 이 사표방지심리가 비겁함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결혼할 만한 사람을 골라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우리는 '비겁함'을 '전략적', '합리적'이라는 말로 포장하는데 너무나 익숙하다. 자신의 남루함과 초라함이 폭로되려 할 때 언제나 전략적·합리적이라는 말로 덕지덕지 화장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 대신 조건에 맞춘 사람과 결혼을 하지만 스스로에게 말한다. "결혼은 현실이잖아. 현실은 합리적으로 생각해야지"라고···. 그러나 자신이 투표로 잘못 선택한 그 현실이 불행으로 이어질 때는 이미 늦었다.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지역 일꾼이 누구인지 철저히 검증하고 제대로 뽑아야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다. 상당수 유권자들은 말한다. "그 놈이 그 놈이다. 되고 나면 다 똑같은데 뭐 할려고 투표하나"라고···. 아니다. 다 똑같지 않는 숨은 일꾼을 뽑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닐까?
"정치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 말은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칼 슈미트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정확히 그는 자신의 저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적과 동지는 쉽게 나눠지지 않는다. "적은 내부에 있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를 함축하는 말이 '적과의 동침'이다. 1991년 미국에서, 2011년 한국에서 나온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적과의 동침'은 적수를 바로 옆에 두고 잠들어야 하는 것처럼 맘놓고 있다간 언제 상대로부터 기습을 당할지 몰라 불안해 하면서도 공생해야 하는 관계를 말한다. 고사성어 오월동주(吳越同舟)도 비슷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불공대천(不共戴天: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의 원수로 4대에 걸쳐 싸웠다. '손자병법' 첫 편에 오와 월의 전쟁을 들어 병법을 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느 날 두 나라 경계가 되는 강에서 양국의 사람들이 같은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돌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더니 거센 파도가 연이어 배에 들이닥쳤다. 뱃사공이 돛을 펴려했으나 허사였다. 배가 뒤집히려는 위기일발의 순간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들은 앞다투어 돛대에 달려들어 힘을 하나로 모은 결과 돛은 펼쳐졌고 요동치던 배는 안정을 찾았고 모두 살았다. '타이타닉'은 초호화 유람선의 실제 대형 참사를 다룬 영화다. 1912년 4월 어느 밤, 대서양을 항해하던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는 빙하와 충돌해 배가 침몰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구명보트는 20척에 불과해 탑승객 절반은 구명보트에 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1309명의 승객과 승무원 900여명 등 2200여명의 탑승객 중 1517명이 차디찬 대서양 바다에 빠져 숨졌다. 영화를 보면 서로 살려고 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이제 같은 배를 탔다"는 말은 오월동주나 타이타닉의 스토리처럼 '앞으로 죽거나 살거나 우리는 운명을 같이한다'는 절체절명의 선언이다. 그러나 이 말을 쉽게 던지는 경우도 많다. 이 말을 한 사람조차 위기에 처할 경우 먼저 배신하는 사례도 있다. 특히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뀌기 쉬운 정치꾼들의 말은 절대 믿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가까이 있을 때는 잘 모르는데 내가 결정적 위기에 처하는 순간 상대가 처신하는 걸 보면 그 사람과 나와의 평소 관계가 백일하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희미하다 해서/엷어질 수 없는 사람아/곧 사라질 걸 안다 해서/지울 수 없는 사람아/빛을 잃었기에 더 아련하게/사무치는 사람아/어쩌다 먼 길 돌아와/흰 이슬 가을바람 서성이는 내 방문 앞 추녀 끝에/창백한 얼굴로 떴다가/나도 안 보고 가시려는가" 칠곡군 출신 이해리 시인의 시 '낮달' 전문이다. 이 낮달처럼 내가 사라질 상황이라도 끝까지 나를 배신하지 않고 처음의 관심과 사랑을 지켜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우리는 상처 받지 않으리라. 누구든 '처음처럼'은 처음에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은 마지막까지 한결같을 때 비로소 참말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외상으로 죽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암이나 중병, 심장마비 등 내상으로 많이 죽는다. 우리의 인생도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으로 인한 상처가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외부 상처는 간단히 수술을 하거나 치료를 하면 흉터는 남을지 모르나 통증은 없다. 외적으로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치료하면 시간이 지나면 처음처럼 완치될 수 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건강이 악화된 속병은 외부 상처처럼 특정 부위를 쉽게 찾아 내어 바로 치유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초기단계에서 통증이나 증세가 잘 나타나지 않는 간암 등은 뒤늦게 발견됐을 경우 완치가 힘들다. 이같은 속병보다 더 치명적인 아픔은 바로 마음의 상처다. 화병(火病)과 같다. 울화병은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머리와 옆구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병이다. 숨이 막힐 듯하며, 뜨거운 뭉치가 뱃속에서 올라오는 듯한 증세와 함께 분노와 우울증, 절망감이 함께 나타나는 증상을 말한다. "참는 것이 약"이 아니라 화병을 계속 참다가는 심장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 요컨대 우리 모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아서도 안되지만 타인에게 조그만 상처를 남겨서도 안된다. 별은 하늘에 피는 꽃으로 빛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상의 꽃은 아픈 만큼 피는 땅의 상처다.
◆남북한은 물론 남한조차 '좌빨'(좌파 빨갱이)-'우꼴'(우파 꼴통)로 극한 대립 미국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1960년 자신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종언'에서 미래에는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이 사라진다고 내다봤다. 그의 주장대로 마르크스주의는 1990년대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는 여전히 살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듯이 지식인들조차 공산주의 반대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로 알고 혼동하고 있어 이 같은 언어의 개념부터 명확히 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반대말은 자본주의다. 나아가 '사회주의↔자유주의', '독재주의↔민주주의', '사회주의독재↔자유민주주의' 이렇게 상반되는 용어로 이해하면 된다. 지구 상에 독재와 사회주의는 사라지고 자유민주주의가 계속 빛을 발하고 있는데 한반도는 언제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이데올로기의 섬'으로 남아있을까?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의 태극은 음과 양, 둘로 나누어져 음양이 서로 커지고 작아지는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동양철학이 남북분단의 이념적 대치를 지속시켜 주는 것인가? 그것도 남북(태극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음)이 미국·러시아·중국·일본 4대 강대국(태극기 4괘로 볼 수 있음)에 둘러싸여 냉전의 전장으로 말이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정치철학'을 내놓은 이진우(포항공대 석좌교수) 철학박사의 입장을 들어보자. 이진우 교수는 "탈(脫)이데올로기 시대에 여전히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같은 냉전적·대립적 시각으로 현실을 본다면 변화의 현실과 의미가 제대로 파악될 수 있겠는가? 세계화는 우리의 현실인데도 여전히 식민주의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연 미래의 방향을 올바로 설정할 수 있겠는가? 정당 간 이념적 간격, 그리고 지지층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데도 기존 집단과의 이해관계에 묻혀 편 가르기를 일삼는다면 정부 정책에 대한 자발적 참여가 과연 가능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요컨대 대니얼 벨 교수의 '이데올로기 종언'과 이진우 교수 '탈이데올로기론'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은 물론 남한조차 '좌빨'(좌파 빨갱이), '우꼴'(우파 꼴통)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방위적 생활 속에서 첨예하게 계속 대립하는 것일까? 남한도 이념적으로 통일되지 않는데 어떻게 정상적인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종교적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구분해야 이제는 소모적 이념논쟁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야말로 우리는 '내 편' '네 편'이라는 이분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이기심을 버리고 인류의 보편적 사랑으로 하나로 만나야 한다. 인류의 시작과 마지막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의 가르침도 결국 인간과 신(神)에 대한 '사랑'이다.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 기독교의 십자가 사랑과 구원, 유교 덕목인 경천애인(敬天愛人)도 하늘을 경외(敬畏;공경하면서 두려워함)하고 인간(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들 모두의 교훈은 "서로 사랑하라"로 집약된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敬天),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愛人)하라는 예수 그리스도 율법의 대강령과 상통한다. 넓고 커서 끝이 없는 부처의 자비, 대자대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서로 사랑하기는커녕 왜 종교전쟁을 벌이며 서로 죽이는 극단적 자기모순에 빠져왔는가? 이는 으뜸이 되는 가르침, 즉 종교적 이념과 이상을 실천하기보다는 이같은 신앙과 신념을 자신들이 유리한 대로 이데올로기화(化)해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힌 결과로 보인다.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건 식민사관 조선 시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도 첫 출발은 순수했다. 조선이란 왕조에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 정도전은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王道) 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와 후기, 사림(士林)들이 붕당(朋黨)을 지어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싸우면서 계속된 당파싸움이 동인(東人)· 서인(西人), 남인(南人)·북인(北人), 노론(老論)·소론(少論) 등 사색(四色)으로 갈라졌다. 물론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조선시대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역기능은 관료와 지식인들이 대를 물려가면서 대립하는 양상으로 결국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신봉승 극작가는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저서를 통해 "조선에 대한 식민사관이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많은 사람이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했다"고 지적했다. 신 작가는 "일본은 조선 침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을 역설할 필요가 있었고, 아울러 열등하다는 인식을 심어놓아야 했기에 조선왕조는 이 씨 성을 가진 부족국가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이 엄연히 있음에도 조선을 ‘이씨 조선’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필자는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라 마치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식민사관을 정당화한 국내 역사학자와 지식인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 싶다. 당쟁의 순기능에 대해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한국인의 당파싸움 체질은 한국 사회의 다양성 존중을 반영하는 동시에 다양성 진작에도 크게 기여했다. 물론 다양성을 나쁘게 말하면 분열주의지만, 분열하지 않고 어떻게 다양해질 수 있겠는가. 한국만큼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500년이나 지속된 나라다. 이는 오히려 사색당파와 같은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은 현대 정치판에도 적용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든 당파와 당쟁은 있게 마련이다. ◆"여야 당파싸움, 적당히 하라"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더라도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 양당 중심으로 당론과 이해관계를 앞세우며 치열하게 싸운다. 조선 시대 기호학파(畿湖學派)는 이번 21대 총선 결과 경기(수도권)와 호남에서 거의 싹쓸이한 민주당이, 기호학파와 쌍벽을 이룬 영남학파는 대구·경북에서 싹쓸이한 통합당이 그 명맥을 각각 이어가고 있다고 하면 해묵은 '지역주의 프레임'에 갇히는 논리일까? 문제는 국민이 뽑아준 국회의원들이 모여 이룬 정당 간 싸움이 '당쟁'(黨爭)이든 '정쟁'(政爭)이든 정치는 '협치'(協治)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한다. 즉, 협치를 도외시하는 정치는 정당과 현 정부의 소모적 독재에 불과할 뿐 아니라 국민은 애당초 거기에 없다. 협치가 무엇인가? "힘을 합쳐 잘 다스려 나가는 것"이다. 무언가를 결정하기에 앞서 '협의'와 '공감대'부터 조성하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협력해 중요 현안들을 처리하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나 21대 국회는 어떠한가? 말하지 않아도 국민이 더 잘 알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시는 그와 같은 국회의원을 선출해서는 안된다고 해놓고 이번에 다시 그러한 정치꾼을 뽑은 국민에게 책임을 다시 돌리는 것도 모의한 짓이다. 아직까지 영호남 지역주의와 민주당-통합당, '빨갱이'-'파랭이' 같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민초(民草)는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김수영 시인의 '풀'(시 제목)이 아니던가! 강준만 교수는 "그런 삶의 구조하에선 남 잘되는 꼴을 죽어도 못 보는 사람들이 많다.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자신도 죽으라 하고 노력해야 한다. 한국인은 그렇게 해왔다. 그래서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피곤하고 만족은 영원한 신기루가 되고 만다.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매우 낮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파싸움, 적당히 하면 좋겠다"고 피력했다. 우리가 쓰는 '빨갱이'와 '파랭이'라는 말의 의미를 따지고 들어가면 양파 껍질 같은 것이다. 확실한 것은 빨갱이가 아니어도 총 맞으면 붉은 피가 나오는 법이다. 또 우리나라 태극기 태극 윗부분이 빨강이고, 아랫부분은 파랑이다. 태극의 위 빨강을 '북한의 좌빨'을, 아래 파랑을 '남한의 자유'로 각각 상징한다고 하면 견강부회(牽?附會)일까? ◆민주당-통합당 공통 강령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 명심해야 53년 만에 개원 국회에서 제1야당 없이 여당 단독으로 국회 상임위원장이 선출됐다. 흔히들 여당은 보수적이고 야당은 진보적이라고 한다. 진보적 성향을 보인 더불어민주당이 여당이 되었으니 이제 민주당이 지키고 보호하려고 한다. 반면 여당에서 야당이 된 미래통합당은 여당 시절과는 달리 여당인 민주당에 대해 반박하고 진보세력처럼 정치적 투쟁, 즉 강경노선으로 가는 형국이다. 이를테면 어제의 여당이 오늘의 야당이 되고 오늘의 야당이 내일의 여당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어제의 진보는 오늘의 보수가 되고 오늘의 보수는 내일의 진보가 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보수와 진보는 왔다갔다하고 나라(장소)에 따라 진보와 보수는 다르다. 우리가 보기에 보수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 진보는 진보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는 보수로 보일 수 있다. 이렇듯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는 시대와 장소(국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여야(與野)는 물론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는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고착화된 나머지 유리할 때에는 자기들의 신성한 이념을 앞세우고, 불리할 때에는 무조건 상대를 공격하고 상대가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보는 이른바 '편가르기 사이비 진영론자'에 다름없다. 남아프리카 반투어에 "네가 있어 내가 있다"라는 의미를 지닌 '우분투'라는 단어가 있다. 야가 있기에 여가 있고 야당이 있어 여당이 있다. 與黨(여당)의 與는 한자로 '더불어여, 줄여'자이다. 현재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이름에도 '더불어'가 있다. 근데 이름만 '더불어민주당'이지 베풀어주는 '與'는 아님이 이번 21대 국회 전반기 상임위원장의 독단적 결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야당인 미래통합당도 "21대 국회에서 숨 쉴 수 없다"며 여당의 결정에 무조건 반대할 것이 아니라 어렵겠지만 우리나라 미래와 국민 대통합을 위해 국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 실현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공정·정의, 안전, 포용·통합, 번영, 평화’를 시대가치로 삼고, 서민과 중산층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 것이다." 민주당 정강(政綱) 도입부다. 미래통합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해 발전해온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계승 발전시킨다.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한 세계 선진 국가로 만들고, 국민 각자의 행복을 높이는 데 우리 당의 역사적 임무가 있다." 통합당 정강 도입부다.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보수) 중시하는 통합당 정강과 사회적 평등으로 나아가는(진보) 민주당 정강의 첫 부분에 나타난 공통점은 하나같이 "모든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이다. 무엇보다 보수와 진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처음도 끝도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이다. 혹자는 "우리나라 진보의 경우 깜빡이는 좌측(좌익진보)으로 넣고 실제로 차는 우측(우익보수)으로 몰았다"고 주장한다. 한국 정치와 진보·보수층 이념대립이 이렇게 가다가는 결국 교통사고로 차량은 물론 운전자와 모든 국민이 민주당·통합당의 정강 이념인 '행복'을 누리기는커녕 다치거나 죽고 말 것이다.
누구나 40세면 불혹(不惑)을 떠올릴 것이다. '불혹'은 유교적 봉건주의시대 '공자님 말씀'이다. 눈만 돌리면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인터넷-정보시대는 사정이 다르다. 공자가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40세 불혹'이라 했을까. 초스피드시대에 나도 모르게 받은 유혹을 이기기가 힘들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빨리 달려가고 있다. 자신의 존재와는 동떨어진 채 고속으로 질주하는 자동차에 몸을 싣거나 초고속 인터넷 정보의 바다 속에 함몰된 상태에서 말이다. 더구나 내 자신이 닦으면서 가야할 '마이웨이(My way)'가 아닌 남이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아스팔트길 위를 남들과 똑같이 쉽게, 그것도 재빠른 자동차를 타고서 말이다. 느림에는 동-서양의 구분이 없다. 흔히들 인스턴트 식품, 패스트푸드, 휴대폰, 초고속 인터넷 등이 앞선 서구인들에게는 '초스피드'를 추구하는 사람들로, '비가 와도 양반은 뛰지 않는다'는 유교적 전통관념이 베여있는 중국-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들은 '만만디'('천천히'의 중국어) 민족으로 오인하기 쉽다. 그러나 걷기 예찬론자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빠름을 버리고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깨달으라며 그냥 지나쳐버리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세상을 감상하기 위해 산책을 즐긴다고 했다.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저자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가 속도라면, 느림은 감속의 기법을 다룰 줄 아는 지혜"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느림은 게으름과는 분명 다르며 빠름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능력도 아니라고 이들은 강조하고 있다. '빠름의 철학'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 목적을 빨리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반면 '느림의 미학'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 정당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결과는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당신은 어느쪽을 선택할 것인가. 초스피드시대에 후자를 선택할 경우 누구나 도태된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빠른 자가용, 초고속인터넷 등 하드웨어적인 것이 너무 빨리 나를 도와주고 있으니 정신적인 부분은 빠르지 않아도 된다. 정신세계마저 빠른 하드웨어에 종속된다면 인간의 고유한 모습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빠름을 선택할 것인가, 느림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빠름의 시대적-사회적 상황 속에 '느림의 여유(마음과 정신)'가 함께 조화롭게 있을 때 '느림의 미학'이 비로소 완성된다. 달리는 자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외로워지는 법이다. 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빠른 속도로 달려야 하고, 급기야 달릴 수도 없는 무한속도를 꿈꾸지만 '고독의 끝'에서 정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나는 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더 빨리 달려왔다. 때로는 달린다는 의식을 잃어버린 망각의 상태에서…. 그렇다고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늦었지만 불혹의 나이부터 천천히 걷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빠르고, 편하고, 쉽게 갈 수 있는 '탈 것'을 타고 가지 않겠느냐는 유혹을 거뜬히 이기는 불혹의 40대를 위하여…. 지금이라도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신이 나에게 부여한 나의 길을 찾아 한걸음씩 묵묵히 가야겠다. 그 동안 '탈 것'을 타고 너무 빨리 달려와 나의 진정한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젠 나의 실존과 더 가까이 만나기 위해 그렇게 도망치듯 달려가지 않을련다. 태양이 떠는 낮에는 '눈부신 그림자'를, 달이 떠는 밤에는 '맘부신 그림자'를 내 존재의 벗 삼아 '구름에 달 가듯' 그렇게 걸어가리라. 그 동안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착각한 나머지 한갖된 이상의 스크린에서 맘대로 놀다가 지친 영혼을 추스리지 못했던 과거가 영상처럼 지나간다. 천천히 걷는 나그네는 절대로 지치지 않는다. 그러나 나그네가 나그네답지 않게 목표 지점에 빨리 도착하려거나 어딘가를 정복하려고 '탈 것'을 타고 빨리 가면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다. '자유에 지쳐 쓰러진 나그네'가 되더라도 걸어가야 한다. 생을 제대로 살아보기도 전에 느낀 허무를 천천히 떨쳐버리면서….
플라톤은 정의의 이데아를 위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소크라테스의 독배 사건을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태양의 세계를 본 사람이 어두운 동굴로 돌아와 거기에 있는 포로들에게 너희들이 보고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허구라고 폭로하면 살인을 당할 수 있다."
흔히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로 알고 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고 상당수가 이 말을 인용, 불합리한 법도 마땅히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정당화시켜 왔다.
星! 울고 있었구나. 그간 너랑 만나 마신 나의 술잔으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넘쳐흐르는 너의 울음. 평범할 수 없는 아픈 내음이 물씬 풍기는구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의 무한한 자유공간에서 네티즌들은 나만의 세계를 만끽한다. 그 시간 만큼은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는다. 네티즌이 조작하는 대로 컴퓨터는 100% 순종한다. 또 주인이 클릭하는 대로 인터넷은 열린다. 이를 두고 이원(33) 시인은 자신의 시집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이렇게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