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군(군수 김재욱)은 소상공인의 출산과 육아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대체 인력 인건비를 6개월간 1천200만원까지 지원한다. 신청 대상은 칠곡군에 주소지를 두고 올해 출산한 소상공인과 배우자 중 거주지 및 사업장 주소가 모두 경북에 있는 소상공인으로 출산일 기준 1년 이상 영업, 직전년도 매출액 연 1천200만원 이상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칠곡군의회(의장 이상승)는 19일 본회의장에서 대구시와 국방부에 대구 군부대 통합이전과 관련해 공정하고 투명한 행정절차 이행을 강력히 요구했다. 2022년 시작된 대구지역 군부대 통합이전 유치사업은 우리 칠곡군의 발전과 미래의 새로운 성장동력의 원천이 될 사업으로 11만 칠곡군민과 칠곡군, 칠곡군의회는 군부대 유치를 위해 사활을 걸고 똘똘 뭉쳤다.
봄철을 대표하는 과일인 참외는 전국에서 성주군이 대표적인 재배지로 널리 알려져 있기에 흔히들 성주를 ‘참외의 고장’이라 한다. 그러나 ‘성씨의 고장’이라는 명칭 또한 어울리는 브랜드이다. 전국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현상으로 성주 본향의 성씨가 많기에 어울리는 명칭이다. 그중에서도 이(李)씨의 본관이 여섯개나 되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성씨다. 성주육이(星州六李)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성주육이는 광평이씨, 경산이씨, 벽진이씨, 성주이씨, 성산이씨, 가리이씨를 말한다. 성주이씨가 타문중과 다른 점은 특이하게도 예악(禮樂)과 문장에 뛰어난 선조들이 많다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1천여년간 훌륭한 선조들이 수없이 많은 유문(遺文)과 시문(詩文)을 남긴 명문대가이다. 공자는 아들이자 제자인 공리(孔鯉)에게 요즘 시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다. 공리가 하지 않고 있다고 대답하자, 공자는 시를 모르면 높은 담장에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높은 담장에 얼굴을 마주 대하면 앞이 캄캄하다. 아무것도 안보이고 돌덩이만 보이는 것이다. 공자가 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공자는 『시경(詩經)』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제자들을 꾸짖으며 왜 시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시는 마음으로 느낀 것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게 한다. 둘째, 시는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해 준다. 셋째, 시는 개인이 어떻게 세상과 조화롭게 소통하며 방종과 타락에 이르지 않을 수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넷째, 시는 온갖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카타르시스(cathars) 작용을 한다. 다섯째, 시는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다. 여섯째, 시를 읽으면 새, 짐승, 풀, 나무 등의 생리와 명칭을 알게 해 주는 덤도 있다. 이게 바로 공자의 시론(詩論)이다. 이러한 인문에 관한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지적이 바로 공자 시론의 뼈대다. 그러니까 시는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회, 나아가 사람과 자연의 소통을 시켜 주는 중요한 매개자라는 이야기다. 공자는 『시경』을 일러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다. 사무사는 세속에 찌든 인간들을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힘이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주 만물의 소통을 시켜 주는 중요한 매개자 역할을 한 성주이씨(星州李氏), 이 가문 선조들의 학문은 아마도 현대사회의 세속에 찌든 인간들을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성주이씨 유래 신라 재상 시조공 이순유(李純由)는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했다. 그러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지금의 경북 성주읍 경산동에 숨어 살았다. 이를 안 고려 태조는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같은 백성”이라며 호장 벼슬을 내린다. 후손들이 대대로 호장을 맡아오면서 성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경주이씨로부터 갈라져 천년을 넘긴 성주이씨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시조공의 11대손 성주호장 이장경(李長庚)은 성주이씨의 중시조다. 그의 다섯 아들은 밀직공파 이백년, 참지공파 이천년, 시중공파 이만년, 유수공파 이억년, 문열공파 이조년이다. 그의 아들 다섯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이장경을 경산부원군에 봉했다. 손자 중 이승경은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웠다. 손자 이승경의 출세로 원나라 황제로부터 그의 조부 이장경이 농서군공에 추봉되었기에 성주이씨를 농서이씨라고도 한다. 다정가(多情歌)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백화헌시 주섬주섬 이 꽃 저 꽃 심을 것 없다 백화헌엔 백 가지 꽃이 차야 멋인가 매화꽃 국화꽃이 맑고 좋은데 울긋불긋 다른 꽃 부질없구나 작자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1269~1343)은 농서군공 이장경의 막내아들로 충렬왕 11년(1285) 17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벼슬은 판서를 거쳐 정당문학, 대제학에 이르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퇴계 이황은 공의 인품을 “고려 오백년의 제일인자”라고 칭송했으며, 익재 이제현도 묘지명을 통해 극찬했다. 시문으로 한국문학사를 크게 빛냈으며, 특히 다정가 시조가 유명하다. 이 시조는 충혜왕의 방탕함을 직간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우의법을 써서 왕에 대한 지극한 충성심을 나타낸 것이다. 1341년 성산군으로 사직을 청하였다. 경북 고령군은 공을 기리는 전국백일장을 해마다 4월에 개최하고 있다. 승사(僧舍) 산은 남북으로 오솔길이 갈라지고 송화는 비에 젖어 분분히 떨어지누나 도인은 물을 길어 띠집으로 들어가고 한 줄기 푸른 연기는 흰 구름을 물들이누나 추회(秋回) 하늘 끝에 가을은 왔으나 돌아가지 못하고 외로운 성의 지는 해에 슬픔 이기지 못하네 일찍이 대신으로 문관 자리에 있었건만 지금은 강호에서 낚싯대 추스르니 몸은 근심과 참소로 크게 여위었어도 시는 해방된 생각들 속에서 신기롭구나 진주와 율무는 끝내 구분될 것이나 단지 권세무리들 다스림이 어려운 게 두렵다 작자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1347~1392)은 밀직사사 이백년의 증손, 태재공 이인기의 손자, 가정공 이원구의 장남으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현(申賢)과 이색(李穡)에게 배웠으며, 공민왕 11년 문과에 급제했다. 도은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충신이며 성리학을 완성한 학자로서 고려말 삼은(三隱·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원래 삼은이라면 이색, 정몽주와 함께 야은 길재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 사이에 도은의 절의를 기리며, 야은 대신 도은을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색, 정몽주, 이숭인 세 사람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 죽임을 당한 반면 야은 길재는 천수를 다하고 죽었으니 절의(節義) 면에서 보면 고려의 삼은은 이색, 정몽주, 이숭인 세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도은은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정도전이 보낸 그의 심복 황거정에 의해 유배지인 고향 경산(京山)에서 살해당했다. 정도전이 그의 심복인 황거정을 도은이 귀양 간 고을의 수령으로 보내어 매일같이 잡아다가 매질하게 하였다. 하루에도 곤장 수백대를 때리고는 묶어서 말 위에 얹어 달리게 하여 드디어 인적이 없는 먼 곳에서 상처가 짓물러 죽게 하였다. 스승 이색은 이숭인을 가리켜 “해동 선비로는 겨룰 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빼어난 문장가였다. 저서로는 태종의 명으로 권근과 변계량이 조선조 최초의 금속활자본(1403년)으로 간행된 <도은문집 陶隱文集>이 있으며, 그 후의 목판본은 보물 제1465호로 지정됐다. 도은을 배출해낸 성주군은 최근 도은의 영정과 도은집 등을 간직하고 있는 청휘당(성주군 수륜면 신파리)을 40억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또한 청휘당을 경유하는 가야산 선비길도 조성했다. 오로시(烏鷺詩)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작자 형재 이직(亨齋 李稷·1362~1431)은 이조년의 증손이며, 대재학 이인민의 장자로서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고려 우왕 3년(1377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제학을 거쳐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이조판서에 오르고 판사평부사 때 우리나라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태종 때 성산부원군에 봉해졌고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으며,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시문을 즐겨 ‘오로시’와 후손교육을 위한 ‘계자손시’ 등을 수록한 <형재시집>을 남겼다. 점필재 김종직은 “시문이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힘이 있다”고 예찬했다. 선시(扇詩) 군사를 거느리고 별이 빛나는 밤에 강을 건너니 조선나라 편치 않다는 말 확실하구나. 명나라 임금은 날마다 승전보를 기다리고 이 사람은 밤마다 즐기는 술도 끊었노라. 봄이 오매 하늘 운기 보고 마음 더욱 씩씩해 내가 가는 이 걸음에 왜적들의 뼈가 서늘하리라. 웃으며 환담하고 장담 중에도 승산이 없을까보냐 꿈에도 정마 탄 것 잊지 않노라. 이 시의 작자 이여송(李如松·1549~1598)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황제가 왜적정벌의 명을 내려 원병의 총책으로 조선에 파견됐다. 왜적을 소탕하고 우리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명(明) 조정은 사후에 소보영원백(少保寧遠伯)을 하사했다. 이 시는 개선환국하면서 당시 영의정 서애 류성룡에게 금부채(국보 제414호)에 써 준 작품으로 서애사당(西厓祠堂)에 전시되고 있다. 이여송은 참지공 이천년(李千年)의 7세손으로 이천년은 고려 원종 때의 문신이었던 이조년(李兆年)의 친형이다. 놀랍게도 조상을 거슬러 가면 고려의 문벌귀족까지 닿는다. 이여송의 본관은 성주이씨가 된다. 이여송은 조선족이었으며, 이여송의 부친은 요동총병관을 지낸 이성량이다. 이성량의 고조부인 이영은 조선에서 명으로 이주해 요동에서 살았으나, 집안은 이성량의 아버지 때 몰락해 살림이 매우 빈곤했다. 이성량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북경으로 가 말단 관리가 되었다. 이후 이성량은 무예와 병서 읽기에 진력하여 병법에 통함으로써 공을 세워 요동험산참장이 되었다가 요동의 대소 반란을 평정해 요동총병에 올랐다. 이성량은 91세까지 장수하다 죽었는데, 그의 아들 가운데 여송, 여백, 여정, 여장, 여매는 모두 총병관을 지냈다. 이여송은 이성량의 큰 아들로서 학문도 꽤 익혔고 아버지를 따라 군무에 오랫동안 종사했기 때문에 병법에 밝은 데다 기골이 엄청 장대했으며 매우 용맹했다. 이여송은 닝샤(寧夏)에서 일어난 몽골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장수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종(명 14대)의 명에 따라 조선 파병군의 사령관으로 동생 이여백 등과 4만3천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평양성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여 평양성을 수복하고 왜군의 기세를 눌렀으나, 왜군에 대한 승리로 교만한 채 벽제관전투에 임했다가 왜군에게 대패하고 개성으로 물러섰다. 왜군이 행주전투에서 깨진 다음 한양을 비우고 남하하여 남해안 일대에 웅거하자 명에서는 이여송을 소환하고 유정에게 남아서 명군을 이끌게 했다. 그 후 1599년 토만이 요동을 침공하자 방어에 나섰던 이여송은 적의 매복에 걸려 전사하고 만다. 이여송은 조선 파병 당시 본관이 봉화금씨 성을 가진 여인과 동거하였다. 이여송이 명나라로 돌아가고 몇 달 뒤에 태어난 아들이 이천근(李天根)이다. 이들의 후손이 현재 거제도 장승포에 살고 있다. 이여송의 손자와 이여매의 손자 역시 훗날 조선에 정착했는데 이들도 농서이씨의 후손이다. ◆투금탄(投金灘)···형제의 우애 이야기 이조년(李兆年)이 형 이억년(李億年)과 길을 가다 황금 두 덩이를 주워 나누어 가졌다. 공암진(孔巖津)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다 아우 이조년이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 형이 이유를 묻자 “저는 평소 형님을 공경했는데 금덩이를 나눈 순간부터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라고 했다. 형도 황금보다 형제간의 우애를 소중하게 여긴 아우 말이 옳다고 말하고는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 이때부터 공암진을 투금탄(投金灘), 즉 ‘금을 던진 여울’이라 불리게 됐다. 투금탄 이야기는 초등학교 국정교과서에 실렸으며,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우장산공원 ‘문화의 광장’에 강서문인협회가 건립한 ‘다정가’ 시비와 함께 이 비(碑)가 서있고, 고령 매국정에도 작은 돌에 이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오늘날 황금 만능시대에 이 이야기는 값진 교훈이 되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성주이씨가 배출한 많은 인재들이 각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수원에서 국회의원을 여러번 지낸 이병희씨를 비롯해, 이용택(11·12대 국회의원), 이대순(국회의원·전 체신부장관), 이종율(전 정무제1장관), 이재식(청와대 수석비서관), 이학봉(안기부차장), 이해봉(대통령 행정비서관), 이건상(전 민정당 총무국장) 등이 정계에서 활동했다. 재계에서는 세방기업 회장 이의순씨, 신영섬유(주) 회장 이운일씨, 국도화학공업(주) 이삼열씨 등이다. 군에서는 이규동, 이규승, 이규광(전두환 전 대통령 처가), 이소동(육군대장 예편), 이희근(공군대장 예편) 등이 있다. 칠곡군 집성촌은 석적읍 포남2리, 왜관읍 아곡리·금남리, 동명면 금암리·송산리 등이다. 신연식 본지 북삼지국장 sys2331@hanmail.net
칠곡군보건소는 저체중, 빈혈 등 영양위험요인을 가진 주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영양 UP 조리법을 제공하는‘집 쿡 플러스 조리실습’을 운영한다. 집 쿡 플러스 조리실습은 지난해 코로나 19 감염 예방을 위해 경북 내에서 처음으로 네이버 밴드를 활용해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비대면(언택트)방식으로 진행해 큰 호응을 얻은 바가 있다. 단순히 요리실습을 진행하는 방송이 아니라 방송 중간 영양에 관한 실시간 퀴즈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교육에 대한 집중도를 높인다.
칠곡보웰빙농원(대표 박건영)이 가족 단위 체험장으로 떠오르고 있어 관광산업화가 요구된다. ‘슈퍼줌마’ 블로그 운영자는 이 농원에서 수년째 아이들과 오디따기 체험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미지역 대표적인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 ‘구미맘 수다방’에도 웰빙농원 체험 자료가 올라와 있다. 칠곡군 석적읍 중지리 499-7번지 웰빙농원은 주변에 낙동강 칠곡보와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이 들어서 있고, ‘흰앵두’ 등 희귀한 나무와 식물이 많이 식재돼 있다. 옛부터 예쁜 여인의 입술을 앵두 같은 입술이라 했다. 또 앵두나무는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앵두나무 열매가 다닥다닥 열리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때문에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예외 없이 앵두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빛이 고운 앵두는 달고 새콤한 특유의 맛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한방에서는 앵두가 청량제이고 독이 없으며, 안색을 곱게 한다고 나와있다. 특히 위장에도 좋아 액즙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또한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수분대사를 활발하게 하는 성분이 들어 있어 부종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 폐 기능을 도와주어 가래를 없애고, 소화기관을 튼튼하게 해 혈색도 좋아진다고 알려져 있다. 3월초~4월초까지 피는 앵두꽃은 우아하며, 6월에 익는 붉은 앵두와 하얀 앵두는 자태가 아름답다. 분홍빛 꽃이 피는 나무는 붉은 앵두를, 흰 꽃이 피는 나무는 하얀 앵두를 맺는다. 칠곡보웰빙농원의 ‘흰앵두’는 다닥다닥 붙어 진주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빨간앵두’보다 ‘흰앵두’는 맛이 더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흰앵두’는 당도가 훨씬 높고 신맛이 전혀 없는데다 과육(열매살)도 부드럽기 때문이다. 앵두꽃의 꽃말은 ‘수줍음’이고 앵두나무는 ‘오직 한사랑’이다. 앵 두/이재봉 앵두나무 그늘에 앉아 한 여자를 생각했네. 앵두같이 맑은 여자, 앵두같이 작은 여자, 앵두같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여자, 그 여자가 내 머리 위에서 빨갛게 익어가네. 손만 잡아도 얼굴이 빨개지던 그 여자.
영농현장에서 농업인과 함께 농업의 미래를 연다. 왜관농협(조합장 김영기)은 하루를 농장에서 시작한다, 이른 아침 왜관농협 직원들이 금남오이 집하장에 삼삼오오 노란 영농지원 조끼를 갖추어 입고 모여든다. 직원들은 그날 작업이 필요한 농가에 2명씩 조를 맞추어 투입되어 오전11시30분까지 영농지원 활동을 하고 오후에 다시 농협으로 출근한다. 왜관농협 김영기 조합장은 조합원 중 65세 이상이 50%를 차지하고 70세 이상이 35%를 차지하고 있어 영농철에 인력 부족으로 많은 고충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2015년 취임 전 농촌인력은행사업을 공약 사업 중 하나로 정하고 인력시장 등을 통한 유휴 인력을 농가와 연결해 줄 뿐만 아니라 인건비 일부도 지원해주는 농촌인력은행 사업을 취임 후 중점 주력사업으로 정하고 추진하고 있다. 또한 농협직원과 왜관농협 주부대학, 새마을지회, 왜관농협 취미교실 회원들로 구성된 농사랑 봉사단을 조직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영농지원을 하고 있다. 사업초기에는 단순한 농작업에만 지원을 해 왔지만 지금은 오이, 참외, 포도, 가지 등에 고난이도 농작업도 할 수 있을 만큼 직원들의 영농 기술이 향상되었으며, 농가에서도 처음에는 사무실에서 사무만 보던 직원들이 농작업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고 의구심도 많이 가졌지만 지금은 영농에 많은 도움이 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로컬푸드사업 활성화를 통한 월급 받는 농업인 육성 로컬푸드 사업은 왜관농협 김영기 조합장의 공약 사업 중 하나로 중점주력사업으로 현재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다. 로컬푸드 사업은 생산농가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생산 농업인과 소비자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업으로 소비자는 고품질의 지역 생산 농산물을 중간 유통 단계를 거치지 않고 저렴하게 구입 할 수 있고, 생산 농업인은 정년없이 내 점포 내 가게를 가지고서 월급 받는 농업인으로서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수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왜관농협의 로컬푸드 사업은 2016년 1월 사업설명회를 시작으로 참여농가를 모집하였고 5개월에 걸친 교육을 통해 수료를 하는데, 2018년 5기 까지 수료한 농가가 260명으로 하나로마트 확장 개점과 함께 넓어진 로컬푸드 전문코너를 통해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출하 하고 있다. 왜관농협 로컬푸드는 신선농산물 1일 유통제를 엄격히 지켜 당일 재고는 생산농업인이 직접 수거하고 잔류농약 검사를 통과한 상품만 취급함으로써 품질 및 신선도 유지를 엄격하게 지키고 있으며, 생산자가 직접 가격을 결정하고 있다. 로컬푸드 사업에 참여한 안경출(69세)농가는 “영세농가의 생산 농산물은 과거 대도시 공판장으로 출하 하는 것은 생각도 못했으며, 재래시장 난전이나 자체소비 또는 가족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는 것이 태반사 였으나, 지금은 로컬푸드 매장을 통해 판매하여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손주들 용돈도 줄 수 있고 자식들한테 손을 안 벌려도 좋다”면서 로컬푸드 사업은 실질적인 농가 실익 사업이라며 사업에 참여한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항상 하나로마트 로컬푸드 매장부터 먼저 찾는다는 한인숙(우방아파트 거주)주부는 “우리지역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농산물을 저렴하게 구입 할 수가 있어 매일 하나로마트를 방문 한다”면서 농협 로컬푸드 사업이 계속적으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영기 조합장은 “농산물은 1차식품으로 저장기간 및 유통기간이 짧기 때문에 저장기간을 연장하고 먹거나 마시기 편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농산물 가공산업이 함께 이루어져야 되고 이러한 농산물 가공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행정기관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며 농협과 행정기관이 협력하여 지역 농업농촌 발전의 촉매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잘사는 농업농촌 구현으로 안정된 왜관농협 건설 왜관농협은 그밖에도 원로 조합원의 건강 증진을 위한 “조합원 주치의” 제도를 2017년부터 실시하여 조합원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데 노력하고 있는데, 주민등록상 연도를 기준으로 홀수 짝수로 구분하여 나이가 많은 조합원부터 우선 실시 하여 지금까지 300여 명이 전문 의료기관을 통해 건강검진을 받았다. 또한, 주거개선 복지 지원사업으로 금년부터 실시하는 “조합원 집 고쳐주기” 사업은 생활형편이 어려운 조합원을 대상으로 도배와 장판교체, 지붕 보수, 주방시설교체, 보일러 수리, 전기시설 점검 등 가구당 150만원의 예산을 지원하는데 금년도에 22농가가 지원을 받았다. 김영기 조합장은 이외에도 “농가 실익 증진을 통한 잘사는 농업농촌을 구현하고 신규 수익 사업 창출을 통해 지속 발전하는 안정된 왜관농협을 건설하기 위해 매월 임직원들로부터 아이디어 제안을 받고 있으며, 영농회 좌담회시 아이디어 제안을 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면서 “농가소득 평균 5천만원 달성과 칠곡군 억대농가 1천호 육성”에 왜관농협이 앞장 설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칠곡군 북삼읍(읍장 강광수)은 지난 두 달간 ‘북삼읍 옛사진 공모전’ 실시하고 총 16점의 수상작을 선정했다고 22일 밝혔다. 이번 공모전을 통해 1970년대 이전에 북삼에서 촬영된 마을전경, 농촌환경 등 당시 생활환경과 풍경을 담은 총 302점의 사진 자료가 접수됐다. 당대의 시대상과 문화 생활상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에 중점을 두고 심사한 결과, 대상 1점, 우수상 2점, 장려상 3점, 입선 10점 등이 선정됐다. 영예의 대상은 최인희씨가 출품한 ‘1962년 북삼면 농악대’가 선정 됐다. 심사위원회 관계자는 “1960년대 초가로 지어진 농협 앞에서 의용소방대원으로 구성된 북삼 농악단의 생생한 모습이 지역 근현대사의 문화와 생활상을 보여주어 높은 점수를 받았다”며 수상 이유를 밝혔다. 우수상은 김학술 ‘1960년대 농촌마을 초가집’과 김복득 ‘1970년대 방앗간 모습’이 선정됐다. 이 밖에도 장려상과 입선작은 이지현씨 ‘국민학생 가정방문’, 송권달 ‘면사무소 단체사진’, 안철수 ‘1950년대 북삼읍 소재지 전경’, 이종록 ‘1960년대 전통혼례’ 등이 이름을 올렸다. 강광수 읍장은 “이번에 출품한 사진들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의 시대상과 맞물려 지역사회의 주민 생활상과 의례, 풍속, 교육현장 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며 “북삼읍 뿌리찾기 사업과 연계함으로써 앞으로 북삼읍의 정체성 확립에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에 출품한 사진들 중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들은 읍민들과 함께 북삼의 변천사와 추억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평생학습복지센터에서 주민들에게 공개한다.
경상북도 민물고기연구센터에서는 여름 휴가철을 맞아 평소 월요일을 휴관일로 지정·운영하던 것을 성수기 한달간(7월 20일 ~ 8월 20일) 휴관일 없이 운영하기로 했다. 이번 여름성수기에는 관람객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야외 관람시설 안전휀스 설치, 주차장 협소에 따른 관람객 불만을 해소하고자 주차시설을 추가 확보하여 운영, 극성수기 하루 평균 3,000여명 방문차량에 대해 주차요원을 확대편성 하는 등 즐겁고, 편안한 관람환경 조성을 위해 전 직원이 구슬땀을 흘려 손님 맞을 준비를 마쳤다.
"내가 전에는 더위를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몇 해 전부터 더위가 들기 시작하여, 손으로 물을 희롱하였더니 더위 기운이 저절로 풀렸다. 이로 생각하건대, 죄수가 옥에 있으면, 더위가 들기 쉬워서 혹은 생명을 잃는 수가 있으니,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더운 때를 당하거든 동이에 물을 담아 옥중에 놓고 자주 물을 갈아서, 죄수로 하여금 손을 씻게 하여, 더위가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위는 《세종실록》 30년(1448) 7월 2일 치 기록입니다. 세종임금은 옥 속에 갇힌 죄수의 건강까지도 걱정하는 성군이었지요. 부채 말고더위를 이겨낼 도구가 없던 시절 더군다나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물로 손을 씻는 정도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경상남도 창원군 다호리 고분(사적 제327호)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은 한국고대사의 공백기인 고대국가 형성시기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데 문자 생활의 증거인 붓과 가야금의 원조인 현악기 같은 것들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1호 목관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동검, 중국거울(한경)을 비롯한 청동기와 오수전, 철검, 손칼, 부어 만든 도끼(주조철부), 두드려 만든 판상철부 등 철기제품이 나왔으며 칼집, 활, 화살, 합, 붓, 부채, 칠기와 민무늬토기, 와질토기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다호리 고분은 서기 1세기 후반에서 기원전 1세기 사이의 유적으로 여기서 출토된 것 가운데 하나인 붓은 우리 겨레의 글자 생활이 역사가 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붓은 예부터 문방사우 곧 종이, 붓, 먹, 벼루 가운데 하나로 그 재료는 털로 만든 모필 외에 대나무로 만든 죽필, 칡으로 만든 갈필(葛筆), 짚의 이삭부분으로 만든 고필(藁筆) 따위가 있습니다. 특히 모필(毛筆)에는 토끼털, 양털, 이리, 너구리, 사슴, 족제비, 말, 고양이, 노루,쥐수염, 닭털 따위의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지만 족제비털로 만든 황모필이 유명합니다.
노리개는 조선 여인네들의 한복 저고리 겉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는 꾸미개(장식)다. 모양이 다양하면서도 화려하고 섬세한 노리개는 궁중 사람들은 물론이고,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즐겨 찼다. 몸에 차는 꾸미개는 원래 칼이나 숫돌 같은 삶에 필요한 물건을 허리에 찼던 북방 유목민들의 풍속이 전해진 것이라 한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시대 귀족 부녀자들이 허리띠에 금방울금향낭(金香囊, 향주머니)을 찼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허리띠에 달았던 꾸미개들은 고려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자 허리 대신 고름에 달게 되었다. 노리개는 대삼작,중삼작,소삼작으로 나뉘는데 대삼작 노리개는 궁중이나 양반가의 혼례용으로 쓰였고, 중삼작 노리개는 궁중과 양반들의 일상에서, 소삼작은 젊은 여성이나 아이들이 차던 것이다. 특히 대삼작은 옥나비, 밀화불수(密花佛手, 밀랍 느낌의 천연호박으로 만든 꾸미개), 산호가지, 은장도 따위로 꾸며 매우 화려하다.
재칠곡 영남중·고등학교 동문회(회장 김점훈·영남고 19회)는 2013년 결성됐지만 영남에서 제일가는 동문을 만든다는 야심찬 각오로 뜨거운 동문애를 발휘하고 있다. 먼저 이 동문회는 타동문회에서 하지 않는 일을 먼저 찾아서 실행하고 있다. 재칠곡 영남중·고 동문회는 지난해 11월 24일 칠곡군을 방문, (재)칠곡군호이장학회(이사장 백선기 칠곡군수)에 지역 인재육성과 교육발전을 위해 호이장학금 100만원을 전달하고 앞으로 지속적인 사업으로 이어간다고 밝혔다. 이는 칠곡군지역 동문회에서 처음으로 호이장학금을 기탁했으며, 타동문회의 동참을 이끌어 낼 것으로 보인다. 1935년 4월 개교한 영남학교(당시 대구실수학원 설립)는 올해로 80년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학명문이다. 1951년 8월 15학급을 설립·인가받은 영남고는 대구시 남산동에서 1990년 12월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으로 학교를 이전한 후 1995년 4월 인근 사거리 대구지하철 공사장에서 도시가스 폭발사고로 학생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영남중·고 교훈은 '잘살자(올바르게, 부지런하게, 튼튼하게)'로서 백선기 칠곡군수의 슬로건 '잘사는 군민 새로운 칠곡'과 마찬가지로 잘살아 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지표가 1인당 GNP가 100∼200달러인 1960∼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다. 당시 오로지 국민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고, 획기적인 경제부흥을 위해 일심동체로 부른 노래가 바로 '잘살아 보세'다.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금수나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꿔 가며 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 부귀영화도 우리 것이다”라는 이 노래 가사처럼 재칠곡 영남중·고 동문은 물론 칠곡군민 모두가 잘사는 시대를 위해 다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대한양계협회 대구경북지회장을 맡은 바 있는 김점훈(현 칠곡군 산란연구회장) 회장은 "새해를 맞아 칠곡군에 연고를 둔 영남중·고 동문들이 지역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들을 찾아 실행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재칠곡 영남중·고 동문 14회 김수복(바르게살기운동 칠곡군협의회 회장)/ 14회 박만수(전 성화농장 대표)/ 15회 이수성(지천양봉연구회장)/ 17회 추재천(전 경북도교육위원)/ 17회 전덕수(가산궁전가든 대표)/ 18회 곽두현(전 순심고 교사)/ 19회 김점훈(매원농장 대표·현 회장)/ 20회구본대(금농화훼농장 대표)/ 21회 장문기(칠곡문화원 부원장)/ 21회 노재호(협진건설 대표)/ 21회 박연규(동명농협 조합장)/ 22회 김주태(순심여중·고 교장)/ 22회 정연대(전 칠곡군 기획감사실장)/ 24회 송재문(동명고교 교감)/ 24회 구본천(금농형제농원 대표)/ 25회 김영옥(석전중 교감)/ 29회 예병한(금강상사 대표)/ 30회 김태철(명가공인중개사)/ 31회 김윤중(경북도 공무원)/ 32회 곽종원(현 총무)/ 32회 이동권(창파e&i 대표·겸임교수)/ 33회 유무호(칠곡군 공무원)/ 35회 유성호(명가한우 대표)/ 35회 손호성(세강목욕탕· 헬스 대표)/ 38회 김성환(제주돈삼돈 대표)/ 42회 송원학(건설)/ 48회 김종민(순심고 교사)/
경상북도는 전국 18개 시·도가 참여하는 27회 전국소방기술경연대회에서 작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종합우승을 차지해 ‘최강 경북소방’의 확고한 위상을 떨쳤다. 이번 대회는 10월 6일, 7일 이틀간 중앙소방학교(충남 천안시)에서 열렸으며, 전국에서 선발된 최강 소방관과 의용소방대원 등 2,500여명이 참가해 소방기술과 체력경연을 통해 현장대응 능력을 향상시키고, 시‧도간 정보교류와 우호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27년 역사를 가진 소방 최고 대회이다.
올 추석은 9월8일이다. 1995년엔 한가위가 9월9일이었고 1976년에는 9월8일이기에 올해 추석은 사실상 38년 만에 맞는 이른 추석이다. 올해 추석 연휴는 7일부터 9일까지인데 7일이 일요일이어서 대체휴일이 하루 더 늘어 10일까지다. 올해 추석이 이같이 빠른 이유는 윤달이 추석인 9월8일 이후에 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음력 9월(양력 2014년 9월24일∼10월23일)이 끝나면 바로 다음날인 10월24일(음력 9월1일)부터 11월21일(음력 9월29일)까지가 윤9월이다. 1900년부터 2090년까지 윤달이 추석(음력 8월15일) 이후에 끼여 추석이 양력 9월8일∼10일로 빠른 해는 모두 10개다. 윤달이 8월인 해는 1900년, 1957년, 1976년, 1995년, 2052년, 2071년, 2090년이며, 9월인 해는 2014년이고, 10월은 1984년이다. 특이한 것은 1995년부터 8월 이후 윤달인 해는 19년 주기를 보이고 있다. 1995년, 2014년, 2033년, 2052년, 2071년, 2090년…. 윤달은 음력에서 생기는 오차를 보정하기 위한 달이다. 평달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달이며, 윤달이란 계절과 너무 어긋나게 되어 이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몇 년마다 한번씩 넣어준 한 달이라 보면 된다. 윤달이 있는 해에는 음력으로는 13개월이 된다. 윤달을 정하는 기준은 19년에 7개월의 윤달을 두는 19년7윤법(十九年七閏法)을 적용한다. 그래서 윤달은 2∼3년(정확히 2.71년)마다 한번씩 돌아온다. 그리고 윤달은 어떤 때에는 음력 2월이, 어떤 때에는 7월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일정한 달이 정해져 있지 않다. 시사상식사전에 따르면 달이 차고 기우는데 걸리는 시간(약 29.5일)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달력을 태음력(음력)이다. 즉, 그믐달에서 다음 그믐달로 돌아오는 기간을 1달로 정해서 음력은 1달이 29일과 30일을 번갈아 사용하며 음력에 따른 1년 12달의 날짜를 모두 합하면 354일이다. 따라서 365일을 기준으로 하는 양력과 11일 차이가 난다. 그래서 모자라는 11일을 세 번 모아 2∼3년에 한번씩 한 달을 한 번 더 넣어 날짜의 차이를 줄일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한 달 더 들어간 달이 윤달이다. 한편,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시간(약 365일)을 기준으로 하는 만든 달력을 '태양력(양력)'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의 황제인 시저는 1년이 365.25일이라 생각해 365일 하고도 남는 0.25일을 4년간 모아서 4년에 한번씩 1일을 더해 주었다. 이런 해가 바로 '윤년'이며 윤년의 2월은 29일이 존재한다. 우리 나라는 원래 중국에서 발전했던 음력을 사용해 왔는데, 1895년 음력 11월17일에 고종임금이 그날을 1896년 1월1일이라 공표하고 처음 양력을 사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윤달은 태음력(太陰曆)에서 일년 열두 달 외에 불어난 어느 한 달을 말하며, 태음력에서 날짜가 계절과 한 달의 차이가 생기는 것을 조절하기 위해 두 번 거듭되는 달. 윤달[閏月]은 가외로 더 있는 달이기 때문에 공달(空月), 덤달, 여벌달, 남은달이라고 부른다. 윤달을 썩은달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윤달이 사람의 피부, 신체 부분에 있는 달이기 때문이다. 속담에 "윤달에는 송장을 거꾸로 세워 놓아도 아무 탈이 없다"라고 할 만큼 윤달을 무탈한 달로 여긴다. 아무런 재앙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통속적으로 결혼하기에 좋고, 관(棺)을 준비하거나 수의(壽衣)를 만드는 것도 좋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윤달에 결혼이나 출생을 피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뚜렷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단지 어떤 해 윤달에 결혼하거나 아이가 태어나면 윤달 기념일과 생일은 해당 윤달이 있는 해만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윤달을 피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음력(윤달) 결혼기념일과 생일을 고집하지 말고 양력을 적용하면 해마다 같은 날을 기념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박을 쪼개지 않고 꼭지 부분을 따내거나 꼭지 옆에 주먹만 한 구멍을 내고 속을 파낸 다음 거기에 씨앗을 갈무리해 두는 그릇이 뒤웅박입니다. 뒤웅박의 사투리로는 두베,됨박,두벵주름박,뒝박,두뱅이주룸박,두룸박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경북 상주지방에서는 오짓물로 구운 것을 쓰며, 박이 나지 않는 데서는 짚으로 호리병처럼 엮어서 쓰기도 하지요. 또 함경도 지방에서는 뒤웅박에 구멍을 뚫고 속이 빈 작대기를 꿰어 씨를 뿌릴 때 썼습니다. 뒤웅박의 모양은 보통 바가지처럼 둥글지만, 호리병처럼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박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백과사전격인 책들이 나왔습니다. 먼저 이수광이 펴낸 《지봉유설(芝峰類說)》이 시작이고, 영조임금의 명으로 1770(영조 46)년에 나온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성호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따위가 그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조선 후기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유구(徐有, 1764 ~ 1845)가 홍만선의《산림경제》를 바탕으로 한국과 중국의 책 900여 종을 참고로 하고 시골 마을에서 보거나 수집한 문헌 자료를 정리해서 1827년(순조 27)에 엮어낸《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백과사전의 하나입니다.
“어떤 이가 공을 세우려고 숨검을 데리고 가서 순검들에게 면암 최익현 선생의 머리를 자르라고 하였다. 이에 순검들은 깜짝 놀라 ‘우리들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대감의 머리에 칼을 대겠는가?’라며 꾸짖었다. 숨검들이 크게 욕하고 가버리니 그의 흉계가 수포로 돌아갔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이름이 선비면서 처신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금수만도 못하다.’라고 했다.”
자연환경 속에서 자가치유 활동을 보장하는 칠곡군립노인요양병원이 지난 3월부터 한방과 120병상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가운데 어르신들이 자신의 텃밭(치료정원) 가꾸기를 통해 육체와 정신 건강유지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칠곡군 왜관읍 금남리에 들어선 군립노인요양병원은 ▶130병상 규모(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2천897㎡)와 최신 의료장비 구비 ▶임상경험이 풍부한 의료진 구성 ▶현대와 전통이 어우러진 편안한 병실 ▶자기치유를 돕는 쾌적한 자연환경 등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출마동기 張=저는 처음 출마할 때부터 일관되게 ‘세대교체와 지역통합’을 주장해왔습니다. 단순히 나이 젊은 사람으로의 세대교체가 아니라 지방행정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세대교체를 이루겠다는 것이며, 군민이 믿을 수 있는 행정, 지역사회의 편 가르기 없는 행정, 군민을 편안하게 하는 행정시스템을 확립하겠다는 것입니다.
배상도 군수측은 '출마동기' 등 자료를 공문으로 요청한 본사에 게재되기를 거절, 불가피하게 타 후보예상자처럼 보도하지 못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