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5월, 6.25 한국전쟁의 참혹한 시기에 부모님 덕에 세상과의 인연을 갖게 되었다. 전란 속에 이름도 없는 갓난인생이 휴전 후 1954년 5월에 송인태라는 법적 이름을 얻게 되었고 전후 학창시절도 순탄하지 못해 청주-대전-대덕-유성-서울에서 고학생활로 이어오다 군 입대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뜻밖에 행운의 카투사로 선택받게 된 것이다.
'2024년 경북청유 선비문화 칠곡포럼'이 지난 5월 11일 칠곡문화원 3층 강당에서 개최됐다. 이번 '慶北靑儒 선비포럼'은 경상북도청년유도회(회장 김홍희)가 주최하고, 칠곡군청년유도회(회장 이우석)가 주관했으며, 경상북도와 칠곡군, 인천채씨 투암공파종회(회장 채종률)가 공동후원했다. 우선 정우락 경북대 교수가 '공자의 예술정신과 문학사상'이란 주제로, 구본욱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투암 채몽연·백포 채무 부자의 생애와 학업, 현창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각각 발표를 했다. 구본욱 교수는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 선생은 조선 중기 대구에서 태어나 한강(寒岡) 정구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유학자다. 그의 아들 백포 채무는 서사원·한강 선생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문과에 합격해 병조좌랑을 역임했다"고 소개했다. 구본욱 교수는 "채몽연·채무(蔡楙) 부자는 많은 저술을 했으나 1640년, 1663년 두 차례 화재로 하남정사가 불에 타 그가 저술한 시문과 서적이 모두 잿더미로 변해 소수의 시문만 전하고 있다. 그의 문집은 19세기에 이르러 아들 백포 채무의 문집과 함께 편집되는데, 당시 사미헌(四未軒) 장복추(1815~1900) 선생이 편집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1702년(숙종 28) 지방유림의 공의로 채몽연·채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소암서원(嘯巖書院)이 창건돼 두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1847년(헌종 13) 장내범(張乃範)을 추가 배향해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 훼철, 소암서원은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로 이건돼 지금의 '소암서당(嘯巖書堂)'으로 유지되고 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사상사를 전공한 채억곤 역사학자는 '소암서원(嘯巖書院)이 품은 향기'라는 주제의 특별기고를 통해 낙동강 칠곡보 인근 산성(토성)이 관호산성이 아니라 '백포산성'이라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조명했다. 채억곤 사학자는 "백포 선생(1588~1670)의 성은 채(蔡)씨, 휘는 무(楙), 자는 자후(子後), 호는 귀은자(歸隱子)·백포(栢浦), 본관은 인천이다. 백포 선생은 서사원 정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612년(광해군 4) 향시인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됐으며, 그 후 성균관에 들어가 폭넓게 학문을 연마했다. 1633년에는 대과(大科)에도 급제해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로 기용됐다"고 백포 선생을 소개했다. 채억곤 사학자는 "백포 선생은 병조좌랑을 끝으로 관계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온 후, 칠곡군 약목면 관호리 낙동강변에 위치한 백포산(栢浦山)에 자주 올라 여러 학자들과 교유했다. 백포산 정상부에 위치한 백포산성의 경치가 사계절 무척 아름다워 이곳 고유의 지명인 '栢浦(백포)'를 선생의 호(號)로 삼았다. 그래서 선생의 본래 호인 '귀은자(歸隱子)'보다 ‘백포’로 더 많이 불리었고 이후 ‘백포 선생’으로 통하게 됐다"고 밝혔다. 백포산성 북동쪽 산기슭에는 능허대(凌虛臺)라는 넓고 평탄한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이곳에서 지역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시도 읊고 함께 술잔도 기울였다. 이곳이 바로 백포 선생이 노년에 낙동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며 인생을 즐긴 유식(遊息)의 장소였다. 채억곤 사학자는 자신의 저서 『칠곡의 역사』에서 낙동강 칠곡보 인근 '백포산성'의 유래와 명칭에 대해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백포산성에서 ‘백포’는 한자로 ‘栢浦’이다. 栢은 원래 ‘측백나무 백’ 자이고, 浦는 ‘개 포’ 자이다. 산성이 있는 이곳은 옛날부터 측백나무가 울창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측백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나무로 절벽이나 바위틈, 또는 척박하고 건조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생명력이 강한 나무다. 특히 상큼하게 나는 독특한 향과 상록수인 측백나무는 조선 시대 성리학자의 기절(氣節)과도 잘 부합돼 예부터 성리학자들이 귀하게 여기는 나무였다. 또한 이 산성의 남서쪽 밑에는 오목하게 들어간 개(간석지의 일종)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울창한 측백나무 숲이 어우러져 이 산성의 뒷산을 백포산(栢浦山)으로 지칭하게 됐고, 산성 밑 마을을 백포동(栢浦洞)으로 일컬어 왔다. 따라서 ‘백포’는 이미 지명으로 고유명사화한 지 오래이고, 줄곧 ‘백포산성’으로 불리어 왔다. 따라서 이 산성 이름을 역사가 짧은 ‘관호산성(觀湖山城)’ 보다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백포산성’으로 부르는 것이 더욱 친숙하고도 향토적인 이름으로 판단된다. 나아가 전통문화의 수호 차원에서도 부합한다. 백포산성은 삼국시대인 4세기경 성산가야의 연맹체인 변군미국에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성(城)의 축조는 보통 그 지역의 방어에 주목적을 두고 있는 만큼 이 성이 낙동강 서안(西岸)에 위치해 변군미국과 성산가야의 지역 방어와 합치되기 때문이다. 또 백포산성과 인접한 성주군 월항면과 기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봉화산 정상부에는 성산가야 시대에 축조된 봉화산성(烽火山城)이 있다. 이 성은 산 정상에 쌓은 토석성의 산성으로, 토성(土城)인 백포산성과 축성 방법에 있어서 유사성이 많다는 점이다. 이성숙 기자 9746002@hanmail.net
칠곡소방서(서장 이진우) 소방행정자문단(단장 김웅정)은 대규모 산불로 피해를 입고 있는 울진군의 현장 복구와 피해 주민의 지원을 위해 성금 300만 원을 기탁했다. 소방행정자문단은 평소 소방행정정책에 대한 자문과 지역 발전을 위해 화재취약계층에 주택용 소방시설을 기증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을 추진하는 단체이다. 김웅정 소방행정자문단장은 “갑작스러운 산불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실질적으로라도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라며 “피해 주민들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길 기원한다.”라고 전했다.
왜관지하도 인근에 있는 신흥슈퍼가 45년만에 문을 닫고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그런데 잎과 가지가 없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고사한 채 고목으로 왜 남겨 두었는지 궁금했다. 이곳 신흥슈퍼 앞으로 차를 몰고 지나면 서행하게 만드는 게 바로 이 나무다. 바로 이 가로수가 원심력에 따른 교통사고를 막아주는 '효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원심력은 원운동을 하는 물체나 입자에 작용하는, 원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힘이다. 구심력과 크기가 같고 방향은 반대인데 실재하는 힘은 아니고 관성력으로부터 변형된 형태의 힘이다. 교통전문가는 차량이 회전하는 경우 원심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감속을 하고 충분히 안전에 유의하면서 회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과거 신흥슈퍼에서 물건을 사면서 주인에게 "왜 저렇게 절단된 가로수를 통째로 뿌리째 뽑아버리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저 나무가 없으면 이곳을 지나는 차량이 속도를 줄이지 않아 자칫 차량이 가게 쪽을 덮칠 경우 가게와 우리는 어떻게 되겠느냐"며 반문했다. 윗부분과 가지를 잘라 낸 채 그대로 둔 이유를 알았다. 그는 좌회전하는 차량이 종종 이 고목과 부딪치기로 한다고 전했다. 가게와 주인의 안전을 지켜주는 '보호수' 역할을 해와 앞으로도 죽은 이 고목을 그대로 두겠다고 밝혔다. 플라타너스는 번식력이 왕성하다. 이 나무 수관(樹冠)과 곁가지를 잘라냈는데도 불구하고 푸른 잎이 계속 나와 그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4년전부터 남은 둥치와 가지가 완전히 죽어 잎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이곳을 지나다니는 일부 운전자들은 주의를 기울여 서행하기 싫어 경부선 철도 쪽 길로 직진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뒷길로 다니기 싫어하는 운전자는 굳이 신흥슈퍼 앞으로 어렵게 좌회전해 군청 쪽으로 차를 몰고 간다. 왜관에서 유일한 왜관지하도는 1987년 생겼다. 신흥슈퍼는 이보다 12년 전인 1975년 문을 열었다고 한다. 신흥슈퍼 노호렬(79) 대표는 45년간 슈퍼를 하면서 1남3녀를 훌륭하게 키웠다. 이들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교사, 공무원,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막내 아들이 신흥슈퍼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태어나 45세로 가게 역사와 같이한다고 했다. 45년전 신흥슈퍼 앞 가로수는 굵기가 팔뚝 정도였는데 어느새 저렇게 고목이 된 것이다. 당시 동네 구멍가게 시절 슈퍼마켓은 생필품 등 다양한 용품을 갖춰 할인까지 해주는 큰 소매점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인근 대형마트 입점으로 동네 슈퍼는 골목상권의 구멍가게가 된 가운데 손님의 발길도 뜸해진 사이 노 대표는 팔순이 가까이 왔다. 신흥슈퍼를 철거하고 새로 들어설 커피점에서 차를 마실 손님은 저 고목이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수'인지 알겠는가?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2절 가사가 생각난다.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잊지 않으리/내가 사랑한 얘기/여위어 가는 가로수 그늘 밑/그 향기 더하는데/아름다운 세상 너는 알았지/내가 사랑한 모습/저 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그 향기 더 하는데/내가 사랑한 그대는 아나" 이성원 편집국장 newsir@naver.com
1905년 오늘(11월 20일), 언론인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의 논설을 올렸습니다. 이 논설은 피를 토하듯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부당함을 전 국민에게 알리고, 일본의 흉계에 의한 조약 체결에 찬성을 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당시의 대신(大臣)들을 크게 꾸짖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을사늑약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1905년 11월 17일 대신(大臣)들을 압박, 강제로 체결한 조약입니다. 이때 을사늑약에 앞장선 을사오적에는 외부대신 박제순, 내무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부대신 권중현입니다. 그런데 을사늑약은 고종황제가 참석하지 않은 채 열린 것은 물론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재가(裁可)를 받지 않은 원인 무효의 조약이었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 조약을 을사조약이 아니라 억지로 맺었다는 뜻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부릅니다.
◆기산면 죽전리 출토 유물로는 북삼읍 율리에서 출토된 간석기와 민무늬 토기 편을 비롯하여 지천면 창평리 일대에서 수습된 민무늬 토기 편과 홈자귀 등 다양하다. 윤용진(尹容鎭)은 석적읍 중리에서 민무늬 토기 편 여러 점의 발굴을 보고한 바 있고, 1988년 채억곤(蔡億坤)은 기산면 죽전리 일대에서 여러 종류의 화살촉, 예리하게 다듬어진 돌도끼, 석검(石劍) 파편, 돌창, 여러 개의 그물추, 그리고 청동 방울 등을 수습하였다. 이러한 석기 제작의 다양한 기술은 청동기 시대의 발전상을 보여 주며, 일부의 화살촉에는 슴베(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뾰족한 부분)도 보여 오랜 세월 동안 청동기 문화가 변화·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석적읍 중리와 기산면 죽전리는 모두 낙동강과 가까운 지역의 구릉 지대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환경에 비교적 잘 부합하는 곳이다.
◆칠곡의 신석기 시대 유물 우리 고장에서는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와 움집의 주거지 등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신석기 후기로 추정되는 간석기 몇 점이 수습되었다. 1985년 채억곤(蔡億坤)은 낙동강에서 가까운 기산면 죽전리에서 돌괭이 2점과 돌도끼 1점을 수습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농경 생활에 이용된 간석기들이다. 기산면 죽전리 일대는 신석기 인들이 사냥과 물고기 잡이, 그리고 농경 생활을 하는데 비교적 적합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의 칠곡에는 낙동강 주변 지역에 주로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이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따라서 칠곡의 낙동강 주변 구릉 지대에는 앞으로 신석기 시대의 각종 유물의 출토와 유적이 발굴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1950년 6·25전쟁 한 달만에 인민군 최정예 주력부대는 주요 병참선인 경부선을 따라 추풍령을 넘어 8월 초 낙동강 경계 군사적 최고의 요충지인 왜관을 향해 질풍노도처럼 진격해 왔다. 또 한편의 주력부대는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를 넘어 상주를 공략했고, 이화령을 넘어온 적군은 영남 좌로인 안동을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문학과 문화는 역사성을 시발점으로 기준의 잣대를 댄다. 문학하는 사람들의 일성호(一聲號)는 [몇 년도에 등단했느냐?]부터 시작하여 점차 [문학적인 감수성과 비유적인 예술성]이란 전문성의 깊이로 화제의 선상에 올려 대좌한다. ‘등단 연도’는 문학의 경험과 수업 연한을 뜻하고, ‘감수성과 예술성’은 문학표현 기교의 됨됨이에 그 초점을 맞춘다. 어느 부족이나 민족 문화의 동질성은 역사성에 뿌리를 두며, 그 맥이 튼튼하지 못하면 일시에 주저앉거나 주변문화에 동화되어 버리기 일쑤다. 인류 문화 변천사는 모두 그랬다.
낙동강 방어선을 성공하지 못하면 맥아더가 구상했던 인천상륙작전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낙동강 방어선이 허물어지면 인천상륙작전을 해봐야 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지 못한단 말이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남정옥 박사는 '아버지의 55일'에서 이렇게 밝혔다. '인천상륙작전 박스오피스 1위, 400만 관람객 돌파' 6·25전쟁 정전협정일인 지난 7월 27일 개봉한 '인천상륙작전' 영화의 열기가 대한민국의 여름을 달구고 있다. 영화 도입부에는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해준 '낙동강방어선전투'가 10초 남짓 스쳐 지나간다. @IMG2@우리 국민들은 낙동강방어선전투를 얼마나 기억하고, 알고 있을까? 아니 그보다 6·25 전쟁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칠곡군은 최근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을 방문한 중·고등학생 250명을 대상으로 6·25전쟁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6·25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알고 있냐는 질문에 관람 전 49%만이 1950년이라 답했다. 이들에게 6·25 전쟁 중 수많은 전투 중의 하나인 낙동강방어선전투를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 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한다면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6·25전쟁 낙동강방어선의 유명한 칠곡군 다부동전투에서 백선엽 1사단장이 돌격 직전 부하들에게 던진 명언이다. 북한군은 병력 2만1,500명에 전차 수십대를 앞세워 전진했으나 국군 1사단의 7600명 병력이 이들을 8월까지 지연시켜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은 권총을 들고 장병들의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는데, 이렇게 사단장이 직접 돌격하는 것은 '사단장 돌격'이라고 불리며, 국내외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경우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낙동강방어선(워커라인)은 남쪽의 경남 마산~경북 왜관~경북 낙정~영덕을 잇는 최후의 저지선이다. 낙동강방어선을 지키지 못하면 한국정부는 제주도로 이전, 해외에 망명정부를 수립해야 될 절박핝 상황이었다. 당시 맥아더 원수가 구상한 인천상륙작전도 낙동강방어선이 유지될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었다. 따라서 낙동강방어전투는 가장 위기의 순간에서 유엔군이 한국군과 함께 방어함으로써 방어에서 공격으로, 후퇴에서 반격으로 대전환을 이루게 한 자유민주주의의 대반격이었다. 제2차대전 시 난공불락이라고 호언하던 프랑스의 마지노선(Maginot Line)이나 제4차 중동전쟁시 이스라엘의 바레브선 (Bar-Lev Line) 은 무너졌지만, 우리 ‘낙동강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더군다 프랑스의 마지노선과 이스라엘의 바레브선은 강철과 철근 콘크리트 등 방대한 예산과 일정 시간을 투자해 형성하였던 것에 비해 6·25전쟁 지연작전 시 실시간으로 긴박한 전투상황에서 급조된 낙동강 방어선이 어떻게 55일 동안이나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학교를 가야할 학생들, 밭에 가야할 농부들, 자기나라를 지켜할 외국인들이 5%로 밖에 남지 않은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던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세(守勢)에 몰린 전세를 공세(攻勢)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도, 적에게 뺏긴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모두 칠곡을 데드라인(deadline)으로 귀중한 목숨을 던진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관을 꼭짓점으로 한 낙동강방어선이 오늘날 칠곡을 '호국평화의 도시'로 우뚝 서게 만든 역사적 라인이 된 것은 이렇게 처절한 희생 덕분이다. 전쟁은 아픔인 동시에 시대를 초월해 모두가 함께 되새겨야 할 교훈이 많다. 특히, 전쟁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를 증언할 수 있는 참전용사, 한 분 두 분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고,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안보교육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바로 알고 이를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낙동강 세계평화문화대축전'의 과제이다. 2013년을 시작으로 올해 4회를 맞는 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은 경북도(도지사 김관용)와 칠곡군(군수 백선기)이 공동주최하고, 낙동강세계평화문화대축전추진위원회(위원장 장인희)가 주관하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다. 전쟁세대와 전후세대가 한자리에 모여 참혹했던 전쟁의 역사를 되새기고, 자유와 평화를 기치로 내세운 우리 모두가 하나로 소통하는 국내 유일의 호국·평화문화 교류의 장이다. 이같은 역사적 현장을 지키고 기억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유 대한민국을 구한 낙동강방어선전투의 위대한 업적이 인천상륙작전천 만큼 중요하다는 국민적 공감과 인식이 부족하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칠곡군은 국비를 포함, 많은 예산을 들여 해마다 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을 개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4회 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이 열리는 칠곡보 생태공원을 찾을 많은 관람객들 특히,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전후 세대 부모들과 그의 자녀들에게 대한민국 국토의 5% 밖에 남지 않은 절체절명의 순간 낙동강방어선이 만들어진 배경과 55일간의 생생한 전투체험으로 대축전의 의미를 극대화 할 수 있도록 했다. 국토의 50%, 40% … 5% 까지 남게 되는 과정 속으로 직접 들어가 느낄 수 있는 입구아치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마지막 5% 속에서 체험하는 돔 아레나 극장 ▶66년 전 피난민 촌·피난학교·학도병 체험·고지체험·전투의 마지막 밤인 9월 23일을 체험하는 돔 체험장으로 구성된 낙동강방어선 리얼테마파크 ▶관람객이 직접 동생(국군), 형(북한군)이 되어 참여하는 태극기 휘날리며 ▶2016 칠곡평화의 광장 ▶칠곡 인문학체험관 ▶칠곡어름사니 체험관 ▶에티오피아 칠곡 평화마을 조성사업을 이어가는 평화의 동전 밭까지 1950년 과거부터 2016년 현재, 미래까지 이어지는 스토리텔링 체험전시 등으로 전쟁의 폐해를 기억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각인하는 대축전으로 더욱 내실있게 준비하고 있다. 또한 올해는 피로 물들인 절박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낙동강방어선전투의 소중한 가치를 널리 알리는 대국민 캠페인의 일환으로 온라인, 스팟광고, 오프라인까지 입체적 홍보를 펼쳐 낙동강방어선전투,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군의 도시브랜드뿐 아니라 세계적 '다크투어(역사교훈여행)의 성지' 칠곡군의 명성을 드높일 계획이다. 이번 대축전의 프로그램 중 글로벌 호국평화의 도시에 걸맞는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9,000Km 떨어진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이 칠곡군을 방문하는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참전국 중 가장 가난한 나라로 옛 참전국에 대한 결초보은의 마음으로 뜻있는 칠곡군민 660명이 매달 후원금을 전달하고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의 숫자가 급속하게 줄고 있다. 몇 년 동안 자살률이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요즘에는 가족이 함께 자살하였다는 가슴 아픈 뉴스를 드물지 않게 접하게 된다. 전철을 타고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모두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머리를 그곳에 묻고 있다. 얼굴을 마주할 때 서로 미소를 짓는 경우는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예쁜 어린아이를 귀엽다고 쓰다듬을 수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서로를 믿지 못해 이웃 없는 세상이 되어 간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짜증이 나고 신경이 예민하게 되어 화가 나기 직전의 상태다.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88∼1715)는 시·서·화에 두루 능했고, 유학에도 밝았습니다. 공재는 “옛 그림을 배우려면 공재로부터 시작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림에 뛰어났는데 대표적 작품으로는 현재 그의 종손가 녹우당 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240호 “공재 자화상”이 있습니다. 그밖에 공재의 그림을 보면 나물캐기, 짚신삼기, 목기깎기, 돌깨기 같은 풍속화를 많이 그렸는데 어려운 삶을 사는 백성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림들입니다. 그런데 공재의 그림 가운데 또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은 보물 제481-3호 해남윤씨가전고화첩 중 <동국여지도(東國與地圖)>이지요. 이 지도는 공재가 숙종 36년(1710)에 그린 조선의 지도로 종이 위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인데 크기는 가로 72.5㎝, 세로 112㎝입니다. 강줄기와 산맥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섬들도 자세히 그렸으며 섬과 육지의 연결수로까지 표시하였지요. 이 동국여지도는 우리가 익히 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51년 정도 앞서 그린 것입니다. 또 공재는 <중국여지도>, <일본여도>도 그렸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동국여지도’와 ‘일본여도’만이 남아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본여도>는 임진왜란의 치욕을 되갚고자 숙종이 공재에게 명하여 그린 지도입니다. 특히 이 지도를 그릴 때 일본에 48명의 첩자를 보내 그 정보를 토대로 지도를 그렸다고 하는데 일본의 땅 모양과 거리는 물론 각 지방 장군들의 성까지도 상세히 파악해 표시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상세한 지도까지 그린 공재의 필력이 대단함에도 김정호에 가려 151년이나 앞선 동국여지도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도심 속에 있는 역사의 산 현장이라 일반인들도 쉽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집이 서대문인데다가 마침 며칠 전에 일본에 사는 딸아이의 고모가 귀국하여 함께 이곳을 산책 겸 다녀왔습니다. 딸아이의 고모는 남편의 누나로 일본인과 결혼하여 지금 사이타마에 살고 있습니다만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 짧은 일정으로 고국을 찾을 때마다 박물관이나 역사자료관 같은 곳을 가곤 합니다. 일본사람인 아이 고모부는 회사원으로 이번에 한국 출장길에 주말을 이용하여 고등학생인 아들 두 명과 함께 방한 중이라 초등학생인 우리 애들과 부부가 합쳐 대부대가 역사관에 간 것이지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그전에도 두어 번 간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지난 4월 1일날 여감옥사를 개관했기에 꼭 보여주고 싶어 데리고 갔습니다.
일본이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Dokdo) 사이에 국제법적으로 불법적인 국경선을 임의로 획정하고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불법적으로 표기한 왜곡 교과서를 검정 승인하고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대한국 영토 주권을 침해하는 외교청서, 방위백서를 발간하였다.
일제는 1910년 8월 대한국(大韓國) 영토를 불법 병합하고 1929년 대한해(Sea Of Korea)를 일본해로 바꿨으므로 국제수로기구(IHO)는 '바다와 해양의 경계' 4판에 대한해(大韓海) Sea Of Korea 표기를 환원해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대한국(大韓國)의 주권과 한반도와 제주도,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 등 영토를 되찾았으며 1946년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제주도,울릉도,독도(獨島)를 일본에서 분리되는 땅으로 명시한 지령(SCAPIN) 677호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경운궁(慶運宮)은 임진왜란 후 선조가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사저를 국왕의 시어소(時御所)로 쓰면서 궁(宮)이 되었고, 1608년 선조가 승하한 후 광조(光祖)가 이 궁에서 즉위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宮號)를 붙여주었으나 일제 통감부가 격하시켰으므로 경운궁(慶運宮) 궁호(宮號)를 환원, 재지정해야 한다.
종자전쟁의 역사는 표면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농촌 진흥청 산하단체인 농업과학기술원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경제 개발이 본격화된 1985년부터 1993년까지 8년 동안에 토종작물의 74%가 집중적으로 멸종된 기간이었음이 드러났다.
1950∼60년대, 긴 보릿고개로 허기진 농촌시절은 연탄에 의한 식생활과 난방문화는 도시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평화롭게 걸으세요. 행복하게 걸으세요. 우리가 내딛는 걸음은 평화로운 걸음입니다. 우리가 내딛는 걸음은 행복한 걸음입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평화로운 걷기라는 것은 없고 평화 자체가 걷기라는 것을 알게 되고, 행복한 걷기라는 것은 없고 행복 자체가 걷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틱낫한 걷기 명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