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근자에 한 달가량 해외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여행 가서 만난 사람 중 교사 다섯 분이 있었다. 은퇴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거나, 조기 은퇴를 작정하여 교직을 떠나기 직전인, 30년 이상의 교직 경력을 가진 분들이었다. 모두들 워낙 명랑, 쾌활하여 마치 소녀 다섯이 수학여행을 온 것 같았다. 재기발랄한, 순발력 있게 튀어나오는 우스개와 까르르하는 웃음소리가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다. 해외여행에서 소녀 선생님들을 만났는데 이분들과 가까워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 이야기는 또 자연스럽게 교육으로 이어졌다. 이 다섯 ‘소녀’ 선생님들이 이구동성 하는 말씀인즉, 너무 힘들(었)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제까지 교육 현장에 계시는 선생님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특히 여교사의 말을 학생들이 털끝만큼도 존중하지 않고, 혹 매라도 들려고 하면 경찰서에 전화하는 것이 다반사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일순 진지해졌고, 그 진지함 이면에는 ‘어쩔 수가 없다’는 깊은 체념이 배어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물론 아니다. 가까이 지내는 교수님의 부인은 오랫동안 중고등학교에 근무하다가 정년을 10년을 남겨 놓고 천직으로 알던 교직을 그만두었다. 속내를 뚜렷이 밝히지 않았지만, 학생들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이라고 모두들 알고 있다. 그만두고 싶지만, 개인적 사정으로 미루고 있는 분도 주위에 있다. 졸업하여 교직에 있는 제자들이 이따금 찾아와 털어놓는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육관료에게 치어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라는 말, 수능에 나오지 않은 과목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등의 말이다. 이런 이유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채 그냥저냥 출퇴근을 반복할 뿐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듣기가 심히 괴롭다. 다섯 ‘소녀’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난 학창시절을 반추해 보았다. 정말 과거에는 학생들이 교사에게 싹싹하게 복종했던가. 결코 아니었다. 복종하는 척했을 뿐이었다. ‘질풍노도기’의 발랄함 혹은 철없음, 순진함, 가능성, 반항심 등은 모두 너무나도 만연한 폭력 앞에서 침묵했을 뿐이었다. 학교(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국가)는 폭력이란 간편한 수단으로 아이들을 순치해 왔던 것이다. 폭력이 금지되자 학생들은 이제 통제에서 풀려나 학교와 교사를 조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폭력을 결코 행사하지 않았던, 결코 할 생각도 없었던 선량한 선생님들도, 당혹스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학교 교육이 대학입시만을 목적으로 삼는 현실에선 폭력이 배제된 학교는 좋은 학교이고, 좋은 교육이다. 하지만 현실이 과연 그럴까? 폭력이 없어져도 문제는 여전하다. 지금 한국의 학교와 교육을 ‘학교’와 ‘교육’으로 부를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는 출신대학이 한 개인의 카스트를 결정하는 사회다. 따라서 학교와 교육은 오직 대학의 입시만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미 교육과 학교의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대교육은 이미 파산한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와 교사를 조롱하는 근본적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산은 짧은 에세이 「원교(原敎)」에서 ‘가르친다는 행위’의 근본적 내용을 따진다. 다산이 말하는 가르침의 내용은, ‘부모와 형제에 대한 사랑’에 근본을 둔 ‘효(孝)’와 ‘제(悌)’와 그로부터 연역된 인간 간의 윤리적 덕목을 벗어나지 않는다. 다산이 제시한 윤리적 덕목에는 물론 동의하지 못할 것도 당연히 있을 터이다. 하지만 ‘윤리적 인간’이 되는 것을 교육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았던 데는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지금 학교와 교육은 어떤가? ‘윤리적 인간’이란 목적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교육으로 어떤 사람을 키워낼 것인가? 거기에는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있다. 지금 우리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인간상, 바람직한 사회상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의 교육은, 학교는 여기에 대한 어떤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다섯 ‘소녀’ 선생님들의 말을 듣고 황량한 사하라 사막의 모래벌판에 서서 혼자 답답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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