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넘긴 왜관지역 한 식자재마트에 가면 꼬리표가 달린 식료품(먹거리) 등이 가득 실려 있는 여러 개의 카트를 볼 수 있다. 이 식자재마트 직원이 날이 밝으면 식당 업주 등이 주문해 찾아갈 물품을 미리 카트에 담아 놓은 것이다.
이 식자재마트는 고객 주문 상품 담아 놓기와 배달 서비스로 고객 확보에 나서 전통시장(재래시장), 골목상가와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전통시장과 골목상가는 이러한 대형마트와 쿠팡을 비롯한 온라인 쇼핑에 밀려 상권이 위축된다며 불만이다. 일각에서는 자생력 있는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형마트와 차별화한 체험형 프로그램 등으로 옛것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보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전통시장을 살리려고 매년 수천억원의 예산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정부 지원책이 전통시장 현대화에 치중한 결과 역효과를 가져왔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전통시장만의 특색을 살려 온라인 및 대형마트 제품과 차별화되고 옛것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서비스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내년 예산안에 지역상품권 국비 지원은 한 푼도 반영하지 않은 반면 온누리상품권 발행 규모는 5조5000억원으로 올해 5조원보다 10% 늘렸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2020년 보고서에 따르면 온누리상품권의 효과가 지역상품권보다 더 나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역상품권의 경우 지자체가 발행한 특정 지역에서만 쓸 수 있어 지역 내 소상공인 매출이 증가한 만큼 인근 지역은 매출이 감소해 전국적으로 보면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가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온누리상품권은 전국 어디서나 쓸 수 있어 이러한 문제가 없다는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입장을 정부가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지역사랑상품권에 대한 정부의 행정·재정 지원을 의무화하는 ‘지역화폐법’(지역사랑상품권 이용 활성화 법)’이 지난 1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역화폐법은 더불어민주당이 당론으로 추진한 법으로, 정부가 지방자치단체에 지역사랑상품권의 발행·판매·환전 등 운영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골자로 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지역화폐법에 대해 “사실상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을 상설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상품권을 많이 발행할 수 있는 부자 지자체는 지원해 주고 가난한 지자체는 지원하지 않는 지역 차별 상품권법”이라고 비판했다.
지역사랑상품권이든 온누리상품권이든 침체된 골목상권과 어려워하는 지역 소상공인들을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칠곡군은 `골목형 상점가 지정에 관한 조례안`을 칠곡군의회 제303회 임시회에 제출해 지난 7월 25일 원안가결 됐다. 이를 통해 골목형 상점가 내 시설현대화 사업 등이 활발히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칠곡군은 골목형 상점가로 지정되면 ▶골목형상점가 내 시설현대화사업 ▶골목형상점가 내 경영현대화사업 등을 지원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골목상권이 활성화되려면 인근 주차장 조성 등으로 고객들의 접근이 쉬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SSM(기업형 슈퍼마켓)과 대형마트는 제품이 청결하게 포장돼 있고, 종류도 다양하며 인근에 주차장을 갖춰 전통시장보다 접근성도 좋다. 따라서 전통시장이 대형마트와 쇼핑몰에 익숙한 젊은 고객 등을 유치하려면 전통시장과 연계한 관광명소를 만들어 볼거리와 체험거리로 차별화를 도모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형마트에는 없는 농특산물을 깎아 주는 등 전통시장에서만 누리는 장보기 맛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요"라며 손님이 값을 깎아 달라고 하면 주인은 한두 개 더 주는 시장 특유의 장보기가 고객의 향수를 자극할 수 있다.
청결도 중요하다. 김종하 전통시장 전문 리포터는 "시장에선 맛 좋고 양만 많이 주면 된다는 시대는 지나갔다. 어르신은 몰라도 젊은이들은 지저분하면 안 온다. ‘시장은 원래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종하 리포터는 "대박집들의 비결은 가족에게 먹일 음식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한결같이 최고의 음식을 청결하게 만들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시장에서 바가지 상술은 `가족의 등을 치는 것`이다. 이윤을 늘리려 재료를 싼 걸 쓰면 맛부터 차이가 난다. 돈 버는 것이 목적이면 시장에서는 망한다. 시장이 대형마트에 비해 가지는 거의 유일한 장점은 상인과 손님이 가족 같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주로 연령대가 높은 분들은 전통시장을, 쇼핑의 편리함이나 청결함 등을 원하는 사람은 대형마트를 찾을 것이다. 전통시장은 불편하다는 인식이 강한 만큼 이러한 인식을 뒤집지 못하면 명절 장보기 문화도 대형마트 중심으로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마트에 이어 온라인 쇼핑이 본격화된 2014년부터 전국적으로 전통시장이 줄어들어 2014년 1536곳에서 8년 새 148곳이나 사라졌다. 코로나19에 따른 비대면의 사회적 풍조 탓인지 쿠팡을 포함한 온라인 쇼핑이 전통시장은 물론 대형마트까지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차별된 콘텐츠가 없는 전통시장은 살아남기가 힘들다. 전문가들은 전통시장이 대형마트나 온라인 상거래와 경쟁하기 위해 현대화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옛것의 특색을 살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전통시장은 온라인 쇼핑과 차별화를 하지 않고서는 온라인 쇼핑에 익숙한 젊은층 공략이 어려운 실정이다.
전통시장을 찾는 젊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복고풍을 새롭게 즐기는 경향인 `뉴트로(newtro)` 열풍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호주 ‘퀸 빅토리아 시장’은 1878년 개장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재래식 매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칠곡군 출생으로 『전통시장 활성화』를 출판한 장흥섭 경북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전통시장들도 저마다의 정체성을 갖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공생하면서 볼거리가 많은 커뮤니티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재욱 칠곡군수는 “이제 전통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을 넘어 지역만의 고유한 특색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삶의 터전"이라며 “앞으로 왜관시장을 칠곡군의 대표 로컬 명소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