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5월, 6.25 한국전쟁의 참혹한 시기에 부모님 덕에 세상과의 인연을 갖게 되었다. 전란 속에 이름도 없는 갓난인생이 휴전 후 1954년 5월에 송인태라는 법적 이름을 얻게 되었고 전후 학창시절도 순탄하지 못해 청주-대전-대덕-유성-서울에서 고학생활로 이어오다 군 입대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뜻밖에 행운의 카투사로 선택받게 된 것이다. 1975년 6월에 이국적인 분위기속에서 생소한 카투사의 선별교육을 마치고 운명의 캠프캐롤(경북 왜관)에 자대 보직 명을 받았다. 당시 이곳도 낯선 지역 이였으나 두 동강난 낙동강 다리(호국의 다리)와 융단폭격의 한국전쟁의 역사를 실감으로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됐다. 카투사 교육대에서 앞서 경험했던 미군부대는 나에게는 별천지 같은 세상으로 힘든 얼차려군기에 군수물품관리 일을 하면서도 행복했다. 일등병 때 모범사병선발에서 경쟁자들과의 선발과정을 통해 모범사병이 되었고 상병특진으로 사령부 게시판에 사진이 걸리면서 뜻밖에 사령부 공보실(PIO/PAO)보직 명을 받게 되었다. 사령부의 대내외적인 공보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나는 미군들에게 인정받는 톱 인기 카투사 됐다. 그러나 어느 날 파견대장이였던 김모 대위는 인사계(강모상사)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 하며 영문도 모른 채 질투의 군홧발 폭행을 가해 몇 주 동안 미군병원도 갈 수 없는 말 못할 군기를 잡혀야했다. 한국군 보충대로 보직 명을 걱정하며 한동안 참기 힘든 인내로 복무수행을 위해 내색 없이 최선을 다했다. 시간은 묵묵히 지나갔다. 당시에도 꽃보직 통했던 사연 많은 나의 카투사 군대생활이 훗날 부여될 삶의 운명은 무엇 이였을까 세월을 샘하며 지금에 와서 회상해보니 경북 칠곡군 왜관에서 나의 병역의무 33개월 삶이 아마도 303고지의 20년 동안 긴 인연과 소명으로 이어온 운명이 아니었나하는 명상의 답을 미소로 회고하게 된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북한군의 기습 도끼만행사건으로 미군들과 함께 준 전쟁상태의 작전과 선진화된 미군들의 희생적인 준비태세와 투철한 군인정신을 공보업무의 체험을 통해 경험하게 되었고 특히 칠곡군 유학산 정상 인근에서 일어난 미군헬기 추락사고(1977년 7월 10일) 현장에 나만의 공보실업무인 사고현장사진취재 중 미군들의 비통한 침묵과 헌신적인 사고대책비상작전을 보고 내나라 지형에 익숙한 카투사가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현장사고수습에 스스로 자원하였고 인명구조훈련도 없이 현장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저와 미군 단둘이 폭발위험을 감수하며 신중하면서도 시간감각이 없는 생존자 구조와 시신수습임무에 나섰다. 사고현장은 상상을 초월했다. 추락하며 휩쓸고 간 헬기는 산중턱까지 산림을 마구잡이로 벌목을 한 것처럼 보였다. 인명은 재천인지 이 참담한 상황에서 생사의 운명도 달리했다. 나는 잔해 헬기 안에서 마지막 시신수습 중 조각난 헬기파편에 손목부상을 입었으나 당시는 느낌조차 몰랐던 긴장된 시각이었다. 사고현장에서 산악아래 대기병력 진지까지 약 100여 미터, 졸지에 이국땅에서 생을 마친 미군의 부릅뜬 눈이 너무 미안해 임무완수로 시신을 정중히 모시고 하산하면서 나의 군복이 피로 얼룩져있었지만 나의 부상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이었다. 내가 태어나기전인 1950년 8월 17일, 303고지에서 아군으로 오인해 포로라는 이름으로 학살당한 미군41명의 그 억울한 죽음이 우방의 작전 수행 중 헬기추락사고로 희생한 그 때 모습들이 지금도 가끔은 오버랩 되기도 한다. 내가 제대하면서 앞으로 해야 될 임무가 부여되었는지 미8군 대장 베시 사령관님의 미육군성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왜관에서 송병장 때 평생 반려자도 만났다. 제대 후 기자의 꿈을 접고 내가 모시던 캠프캐롤 사령관님의 추천과 군 생활에서 신임을 주셨던 군무원의 도움으로 취업하게 되었고 미군과 그 가족들을 위한 공예실 지도교관으로 업무를 시작한 후 1996년 미6병기대대 84병기중대 탄약관리 지원부서로 자리를 옮기면서 2003년부터 대대의 또 다른 주한미군의 「좋은 이웃 프로그램」 대민담당 민사업무가 시작되었다. 미6병기대대 켈러대대장( LTC Keller)과 「좋은 이웃 프로그램」 준비에 관한 논의가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 303고지 미군들의 참상을 지역민과 함께 재조명하자는 결론을 얻어 주한미군 6병기대대와 더불어 기여할 수 있는 운명적인 사명이 중대소속인 나에게 기획과 추진업무가 맡겨졌다. 호국의 고장 칠곡군 303고지에서 주한미군의 큰 혈맹역사가 우연이 아닌 또 다른 필연으로 이어진 것이라 생각하며 앞으로의 책무를 기꺼이 수락하게 됐다. 우방영웅들이 학살되었던 8월 17일에 첫 추모행사를 위해 303고지 정상에서 나의 사전답사와 미군들의 현장정화작업(오마이뉴스 보도)을 시작으로 바로 2003년부터 캠프캐롤 미6병기대대와 칠곡군 재향군인회(한석문 회장)는 공동주관으로 의미있고 성공적인 첫 추모행사를 시작했다.(오마이뉴스 보도) 행사 2주년부터 섭외를 통해 6.25참전군인회칠곡군지회(회장 이현시)가 동참하였고 303고지정상과 왜관 석전중학교에서 거행되었던 1, 2부 추모행사 17주년을 거치면서 추모표석에서 추모비로, 2020년에 6.25남침 70주년에 맞추어 전망대도 세워져 호국의 명소로 크게 부각됐다. 2017년부터는 새로 조성된 학살현장인 한미우정의 공원에서 산화하신 41명의 우방영웅들을 위한 희생자 가족들이 초청된 가운데 한미 지휘관들은 물론 참전군인과 관계기관 내빈들이 참석한 역사적인 제막식(2017년 9월 22일)이 거행되면서 2020년 18주년부터 칠곡군과 미6병기대대의 주관으로 이곳에서 차별화된 303고지 추모행사는 계속 이어오고 있다. 303고지 미군포로 학살범죄 사건은 지난 1990년, 캠프캐롤 사령부소속 미 육군 2명(MSG Charles Fred 상사, SSG David King 하사)과 대민담당 박종구님에 의해 미 육군의 기록에서 그 전모를 찾아냈다. 당시 40년 만에 알려진 전쟁의 참상과 억울하게 희생된 미군들을 추모하기 위해 미군과 소속 한미직원 들이 공동모금으로 추모비가 캠프캐롤 사령부 앞에 세워졌고 1999년 생존자 라이언 일병이 66세 나이로 학살현장을 찾았다. 라이언 일병은 구사일생 참혹상은 생생히 기억하면서도 그 사건현장은 세월속의 지형변화로 기억이 분명하지 않아 주민과 지역참전군인의 참고증언으로 학살현장이 입증되어 지난 2005년 6.25참전군인회 칠곡군지회의 후원으로 칠곡군수와 캠프캐롤 사령관의 직함이 새겨진 추모비가 바로 이곳 303 학살현장에 세워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학살현장은 고귀한 우방전우들의 영혼들에게 내 스스로 죄인 같은 참으로 죄송하고 부끄러운 현장모습 이었다. 前 칠곡군의회 의장 장영백 회장님의 추천으로 14-15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칠곡군협의회 자문위원이 되면서 부여된 나의 소명의 플랜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학생들의 통일안보체험활동기획을 추진하게 되면서다. 나는 자료수집을 위해 호국의 고장에 부합되는 현장답사를 하게 되었고 내가 간 아곡리 303고지 미군학살현장 추모비 앞엔 누적되고 방치된 쓰레기와 잡초는 목불인견이었다. 책임이 나에게도 있음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쓰레기 긴급정리를 행정관청에 요청하고 평통자문위원들의 협조로 미군들과 자원학생들이 함께 2011년 9윌 10일(토) 주변 잡초 정화봉사를 시작했다. 휴무일을 반납하고 자원봉사에 함께 참여한 미84병기중대 중대장인 테일러 대위(CPT Taylor)는 추모비 주변 잡초를 정리한 후 숙연한 표정으로 참가한 모두에게 감사하다며 정중한 인사를 하고는 추모비 앞에서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간직하고 싶다고 사진촬영을 간절히(Please)요청해왔다. 미군들의 몸에 베인 애국 전우애를 함께 느끼면서 그동안 잊혀지고 못다 핀 청춘 꽃 우방영웅들의 이름과 정신이 호국의 고장에서는 영원할 것이라며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운명적인 소명이 나를 자고산 303고지 정상에 이어 이곳으로 안내를 해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을 하게 됐다. 운명적인 소명이 나를 자고산 303고지 정상에 이어 이곳으로 안내를 해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을 하게 됐다. 나는 지역신문을 통해 학살현장의 실태를 알리기 위해 기사로 언론봉사도 이어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외진 곳에 위치한 학살현장에는 관심이 없는 듯 303고지 정상에만 관심을 보였다. 나는 부여받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칠곡군협의회 자문위원 자격(홍보분과위원장-기획분과위원장)으로 한미합동 우리의 전통식위령제를 기획하고 추진하면서 미군방송 AFN과 대구 MBC / 구미 HCN 취재섭외를 통해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낼 수가 있었다. 한국전쟁의 전세를 바꾼 참혹한 역사적인 미군포로 학살사건이 한국전통식위령제(추모행사)로 방송에 보도되자 한미고위급 군지휘관들의 참배가 이어졌고 2015년 9월 11일에 김관용 경북도지사님 비롯해 미8군과 2군 작전사령부 고위급 지휘관들이 303고지 미군포로학살현장을 찾아 합동 헌화 참배 식을 가졌다. 김 지사님은 이 자리에서 성역화된 추모공원조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며 동행한 백선기 칠곡군수님께 지원에 대한 확인지시하시면서 공사는 신속히 진행되었고 2년 공사기간을 거친 한미우정의공원에 성역화를 상징하는 추모비가 장엄하게 Hill 303 역사현장에 서있게 됐다. 지난 2023년 우방 한국을 원망하던 303고지의 역사 앞에서 운명의 책무를 이어온 저는 한미동맹70주년에 맞추어 우방영웅들이 인류의 자유의 빛이 되셨음을 고하며 의미 있는 추모행사계획으로 303고지 임무완수를 보고하고 스스로 퇴직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깝게도 대대에서 부임한 한국계 A중대장은 나의 업무를 잘 알면서도 사전 언급도 없이 내자리가 없어졌다며 연장근무 시한을 몇일앞두고 갑자기 퇴직처리를 하는 바람에 나름 특별히 구상한 행사계획은 물론 보고마무리도 못하게 되었다. 중대소속 직함으로 봉사차원의 대대의 대민업무에 대해 그동안 대대의 일부직원들의 우월의식을 느낌과 들려오는 언행으로 알았지만 연장근무의 혜택을 받고 있던 나는 누군가를 생각하고 의심하기보다 303고지 마지막 한미혈맹 70주년 소명완수가 무산되어 아쉬움이 더욱 컸다. 2011년에도 대대에서 부임했던 W중대장은 대대에서 나와 각별한 관계에 있었으나 갑자지 돌변하여 대민관계 업무를 대대로 넘기라는 명령식 통보와 해고도 암시하는 부당한 업무지시로 나와 마찰을 일으켜 결국 나의 해고가 아닌 W중대장이 돌연 보직 해임되었다. 대민업무를 지원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는지 나의 운명인지 나와함께 학살현장에서 앞장서 잡초제거봉사를 한 테일러 대위가 84중대에 W중대장 후임으로 부임한 중대장이었다. 미6병기대대는 나와 묵은 악연인지 인연이지...? 이렇듯 대소희비의 운명적인 많은 사연을 품은 채 나의 마지막 303임무를 뜻밖에 잃게되니 큰 실망감과 보고미필의 죄책감으로 우방호국영혼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너무 깊어 나를 지탱할 수가 없었는지 갑자기 병원신세가 됐다. 이제 추억의 추모행사를 두차래 보내고도 반신의 불편함으로 폰문자의 글로나마 못 다한 보고책무를 대신하고 있다. 지난 달 인터넷 칠곡신문을 통해 두해 째 303의 역사의 이음을 확인하면서 나와 함께 행사를 담당하신 모든 분들에게 그동안 노고와 변함없었던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마음에 운명으로 다가와 소명처럼 여겨왔던 303고지의 완수했음을 이제라도 보고 드리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의 보람과 뿌듯함은 반세기 타향살이 동안 호국의 다리 지킴이에서부터 303고지 역사의 혼을 나의 운명에 담으면서 소속 미군 지휘관들의 취임식을 비롯한 한미친선 행사를 영상물로 증정했던 기억 또한 인생정년의 정돈된 기록유산으로 남길 수 있는 시간을 위해 가족들의 기도와 친구, 지인들의 격려로 더 살아있음이 무엇보다 감사함이다. 후회 없는 남은여생으로 내 무명의 인생흔적이 칠곡 호국의 고장에 하나의 점이라도 남길 기대하며 운명적인 소명이 다시 또 부여된다면 부활한 작은 촛불이라도 재가 될 때까지 태우고 싶다. 글/사진 송인태 sit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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