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2013년 10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당시 여주지청장이던 윤석열 대통령의 명언이다. 이 말에 감동받은 상당수 국민은 2022년 3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철석같이 믿고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뽑아 주었다. 대통령 후보 시절 그의 어퍼컷 세레모니를 보고 지지를 보냈던 유권자들은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법과 원칙이 바로 서는 나라를 위해 속시원하게 어퍼컷을 날려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법과 국민 위에 군림하는 무법자들을 카운터 펀치로 케이오(KO) 시키기는커녕 잽(jab)만 날리다가 2년이 지나갔다. 특히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등을 시원스레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다. 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장기간 계속된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미온적 대처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 ▶탈원전 정책에 따른 한전 26조원 손실 등으로 퇴임 후 당연히 처벌을 받을 것으로 보았다. 더구나 2018년 4월 남북 회담 당시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문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넘겨준 USB 내용을 지금까지 밝히지 않아 문 전 대통령을 여적죄 혐의로 철저히 조사한 후 처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데도 윤 대통령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임기 중 총선은 늘 집권당에 대한 평가의 성격을 지닌다. 여당이 참패한 이번 4·10총선 결과는 윤 대통령에 대한 중간 평가라 할 수 있다. 한국리서치 등이 지난 4월 15∼17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국지표조사 결과 이번 총선에서 가장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응답자의 30%가 물가와 민생 현안을 꼽았다. 이어 정부여당 심판은 20%, 막말 등 후보자 논란 11%, 야당 심판 10%, 의대 정원 증원 8%, 호주대사 논란 5%, 공천 파동 2% 순이었다. 유권자들은 공정과 정의가 무너졌는데 뚜렷한 조치를 가하지 않은 윤석열 정부와 여당을 이같이 표로써 심판한 것이다. 세계적 추세인 경기침체 등으로 살기 어려운 것은 대통령에 대한 신뢰만 있으면 언젠가는 회복해 주리라는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 국민은 가난한 것보다 세상이 공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 더 절망하고,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 송(宋)나라 유학자 육상산은 일찍이 "(백성은) 가난함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않음을 근심한다(不患貧 患不均)"고 지적했다. 원래 이 말은 논어 계씨편의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불환과이환불균, 불환빈이환불안)`에서 유래했다. "정치를 함에 있어 위정자는 백성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불평등한 것을 걱정하며 백성이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불안해하는 것을 걱정하라"는 의미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후보 공천권을 쥐고 있는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과 갈등 양상을 보인 것도 문제가 됐다. 윤 대통령은 최측근인 한 위원장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후배"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그러나 한 위원장은 좌파에서 보수로 위장 전향한 의혹을 사고 있는 김경율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과 지난 1월 17일 서울시당 신년인사회에서 손을 들어 올려 마포을 선거구에 전략 공천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내비쳤다. 김경율 비대위원은 이날 JTBC 유튜브 `장르만 여의도`에 출연해 "프랑스혁명이 왜 일어났을 것 같나.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 난잡한 사생활이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감성이 폭발된 것"이라며 "윤 대통령과 김 여사가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윤 대통령은 지난 1월 22일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배신감을 토로했다고 채널A가 보도했다. 윤 대통령은 "가장 아끼던 사람에게 바보같이 뒤통수를 맞느냐는 소리까지 들었다"며 "사람을 너무 의심하지 않고 썼던 나의 잘못인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라는 주변 이야기를 채널A는 전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이상한 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한 위원장은 지난 1월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혁신당 중앙당 창당대회를 열어 이준석 정강정책위원장을 초대 당 대표로 선출하는 대회장에 화환을 보내 눈길을 끌었다. 한때 원팀이었던 새로운미래 이낙연 공동대표도, 같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등도 일체 화환을 보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한동훈 명의의 유일한 화환을 놓고 한 위원장과 이준석 대표가 특별한 관계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준석 대표는 국민의힘 당내 내부총질 등으로 말썽을 빚어온 가운데 개혁신당 창당에 앞서 지난해 12월 27일 국민의힘을 탈당했다. 더구나 한 위원장은 4·10총선에서 이준석 대표의 개혁신당과 맞붙어야 하는 상황에서 축하 화환을 보낸 것은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이준석 후보는 이번 총선 경기 화성을에서 42.4%의 득표율로, 17.8%에 그친 삼성전자·현대차 출신 정치신인 국민의힘 한정민 후보와 39.7%를 얻은 민주당 공영운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국민의힘이 유력한 후보를 공천했다면 한동훈 위원장과 친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준석 후보의 당선이 가능했을까? 지난 4월 16일 윤 대통령과 만난 홍준표 대구시장은 이에 앞서 국민의힘이 총선에서 참패한 다음 날부터 한동훈 전 위원장을 여러차례 비판했다. 홍준표 시장은 지난 4월 11일 대구시청 기자실에서 "(한 전 위원장에게) 총선 기간 내내 대권놀이를 하지 말라고 했다. 당원들 속에서 셀카 찍는 것만 봤다. 전략이 있었느냐"고 꼬집어 물었다. 지난 12일에는 "천신만고 끝에 탄핵의 강을 건너 살아난 이 당을 깜도 안되는 황교안이 들어와 대표 놀이 하다가 말아먹었고, 더 깜도 안 되는 한동훈이 들어와 대권 놀이 하면서 정치 아이돌로 착각하고 셀카만 찍다가 말아먹었다"고 비난했다. 홍 시장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재인 믿고 사냥개가 돼 우리를 그렇게 짓밟던 애 데리고 와서 배알도 없이 그 밑에서 박수치는 게 그렇게도 좋더냐"며 한 전 위원장을 문 전 대통령의 ‘사냥개’로 비유했다. 이어 지난 18일에는 “주군에 대들다 폐세자된 황태자”로 한 전 위원장을 빗댔다. 홍 시장이 자신의 최대 대권 경쟁자인 한 전 위원장을 "깜도 안되는 인물" "문재인의 사냥개"라고 비유한 것은 다음 대선을 겨냥해 자신이 보수 적통임을 호소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6일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아직 현장의 문제를 다 해결하기에는,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다"며 "아무리 국정의 방향이 옳고 좋은 정책을 수없이 추진한다 해도, 국민들께서 실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정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무분별한 현금 지원과 포퓰리즘은 나라의 미래를 망친다. 경제적 포퓰리즘은 정치적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와 상통한다"며 "이것은 우리 미래에 비추어 보면 마약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국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더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 바로 정부의 임무고 민심을 챙기는 것"이라며 "국민 여러분께 더 가까이, 민생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서 현장의 어려움을 듣고, 국민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챙기겠다"고 밝혔다. 한동훈 전 위원장은 지난 16일 비상대책위원들과 가진 만찬 회동에서 과거 검사 시절 좌천됐던 때를 언급하면서 "이런 시간에 익숙하다. 이 시간을 충분히 활용해서 내공을 쌓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시간`은 정치적 공백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겠다며 지난 11일 비대위원장을 사퇴한 뒤 자택에서 칩거해 왔고, 지난 19일 윤 대통령의 오찬 제안을 거절해 윤 대통령과의 갈등설이 확산되고 있다. 윤 대통령과 갈라서는 `홀로서기`를 겨냥한 정치적 행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난 22일 국회에서 열린 ‘2024 총선 참패와 보수 재건 세미나’에서는 국민의힘 이승환(서울 중랑을) 전 후보는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윤석열) 대통령 지키기에 매몰돼 수도권 중도층의 마음을 전혀 얻지 못했다”며 “우리는 무능한 조폭 같았고 저들(야당)은 유능한 양아치 같았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세미나를 주최한 윤상현 의원(4선·인천 동-미추홀을)은 “가장 경계할 것은 대참패에도 불구하고 시끄러운 토론회를 불편해하는 공동묘지 같은 분위기”라며 “지금은 혁신하고 분노해야 할 시기다. 무난한 대응은 무난한 패배를 자초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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