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는 서민과 국민이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현수막은 1개만 걸어도 바로 철거된다.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옥외광고물법)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치적(治績)과 정당을 홍보하기 위한 국회의원들의 현수막은 신고하지 않고도 개수에 제한 없이 무차별적으로 걸어도 된다. 이같이 국회의원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로 바꾼 옥외광고물법 앞에 모든 국민이 평등한가?
한비자(韓非子)는 `法不阿貴, 繩不撓曲(법불아귀, 승불요곡)`이라 했다. 법은 권력자에게 아첨하지 아니하고, 목수는 굽은 나무라고 먹줄을 구부려 그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10일부터 시행된 개정된 옥외광고물법에 따라 정당 현수막은 15일 이내 표시기간(게시기간), 정당 명칭, 설치업체 연락처만 표시하면 별도 신고 없이 숫자와 관계없이 마음대로 설치할 수 있다.
이 법은 말이 개정(改正)이지 사실상 개악(改惡)이다. 개정(改正)은 내용 따위를 고쳐 바르게 한다는 의미다. 개악(改惡)은 고치어 도리어 나빠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악법이 시행되자 무분별한 정당현수막이 도시 미관을 해칠 뿐 아니라 특정인을 비난하는 정치 혐오를 야기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국회의원은 가난한 농민과 힘없는 서민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하는 법을 제정하는 등 국민을 편안하게 해 주는 정치를 하도록 유권자가 뽑은 주민의 대표다. 따라서 국민이 주인이고 국회의원은 국민의 권익을 대변하는 대행자이며, 국민의 머슴이다. 머슴인 국회의원은 주인인 국민의 세금으로 급여를 받기 때문에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서 잘 다스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옥외광고물법 시행으로 주인인 국민은 필요 없는 불편을 겪고 있으며, 국회의원은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자신과 정당을 한껏 홍보하고 있다. 주객전도(主客顚倒), 즉 주인과 객(머슴)의 위치가 뒤바뀐 것이다.
새로 시행된 옥외광고물법에 대해 행정안전부와 국회의원 스스로 대책마련에 나섰다. 법과 국민 위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단순한 정당현수막 문제로 국내 언론은 물론 온 나라가 시끄럽기 때문이다. 일부 지자체는 정당현수막과 관련해 세부 기준을 마련해 달라는 시행령 개정을 행안부에 요구한 바 있다. 결국 행안부는 `정당 현수막 설치·관리 가이드라인`을 정해 지난 8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 가이드라인 주요 내용으로는 ▲어린이·노인·장애인 보호구역 설치 금지 ▲보행자 통행 및 차량 시야를 방해할 우려가 있는 곳에선 끈의 가장 낮은 부분이 2m 이상이 되도록 설치 ▲정당 외의 단체명, 일반 당원 이름 표기된 현수막은 설치 금지 ▲정당현수막 설치 시 지정 게시대나 우선 게시대에 우선 설치 권고 ▲표시·설치 방법 위반 정당현수막은 지자체에서 철거 가능 등이다.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4월 18일 정당현수막의 장소·개수·규격 등에 대한 제한을 대통령령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도 지난 4월 14일 ▲당이 현수막을 설치하는 경우 시장 등에 대한 사전통지 의무화 ▲현수막 설치장소 및 개수·규격 등에 대한 제한 추가 ▲이를 위반하면 강제 철거 명령 등 행정적 조치를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개정안을 대표발의해 놓은 상태다.
비슷한 내용의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4건 더 발의돼 있지만 내년 4월 10일 총선을 앞두고 정당현수막의 필요성이 더 커지고 있어 시행 여부는 불투명하다. 상당수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개수 제한이 없는 정당현수막을 자유롭게 게시하면서 사실상 자신을 홍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사전 선거운동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어 현재 시행되는 이 옥외광고물법을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모든 법은 국민을 불편하게 하거나 피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때문에 민폐를 끼치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은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다. 국민에게 나쁜 악법인 이 옥외광고물법을 현행법으로 지켜야 하는가?
흔히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 과거 국민을 억압하는 악법을 참고 지키게 하려는 독재정권의 음모다.
필자는 악법인 이 옥외광고물법의 폐지를 촉구한다. 무분별한 정당현수막을 빙자해 자신을 홍보하고 있는 소위 `현수막 국회의원`이 국민과 법 위에 군림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 이 악법 철폐에 나서주기 바란다.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