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면지(面誌) 발간의 목적은? 李=칠곡군 지천면의 역사와 문화, 산업, 주민의 생활 터전에 대한 유산을 발굴·기록해 향토사를 집대성하고자 면지를 발간하게 됐다. 지천 역사의 재조명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 확립은 물론 지역민의 자긍심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에 발간되는 지천면지는 기존의 군지(郡誌)나 다른 지역 면지(面誌)의 통례를 벗어나 지천면의 실질적인 맥락을 이어온 지천면에 살았던 주민들의 삶의 줄기를 중심으로 편집된 것을 알고 있는데? 李=우선 지천면 마을 이야기를 분량을 2배 이상 늘렸다. 이러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통해 각 마을의 역사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 독자들의 관심을 끌도록 했다. 또한 서민들의 이야기와 사라져가는 전통과 문화 등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주민들의 활동상황이나 행사 등을 사진자료 중심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가급적 새로운 역사와 내용을 많이 게재하려고 노력했다. 이제까지 농경사회로 고요히 내려온 우리 고장 사람들의 삶의 역사가 근대 산업사회를 지나 미래정보화 사회로 치닫는 시점에서 전통사회를 이어온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총괄적으로 수록했다. 통상적으로 면지(面誌)는 기존의 왕실이나 중앙정부의 사료에 의존해 특정인물 본위로 편찬된 군지(郡誌)나 다른 지역 면지의 통례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지천면지는 지방자치(地方自治) 시대에 부응해 지역의 역사(地域史) 기록인 만큼 지천면의 실질적인 전통의 맥락을 어어받아 우리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의 삶의 줄기를 중심(住民生活中心)으로 기록했다. 자연분야의 목차는 높은 것부터 낮은 것으로, 오래된 것부터 최근 것으로, 고정된 것을 앞으로, 움직이는 것을 뒤로, 연관된 것은 지구별·부류별로 각각 묶어 지역 문화·관광 안내서로 활용하기에 용이하도록 편집했다. 마을의 역사는 행정리 순으로, 마을유래, 살아온 성씨, 인구변천, 마을 형세(호수·토지·산업·시설·인물·전설 등)를 기록하고, 각 기관단체는 그 분야를 완성해 온 승계기관이므로 설립 목적과 직제기구, 기능, 업적, 주요 임원 등으로 편찬했다. -지천이라는 지명은 1914년 지천면을 만들 때 중심이 되었던 상지면(上枝面)의 지(枝) 자와 면의 주요 하천인 이언천(伊彦川)의 끝 글자를 따서 정해졌다고 한다. 상지(上枝)는 웃갓(윗가지)이란 뜻으로 나무와 산을 전제로 하고, 이언천의 냇물을 합하면 지천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으로 보인다. 예부터 명당에는 큰 인물이 많이 난다고 했는데? 李=지천면 웃갓마을(신4리)은 조선 시대 두사충(杜師忠)이 지목한 성주목의 5대 명당 중 한 곳이다. 석담 이윤우, 이도장, 이원정, 이한명까지 4대가 한림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수성 전 총리를 비롯해 법무부장관을 지낸 이우익 삼 형제,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 선조의 고향이기도 하다. 칠곡군의 400년 종갓집인 석담종택이 있다. 칠곡군 지천면 신리 웃갓마을의 북측 끝에 위치한 경수당(敬守堂)은 지붕의 망와에 ‘청 건륭 49년(1784)’ 또는 ‘도광(道光)’이라고 명문을 새긴 것이 있어 18세기 말에 처음 지은 후 19세기 중엽에 수리했음을 알 수 있다. 중사랑채 동측 토석담을 ‘담양담’이라 하는데, 이는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지낸 석담 이윤우의 선정(善政)에 보답하기 위해 담양 사람들이 와서 담을 쌓은 데 연유한다. 칠곡 경수당의 근·현대 인물로는 유학자 후석 이주후를 비롯해 3대 법무부장관을 지낸 동초 이우익, 전 대법관 우당 이우식, 사업가 이우혁 3형제가 있다. 2011년 3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3호로 지정됐고, 2021년 11월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됐다. -이번 지천면지에서 특별히 재조명한 인물은? 李=지천면이 낳은 천재화가 이쾌대를 재조명했다. 이쾌대는 1913년 1월 칠곡군 지천면 신리 웃갓마을에서 태어나 신동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대구 수창초교로 전학, 이 학교를 졸업했지만, 대구에서 그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휘문고보 재학시절인 1932년에 화단에 데뷔했고, 1934년 동경제국미술대학에 입학해 1939년에 졸업했다. 이쾌대의 그림은 표현 기법이 참신성이 있고 조형 감각을 엿볼 수 있으며, 서구적 지성과 방법론을 토대로 하는 화풍은 지극히 향토적이고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했다. 1950년 6·25전쟁 직후 서울에 급조됐던 남침 북한체제의 남조선미술동맹에 적극 가담했던 끝에 인민의용군으로 참전하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수용소에서 휴전을 맞이했지만 남북포로교환 때 자의로 북한을 택하여 넘어갔다. 월북 후인 1947년에 북한 미술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글을 통해 나름대로 자주성을 보였으나, 1960년대 이후 북한 사회주의의 형상화라는 새로운 `주체미술`에 동조하지 않아 `민족허무주의`라는 명목으로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숙청된 이후 자강도 강계시에서 재혼해 살다가 1987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쾌대의 작품은 서사적이고 장엄한 화풍으로 `한국의 미켈란젤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지천면지 편찬위원회의 구성과 노력은? 李=이번 지천면지는 지천면의 백과사전을 편찬한다는 마음으로 편찬위원회, 집필위원 외에 기관단체별 임직원과 분야별 각 마을별로 자료와 초고(草稿)위원을 임명하거나 위촉해 자료와 초고를 일정 기간 내에 편찬위원회에 제출하도록 했다. 편찬위원회는 기관단체장과 각 이장, 추천인 등 모두 72명으로 구성했고, 전문가 추천을 받은 편집위원 및 학계·관계(官界)·지역원로·출향인사 등의 자문위원과 후원회를 두었다. 면지 크기는 A4신국판 800여쪽 크기의 양장본으로 원고 분량에 따라 1권으로 만들어서 다니면서 쉽게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지천면지 발행 후 속편으로 발전정세에 따라 필요한 사료를 10년 단위로 한 권씩 속간하고 기존 면지에 게재된 내용은 새로 되풀이해서 편찬하지 않기로 했다. 지천면지는 편찬위원회 회의 3회, 상임위원회 회의 14회, 수단위원들과 간담회 20여회 등을 거쳐 발행됐다. 수단위원은 각 마을마다 3~5명씩 마을의 내력이나 역사를 잘 아시는 분들로서 면지 편찬에 직접 구술로 자료를 주신 분들이다. 지천면지가 나오기까지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협조해 주신 모든 분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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