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를 수료하신 소감은? 신=감회가 남다르죠! 학부에서 만학을 이어온 대학원 수료생으로서 학부에서 못다 한 심도 있는 역사학에 대한 연구가 요구되었습니다. 또한 가공되지 않은 인류의 발자취를 찾아 역사적 의미를 재발견하는 순간마다 새로운 지식의 충족을 넘어 소중한 역사적 교훈을 가지게 되어 너무나 만족스럽습니다. -배고픔은 그때를 참으면 넘길 수 있지만 배움은 때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70년 만에 대학 진학을 위해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준비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계기가 궁금합니다. 신=굶주림보다 더 큰 고통은 배움의 한(恨)이었습니다.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진학을 뒤로한 채 책가방 대신 농기구를 책 삼아 부모님의 농사를 도우며 미래 없는 인생사가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배움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 중·고등학교 강의록을 구입해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어렵게 그 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경제적 기반이 마련될 때 배우지 못한 한을 풀기로 한 제 자신과의 약속을 제 스스로 지킨 셈입니다. -역사적 사건에는 어떠한 계기가 있듯이 학업을 위한 첫 출발은··· 신=1975년 고향에서 부모님의 가을 추수를 돕던 중 미래 없는 삶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부모님과 처자식을 뒤로한 채 홀로 대도시를 향해 무작정 떠났습니다. 한(恨) 맺힌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비가 필요한 만큼 겁없이 뛰어든 사업이 나날이 번창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더 큰 사업을 꿈꾸게 되어 대일(對日) 무역업을 시작했는데 1992년 경북지사 수출유공자 표창과 함께 1994년 대일 수출 유공자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오찬에 초청되는 등 승승장구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중국의 저가 제품이 세계시장을 뒤흔드는 소용돌이 속에서 수입업체가 있는 일본 역시 고가제품을 뒤로하고 중국 제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른 수주격감과 수출물동량 저하로 IMF 직격탄을 맞아 그동안 쌓아 올린 금자탑이 순식간에 무너져 부도처리 되는 순간, 극단적 선택까지 떠올릴 정도로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2000년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나이에 인생 이모작으로 같은 업종을 국내로 전환해 그동안 축적된 노하우를 앞세워 다시 시작한 사업이 시대적 흐름에 부합한 결과 호황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다시 모은 자본으로 대로변에 신축한 상가 임대 수입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고시원에 들어가 쌓으신 `형설지공(螢雪之功)`에 대해··· 신=2016년 69세에 대구 팔공산에 있는 고시원으로 들어가 중·고등학교 검정고시와 대입 시험을 위해 열공(熱工)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굳어진 고령의 한계에 부딪쳐 자정이 넘으면 잠을 못 이겨 지친 머리는 책상으로 사정없이 떨어져 이마는 상처투성이였고, 다리는 부종이 생겨서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응급실로 후송되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대학에 들어가 못다 한 공부를 하겠다는 일념과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믿으며 힘든 나날을 참아 냈습니다. 고시원에 들어온 지 1년 만에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이듬해 2017학번으로 꿈에 그리던 대학교에 입학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2021년 2월 74세의 경북 최고령으로 계명대 역사학과를 졸업하면서 학사모를 쓰는 영광과 함께 배움의 한(恨)을 풀면서 가진 해원(解冤)의 성취감은 저만이 가질 수 있는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북 최고령의 만학도로서 까다로운 역사학을 대학원에서 어떻게 공부셨습니까? 신=역사학은 인류의 족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한자어 원서를 통독해야 하는 등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역사학(한국사·동양사·세계사)을 선택한 것은 평소 인류사의 변천 과정과 인류의 진화된 모습, 그리고 문명의 발달 등이 매우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250만년 전 최초의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20만년 전 호모사피엔스의 등장, 7만년 전 이후 불의 사용 등으로 진화한 호모사피엔스의 세 가지 대혁명, 즉 ▶7만 년 전 인지혁명 ▶1만2000년 전 농업혁명 ▶약 500년 전 과학혁명 등 인류의 역사를 어른이 되어 흥미롭게 공부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역사에 대한 정의는 다양합니다. 개인적으로 역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할 수 있겠죠. 과거 없는 현재가 없으며 현재 없는 미래는 없지 않습니까? 지나온 흔적을 역사가에 의해 생산된 사료와 문헌 기록물을 통해 그 근원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학문이 역사학이라 생각합니다. -가족의 만류에도 진학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가족의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진학을 포기하지 않고 학문을 계속하게 된 것은 오로지 충족하지 못했던 지적 호기심과 향학열(向學熱)이 불타올랐기 때문입니다. 서실의 문을 잠근 상태에서 식사도 거부한 채 두문불출한 결과 가족의 동의를 받아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월 22일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식을 많은 지인의 축하 속에 진행됐는데··· 신=원근 각자에서 대학원 수료식에 대거 참석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께서 미진한 만학도의 절차탁마(切磋琢磨·부지런히 학문과 덕행을 닦음)에 큰 관심과 격려를 보내 주셨기에 대학원을 수료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지역에서 어떠한 일을 하고 싶습니까? 신=`끝나도 끝나지 않았다.`(It`s not over when it`s over)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의 `나는 아직 배고프다`(I`m still hungry)라는 명언처럼 저는 아직 배움에 배고픕니다. 앞으로 계명대 대학원에서 석사 논문(논제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 장군의 위업에 대한 고찰`) 심사가 통과되어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건강이 허락하면 박사 코스까지 밟을 계획입니다. 뇌는 죽을 때까지 해부학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인간의 뇌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공부 잘하는 뇌로 변하는 만큼 뇌사(腦死) 전까지 평생을 공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명대 유명한 유학자 왕양명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습니다. 고향 칠곡의 후진 양성에 도움이 된다면 역사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칠곡군에 분포한 청동기 통일신라시대의 유적과 유물의 가치를 재조명해 칠곡군의 새로운 역사와 정체성 확립에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성숙 기자 9746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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