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서도회·헌정회가 국회 마당에서 지난 12월 29일 개최한 신년 휘호 퍼포먼스에서 김창환 전 의원님께서도 붓을 드셨는데 어떤 내용을 쓰셨습니까? 金=`鵬程萬里`입니다. 붕정만리는 `붕새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를 올라간다`는 글에서 유래했는데요, 붕새가 단번에 1만 리를 날듯이 앞길이 매우 멀고도 큼을 의미합니다. 장자(莊子)에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겠는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참새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신의 공간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그곳을 벗어날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붕은 머나먼 여정(旅程)의 큰 뜻과 원대한 사업을 계획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제8·9대 국회의원에 어떻게 당선되셨는지 궁금합니다. 金=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성주·칠곡 지역구에 출마해 당시 현역 국회의원인 민주공화당 송한철 후보를 꺾고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됐습니다. 이어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구미·선산·성주·칠곡·군위 지역구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재선된 바 있습니다. 1971년 4월 실시한 제7대 대통령직선에서 박정희 후보는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게 94만여 표 차로 근소하게 당선됐습니다. 곧바로 5월에 실시한 제8대 총선에서는 여당(민주공화당) 대 야당(신민당)의 의석비율이 113(지역구 86명·전국구 27명) 대 89(지역구 65명·전국구 24명)로, 신민당이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권력에 대한 위협을 느낀 나머지 더욱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게 됐습니다. 1973년 2월 유신헌법에 따라 치른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일괄 추천한 후보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찬반투표로 선출하는 전국구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3명을 이렇게 뽑는 `유신정우회(유정회)`의 탄생으로 박정희 유신 정권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국회 의석의 3분의 2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신민당 의원들은 국민을 대변하는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강제 추방되는 억울함을 참지 못했으며, 의정활동을 말살하고 국회 의석을 맘대로 좌지우지하는 유신독재에 맞서 항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973년 국회의원 선거 구호를 `억울한 김창환, 밀어주자 젊은 투사!`로 했던 것입니다. 당시 유세현장을 카랑카랑하게 울린 저의 목소리는 민주와 정의를 갈구하는 유권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그들은 패기가 넘치는 젊은 김창환을 국회로 보내자며 함성과 박수로 화답한 결과 제가 2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선 후 왜관역 광장 등에서 저를 열렬히 환호해 주신 칠곡군민들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북 선산이 고향인 제가 초등학교 2·3학년 때 시골 본가 안방에 의원님 달력이 붙어 있는 것이 기억납니다. 당시 얼굴 알리기와 선거운동을 하면서 생긴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金=제가 2번에 걸쳐 출마해 당선된 1970년대 초에는 요즘처럼 대중매체나 인터넷과 SNS가 없어 국회의원 출마자들은 한 장짜리 달력에 얼굴사진과 함께 이름을 넣어 알리는 것이 최상의 선거운동이었습니다. 지금은 달력이 흔하지만 먹고사는 것이 힘들었던 당시는 달력이 귀했습니다. 한 장짜리 달력에 음력과 절후표를 넣어 1년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농사 준비는 물론 연중행사, 집안 대소사를 표시하는 등 정말로 유익했습니다. 특히 출마자는 이 달력을 통해 1년 내내 자신을 알릴 수 있어 한쪽 달력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금쪽 같은 달력`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총각이었는데 선거 유세장에서 불의와 맞서는 저의 소신이 불타올라 유권자들은 `김창환을 이번에 꼭 당선시켜 장가보내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저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습니다. 성주 고향 친형님들께서는 집과 전답, 모든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아 저의 선거에 전력을 다하셨습니다. 특이한 것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에 입학한 저는 중학생 시절부터 정치의 꿈을 가지고, 고향인 성주군 수륜면 윤동 야산에 올라가 가야산을 바라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며 정치후보생의 자세로 선거유세 연습을 했는데요, 당시 목이 터져라 고함친 덕분인지 제8·9대 국회의원 선거유세 시 목이 쉬지 않았습니다. -정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金=제가 새해 휘호로 쓴 `鵬程萬里`(붕정만리)처럼 정치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慧眼)으로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 정치는 눈앞에 이익을 두고 이전투구(泥田鬪狗) 식으로 서로 싸우는 모습을 개선하지 못해 국민은 신물이 날 정도로 정치를 혐오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46조 2항은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느 정당의 이익이나 국회의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최우선시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헌법을 제대로 지키는 정치인은 몇 명이나 될까요? 헌법을 지키지 않는 정치인이 정치할 자격이 있습니까?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은 당리당략(黨利黨略)에 치우쳐 소모적인 싸움으로 일관하고, 국회의원은 국민과 `다음 세대`보다 `다음 선거` 준비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정치인들이 `누구를 뽑아도 마찬가지`라는 정치적 허무주의를 국민에게 심어 주어 정치를 자기 멋대로 펼칠 수 있도록 국민이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라고 충고했습니다. 국민은 정당만 보고 `묻지마 투표`만 할 것이 아니라 누가 나의 눈물을 닦아 주고, 진정으로 국민을 더욱 편하게 해줄 수 있는지 인물과 공약 등을 확실히 검증해야 합니다. 중국 북송 정치가 범중엄(范仲淹)은 `천하가 근심하기 전에 내가 먼저 걱정하고, 천하가 모두 즐기고 난 후에 내가 즐기리라`(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먼저 걱정해야 하고, 국민을 행복하게 해준 후에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 정치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국민이 도리어 정치와 정치인을 걱정해야 하고, 정치인들은 자기 이득부터 챙기는 참담한 현실입니다. -어떻게 해서 험난한 야당의 길을 가시게 됐습니까? 金=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맞서 결성된 `공명선거 대학생추진위원회` 회원으로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방송에서 저는 마이크를 잡고 "독재정권 타도하고 썩은 정치 뿌리 뽑자"고 외쳤습니다. 평소 불의나 부정을 보면 참지 못하는 저의 심성이 그대로 나타났다고 봅니다. 저는 국회의원으로서 국정활동을 하면서도 관건선거에 개입한 전국산림조합연합회장의 비리를 국정감사장에서 폭로해 바로 사임하게 하는 등 바른 의정을 펼쳤다고 자신합니다. 고향이 저와 같은 성주이고 의성김씨 문중 어르신인 심산 김창숙 선생(성균관대학교 창립·초대 학장)의 영향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김창숙 선생은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와 친일 부역자들에 맞서 비타협적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해방 후 고령에도 불구하고 분단·독재세력에 맞서 평화통일과 민주주의를 앞장서서 외치신 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불의와 타협 없이 지조를 지키며 굳건히 한 길로 의롭게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실제로 저는 6·29선언 후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씨가 통일민주당을 깨고 평민당을 창당할 때 김대중 계보이지만 통일민주당을 지켰습니다. 또한 김영삼 씨가 야당인 통일민주당을 여당과 3당 합당할 때도 단호히 통일민주당을 사수했습니다. 네 번 대선 도전 끝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이 당 총재까지 겸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으로 군림할 때는 대통령과 당 총재를 분리하는 역할분담론을 주장하다가 많은 불이익을 당했으나 비굴하게 한 번도 소신을 굽힌 적이 없습니다. -정치를 그만두고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대한민국 헌정회` 운영위원회 의장을 맡아 국회와 관계를 이어갔고,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과 `덕천서원 복원추진위원장`을 맡아 덕천서원 복원 시 1억원을 기부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金=우선 젊은 패기와 민주화의 열정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야당 후보로 출마한 저를 막강한 민주공화당(집권당) 사무차장인 2선의 송한철 의원을 압도적으로, 그리고 9대 총선에서도 저를 당선시켜 주신 칠곡·성주 군민 여러분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09년부터 3선 헌정회 운영위원회 의장을 맡아 헌정회가 정치원로 단체로서 국가에 공헌하고, 변화와 발전을 도모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도록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헌정회는 원로 정치인의 모임으로 과거 모든 정당과 정파를 초월하고, 국가 안보적 차원의 큰일에 국가 원로로서 비중 있는 충언으로 방향을 제시하고, 중요한 국가정책 개발과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운영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을 때 헌정회 회원 가운데 의원을 지낸 전직 대통령 2명과 국무총리, 장관 등 고위 공직자 출신이 많았습니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는 사단법인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김창숙 선생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숭고한 정신을 드높였습니다. 김창숙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유림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맹활약을 하셨습니다. 특히 단재 신채호와 만해 한용운과 함께 `삼절(三節)`로 평가받는 독립운동가로 통일과 반독재 투쟁, 민족사학 육성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친 분이십니다. 성주군이 318억원을 들여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김창숙 선생의 생가 주변에 `심산의열사적공원`을 조성하고 있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덕천서원(德泉書院)은 조선 후기 김관석 선조 등 4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입니다. 이 서원이 위치한 성주군 수륜면 윤동마을은 조선조 문과에 급제해 태조 이성계를 도운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서 호남·충청 병마도절제사를 지낸 의성김씨 문절공 김용초 선생이 성주로 내려온 후 5대손인 사우당 김관석(1505~1542) 선조가 이곳에 입향, 의성김씨의 집성촌이 됐습니다. 의성김씨인 저는 `덕천서원 복원추진위원장`으로서 서원 복원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쏟았습니다. 선조(先祖)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길이 종중(宗中) 간 화목을 돈독히 하고, 정도(正道)로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저는 맨주먹으로 일어섰고, 정치를 할 때나 지금도 정의롭게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하면 된다`는 좌우명으로 살아왔습니다. 저는 공자의 `吾道一以貫之`(오도일이관지·나의 도는 일관되게 꿰어져 있다)를 명심하면서 지금도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도 내가 가야할 길을 일관되게 걸어갈 것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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