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어려운 취업으로 대학의 인문사회계열(문과) 학과가 외면 받고 있는 가운데 초·중·고교까지 이과(의·약학 및 이공계열)를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 초만 해도 고교 학반의 문과와 이과 비율이 4~5:6~7이었는데 지금은 3:6~7로 이과 지원 학생이 늘어났다. 더구나 대입에서 이과 수험생들의 `문과 침공`으로 문과생들의 설 자리가 점차 좁아지고 있다.
지난해 대입에서 정시모집 결과 상위권 대학을 중심으로 인문계열 모집단위에 자연계열 수험생이 지원한 비율이 증가한 것이다. 연세대와 고려대의 인문계 모집단위 지원자 등 과학탐구 영역 응시자 비율은 2021학년도 0.44%에서 45.90%까지 급상승했다.
지난해 시작된 문·이과 통합형 대학 수능(수학능력시험)에서 이과 학생들이 인문계열로 교차 지원하는 사례가 대폭 증가한 데 이어 올해도 늘어날 것으로 조사됐다.
입시 전문업체 유웨이에 따르면 지난 7월 456명의 수험생에게 2023학년도 대입 교차지원 의향을 설문조사한 결과 과학탐구 선택자 중 56.5%가 `인문계 모집단위에 교차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이같은 `문과 침공` 현상은 이과 수험생이 수학 선택과목에서 유리한 것으로 판단한 결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과생들이 상위권대 인문 계열로 교차 지원해 입학은 했으나 학과에 적응하지 못해 반수생(半修生)이 되기도 했다. 반면 문과생들은 이과생들에 밀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다시 수능을 보는 경우도 생겼다.
문제는 문과 학생에 비해 이과 학생 비율이 늘어남에 따라 생길 수 있는 계열별 양극화현상이다. 각 대학에서는 인문사회계열(문과) 학과를 아예 폐쇄하거나 정원수를 감원하는 등 `이과쏠림` 현상에 부응하고 있다.
문과 외면 현상은 초·중·고교에서도 나타났다. 종로학원이 지난 5월 초·중학생 학부모 200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81.1%가 이과를 선호한다고 응답했다. 남학생은 90.2%, 여학생은 69.8%가 이과 진학을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이같은 ‘인문학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올해부터 2026년까지 5년간 인문학 진흥 계획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융·복합 연구에서 과학기술이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융합 연구가 필요한 주제를 발굴해 지원할 계획이었다. 초·중·고교의 인문 교육도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말 기준으로 8년간 국내 대학의 인문 계열 학과가 150개 가까이 폐과, 인문학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정부에 따르면 대학의 인문 계열 학과는 2012년 976개에서 2020년 828개로 줄었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인문학 진흥방안은 최근 발표한 `디지털 인재양성 종합방안`에 묻혀 가는 느낌이다. 정부는 초·중학교 코딩교육을 필수화하고 대학 디지털분야 학부 정원 규제를 푸는 등 관련 제도를 정비해 올해부터 2026년까지 5년간 100만명의 디지털 인재를 육성하는 `디지털 인재양성 종합방안`을 지난 22일 발표했다.
정부의 반도체·디지털 인재양성 방안 등에 따라 앞으로 이과 쏠림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전망이다.
빌 게이츠는 "인문학이 없었다면, 컴퓨터도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모든 제품은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 서 있다"고 말했다. 이같이 세계 IT업계의 대부들은 "인문학이 창조적 아이디어를 낳는 산파 역할을 했다"고 입을 모았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인문학적 소양은 풍부하고 무한한 인간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는 "풍부한 인문학적 상상력은 창의적인 기술을 촉진시키며 오늘날 첨단 기술의 밑바탕이 되어 인류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이러한 창의력은 단순히 아이디어를 고민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주 교수는 "인문학 교육은 과거 인류가 축적해온 수많은 경험들의 산물을 간접 경험하는 창의력 계발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현실에서는 일찍부터 정답과 다른 답을 말하면 틀렸다고 야단맞는 분위기가 있고 그런 상황에서는 창의력이 계발되기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대학의 인문학은 즉각적인 사회경제적 실용성을 따지기에 앞서 그 기반이 되는 상상력과 창의력의 계발 창구로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