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광복` `해방` `독립`을 애매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을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8월 15일 같은 날에 맞추다보니 8·15는 독립기념일, 광복절, 건국절 등으로 복잡하게 됐다. 8·15를 `광복절`로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1949년이다. 1949년 10월 1일 제정해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한 법률 제53호 ‘국경일에 관한 법률’ 2조에 근거로 하고 있다.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을 제헌절로,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각각 수정했다. 문제는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해방이냐 광복이냐의 의미에 충실하기보다는 일(日), 절(節)과 같은 어미와 자구에 집착했다. 그 결과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과 광복절이라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모두 3음 끝에 `절`자를 넣어 통일시킨 것이다. `광복절`이란 명칭의 법률적 명문화는 결과적으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 다행이다. ‘빛 광’과 ‘회복할 복’을 쓰는 광복절(光復節)에서 光復은 ‘빛의 회복’이라는 뜻이다. 본래의 제 빛을 찾는 것이다. 이는 잃었던 나의 주권(자주성)과 국권을 동시에 회복하는 것으로 `독립`과 `자유`의 의미를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일각에서는 광복절이 `해방절`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광복이란 단어가 타당하다. 해방(解放)의 사전적 의미는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함`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에서 벗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해방`을 확대 해석하고,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좌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데 문제가 있다. `해방`은 누군가(주어)가 누구를(목적어)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일본과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이나 연합국이 일본의 지배와 억압에 있던 우리나라를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를 해방시켜 주었다"라고 사용하지 "노예를 광복시켜 주었다"라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문에 해방이라고 하면 우리의 독립은 일본을 이긴 승전에 대한 연합국의 선물이나 부산물로 치부되기 쉬울 것이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자주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 투사들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연합국이 부각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도 의미를 잃게 된다. 그러나 북한은 8·15를 `조국해방기념일`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종북 주사파를 비롯해 일부 좌파의 `노동해방` `인민해방` `조국해방` 등에서 보듯이 이들은 광복이란 말 대신 해방이란 용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즐겨 사용한다. 우리나라 법률에 명시된 공식 명칭인 `광복절`은 영문으로 정확히 `Restoration Day`(주권을 회복한 날)이다. 그러나 문화체육관광부 영문판 공식홈페이지 뉴스란에는 광복절이 `Restoration Day`로 돼 있지 않고 `Liberation Day`(해방일)로 나와 있다. 지난 8월 15일자 `President Yoon, first lady cheer on Nat`l Liberation Day`(윤대통령·김여사 해방절 격려) 기사제목과 기사내용에 `National Liberation Day`(해방절)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진보·좌파는 주로 `해방`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주권과 국권 상실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는 광복은 보수적이고 복고풍으로 보여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 혹은 ‘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대한민국 정부수립)를 ‘2기 광복절’, ‘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각각 부르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교수의 `1기~2기~미래 광복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처해 있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자.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의 라디오를 통해 히로히토 일왕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안타깝게도 이날 일왕의 태평양전쟁 종전 선언을 대다수 조선인들이 몰랐다. 당시 조선에는 라디오가 있었지만 보급률이 낮았기 때문이다. 당일 거리는 조용했고, 다음날 16일이 돼서야 전국적으로 광복의 만세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온 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감격적인 장면은 8월 15일이 아니라 16일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9월 9일까지 일장기를 걸었고, 이날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까지는 미군정 하에 성조기가 걸려 있었다. 따라서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우리나라는 앞에서 이완범 교수가 지적했듯이 `미완의 광복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히로히토 일왕이 1945년 8월 15일 발표한 ‘대동아전쟁종결조서`를 봐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이나 광복이 아니었다. "짐(일왕)은 세계 정세와 제국(일본)의 현재 상황을 깊이 감안해 비상조치로 시국을 수습하고자 여기 충실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해 그 공동선언(포츠담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중략) 적(敵)은 새롭게 잔학한 폭탄(원자폭탄)으로 무고한 백성을 살상함으로써 그 참혹한 피해는 헤아릴 수 없다. 전쟁을 계속하게 되면 우리 일본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인류의 문명까지도 파괴될 것이다.(하략) 흔히들 이 내용을 히로히토 일왕의 무조건적인 항복선언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히로히토 일왕은 1945년 8월 14일자로 작성된 ‘대동아전쟁종결조서(大東亞戰爭終結詔書)’를 다음날 발표했다. 조서(詔書)는 임금의 명령을 일반인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를 말한다. 항복문서나 항복선언서가 아니라 제목에서 보듯이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종결하는 내용을 알리는 담화문이고, 일왕이 자국의 신민(臣民)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조서 전체 내용 어디에도 `항복한다`거나 `패전했다`든지 전범 국가로서 잘못했다는 등 일본에게 불리한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일본은 잘못한 것이 전혀 없고, 연합군이 더욱 잔혹했으며, 자국민의 더 많은 희생을 막는 등 세계평화를 위해 종전을 받아들였으나 다시금 총력으로 국가의 재생과 번영을 위해 일치단결해 진가를 발휘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과 같은 전범국가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해를 입은 국가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사과를 해왔다. 반면 일본 아베 전 총리는 "침략은 정의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라며 침략을 부인했고, 위안부는 자발적인 집단이라는 등 망언을 스스럼 없이 내뱉었다. 독일은 또한 전범을 철저히 처벌하고 피해자에게 배상을 해주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에도 나치 전범을 계속 추적해 9만명을 기소했고 그중 6000명을 유죄로 판결해 처벌했다. 그러나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일본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A급 전범 28명을 기소해 1948년 7명이 사형 선고를 받는 것에 그쳤다. 도조 히데키는 이 재판에서 “천황 허락 없이는 전쟁을 시작할 수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나 종전 후 맥아더 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은 천황체제가 무너질 경우 일본 국내가 혼란에 빠지면서 공산주의 세력이 급속히 확산될까 두려워 아예 히로히토 일왕(천황)에 대해 불기소 방침을 내렸다. 당시 소련은 이미 만주와 북한을 점령한 상황이었다. 맥아더는 일본 군국주의의 2차세계대전 전범들을 축출한 반면 조선에서는 친일분자들을 대거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하는 역사적 비극을 초래했다. 1945년 9월 14일 미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은 기존 일제의 경찰기구를 행정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은 당시 조선을 강압통치하기 위해 이를 받아들여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을 해임하고도 행정고문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남겨두고, 일제 통치기구를 이용했다. 반면에 임시정부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등 민족자주 세력은 억누르거나 해체시켰다. 그러는 사이 미국과 가까운 이승만은 순조롭게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미국의 일제에 대한 면죄부와 조선의 통치기구 승계로 일본은 조선 합병·강제동원(1910~1945년)은 물론 ▶중일전쟁(1937~1945) ▶731부대의 생체실험 ▶위안부 강제동원 ▶태평양전쟁(1941~1945년) 등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하고 있다. 제77주년 광복절인 지난 15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비롯해 주요 각료와 정치인들은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하거나 참배해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반발을 샀다. 이는 히로히토 일왕이 1945년 8월 15일 발표한 ‘대동아전쟁종결조서`의 역사적 연장선상에서 예견된 일이다. 당시 일왕이 조서 발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로서 반성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았고,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세계평화 선언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앞으로 힘을 키워 또다시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이같은 일왕의 숨겨진 야망은 일본에서 최장기간 총리를 지낸 아베 등 극우 정치인들로 이어져 내려온다. 지난 7월 8일 자국민에게 저격된 아베는 자위대에 불리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등 생전에 군국주의 망령을 되살리려 했다. 개정의 핵심은 일본 헌법 9조다.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9조에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재무장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전쟁·무력행사의 영구적 포기, 전력(戰力) 불보유`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일본이 실질적 군대인 자위대를 보유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주장이 계속 나왔기 때문에 아베는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 자위대의 존재를 헌법에 명기하겠다며 개헌을 적극 추진해 왔다. 무엇보다 우리는 평화헌법 개정을 빌미로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일어서려는 현재 일본의 야욕을 직시하고, 역사적으로 응당한 대처를 현명하게 해나가야 `8·15 광복`을 완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