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의 황금 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해바라기의 웃는 모습보다 붉은 슬픔이 전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러시아가 이 전쟁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들 수 있다. 우크라이나 국기는 위쪽 절반은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아래쪽 절반은 땅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단순하게 구성돼 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있는 노란 해바라기와 밀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색상과 형태가 너무 단순하지만 천지(天地)와 우크라이나를 표상하는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우크라이나는 밀과 옥수수, 해바라기씨유(油) 등의 최대 수출국이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해바라기씨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러시아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항구가 막히면서 수출이 급감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가 식량안보에 위협을 받고 있다.
해바라기는 우크라이나의 나라꽃(국화)이자 국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우크라이나 국민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나라와 조국을 상징하는 `태양의 꽃`이라 할 수 있다.
해바라기 외에는 이름에 `해`자가 들어간 꽃은 별로 없다. 영어로는 아예 `태양의 꽃(sunflower)`이다. 어쩌면 해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우크라이나의 국화(國花)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일편단심 조국을 바라보며 뜨겁게 사랑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해바라기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일부 사전과 인터넷 정보를 검색해 보면 아직까지 러시아 국화(國花)가 해바라기로 나온다. 사실이 아니다. 러시아 연방공화국 정부는 1998년 3월 옛 소련의 국화인 해바라기를 폐기하고 캐모마일을 러시아의 공식 국화로 정한다고 공표했다.
우크라이나 나라꽃 해바라기가 전쟁터의 꽃으로 주목받으면서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도시에서 지난 2월말 찍힌 짧은 동영상이 전 세계에 퍼져 눈길을 끌었다. 한 할머니가 총을 든 채 순찰 중인 러시아 군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다음과 같이 호통을 친다.
“러시아 놈이 왜 여기 있어? 너희는 점령군이다. 파시스트다. 주머니에 해바라기씨나 넣어 두어라. 너희들 모두가 여기서 쓰러질 때 그 씨앗들이 해바라기로 자라날 것이다."
할머니는 전쟁터에서 왜 해바라기를 꺼냈을까. 소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군인에게 사살 당할 수도 있지만 되레 호통치는 할머니에게 세계인들의 감탄사와 응원이 쏟아졌다. 평소 국기와 국화에 나타나 있는 해바라기를 숭상하는 우크라이나의 국민적 정서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아직도 할머니의 절규가 너무나 생생하게 들려온다. 싹이 트기 시작하는 올해 봄 할머니의 이 영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1922년 발표한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라는 시가 떠올랐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우며,/추억과 욕망을 뒤섞고,/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생명을 길러주었다.“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서는 양측 모두 900여만명의 군인이 죽었고 700여만명이 실종됐으며, 2천200여만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혜영 인하대 영문학 교수는 "숫자로는 아무리 길게 늘어놓아도 전쟁의 참상을 실감할 수 없다. `사상자`나 `부상자`와 같은 추상적 용어로도 공포에 떨며 죽어갔을 사람들의 애타는 심정을 그릴 수 없다. 현대전이란 오랜 세월 이어온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터전은 무너뜨리고, 그 상처는 수치와 도표, 추상적인 개념과 전문화된 용어로 열거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의 참상을 실감하려면 경제학이나 정치학이 아닌 감정과 정서가 살아있는 사람들의 말, 바로 문학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처럼 새싹이 돋아나고 이 땅의 만물이 생장하는 4월은 현대인들에게는 가장 잔인한 달일지 모른다. 1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그 전쟁의 상흔과 황무지(폐허)에서 오는 황량함과 공허함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데 4월은 아무 일 없었듯이 이 땅에 돋아난 새싹의 생장을 재촉하는 봄비를 내리니 말이다.
사람들은 황폐와 절망, 공허 속에서 다시는 싹 틔우길 원치 않는데 봄과 자연은 어김없이 새 생명의 탄생을 되풀이하니 이 얼마나 잔인한가! 하지만 생물은 계속 생명을 이어 나가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너희는 아래로 쓰러지지만 씨앗은 (위로) 해바라기로 자라날 것"이라는 우크라이나 할머니의 은유적 호통은 우크라이나는 너희들이 아무리 짓밟아도 어디에나 씨앗이 뿌려지는 한 해바라기로 생장하듯 새 생명은 탄생하고 성장할 것이라는 신념에 가득 찬 선언으로 다가왔다. 전쟁의 잔인함에 그친 엘리어트의 `황무지`에 생명의 빛(태양)을 받은 `해바라기`가 새로운 희망을 심는 순간이다.
필자는 최근 끝없이 펼쳐지는 우크라이나의 드넓은 해바라기 평원을 무대로 제작된 걸작 `Sunflower`(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다. 1970년 상영된 Sunflower(해바라기)는 명배우 소피아 로렌과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주연한 이탈리아 영화다. 독자 여러분이 이 영화의 남녀 주인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영화를 끝까지 보고 결정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역사는 반복된다. 1970년 상영된 영화 `해바라기`는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그렸다. 영화 속 이곳은 전쟁 중 숨진 군인과 민간인들이 집단으로 묻혀 있는 곳이다. 2차 대전 중 400여만명의 군인이 드넓은 해바라기 평원에서 혈전을 벌였고, 전쟁으로 희생된 우크라이나인은 700여만명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다.
남편 안토니오(남주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신혼초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에게 동조한 무솔리니에게 징집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떠났으나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 지오바나(여주연 소피아 로렌)는 남편 사진 한 장만 들고 홀로 전쟁터로 가서 현지에서 백방으로 남편을 찾아 헤맨다.
"독일군은 저 해바라기밭 아래 포로들이 직접 자기 무덤을 파게 했어요. 아마 당신 남편도 저 해바라기 아래 묻혔을 겁니다." 아내는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서 이런 말을 듣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군인들의 붉은 피 위에 해바라기가 자란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실제로 핀 붉은 해바라기가 더욱 슬픈 꽃으로 보였다.
영화 속 이 장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군인에게 한 할머니가 `해바라기 씨앗이나 넣어 두고 쓰러져라`는 메시지로 호통쳤던 영상과 오버랩된다. 붉은 피가 섞여 있는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황금 들녘에는 영화처럼 아직도 해바라기가 피고 있다.
1932~1933년 스탈린 치하의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약 3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참사로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독립한 러시아를 철천지원수로 여겨왔으며, 이번 러시아 침공에도 굴복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항전하고 있다.
15세 이상 관람가인 영화 `해바라기`는 필링박스(https://feelingbox.tistory.com)에서 한글자막과 함께 무료로 볼 수 있다. 필링박스에서는 세계적 명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한 영화 ‘카사블랑카’를 비롯해 세계적 고전 명작 등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애잔하고 구슬픈 해바라기 주제곡 `Loss of love`(사랑의 상실)를 들으며 노란꽃 물결치는 해바라기 평원을 보고 있노라면 바람에 하늘거리는 해바라기 꽃말 ‘일편단심’ ‘애모’ `기다림` 태양을 그리워하는 ‘사랑의 꽃’이 그려지리라.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