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그러나 피보다 진한 게 정치적 이념과 이데올로기인 것 같다. 오히려 종교는 달라도 크게 문제 되거나 서로 부딪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정치색깔이 다르면 서로가 옳다며 끝까지 싸우려 한다.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되다가 끝내 적이 되어 결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싸움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을 서로 문제 삼아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은 서로의 입장이나 개념을 분명히 하지 않고 목소리부터 높이다 보니 감정싸움이나 말싸움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등 정치적 용어를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거나 분명하지 않게 사용하기 쉽다. 이들 용어는 애매모호하다. 즉, 보수는 무엇을 어디까지 지키고 유지하는 것인지 그 범위와 경계가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시대적으로 앞선 국가에서 사용하는 보수는 후진국의 진보보다 더 진보적일 수 있다. 지금의 보수가 과거의 진보보다 훨씬 진보적일 수 있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화자(話者)는 물론 시대(시간)와 장소(공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특히 학자들조차 보수와 진보, 급진 등 정치적 용어를 혼동해서 사용하고 있으니 일반인들은 말싸움과 논쟁으로 소모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대다수 정치학자들은 보수의 반대를 진보로 주장한다. 여기서부터 정치적 이념, 나아가 이데올로기 논쟁이 시작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수`의 반대말은 `진보`가 아니라 `급진`이다. `진보`의 반대말은 `보수`가 아니라 `퇴보`(퇴행)다. 지금까지 이들 개념부터 잘못 정립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의 혼선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진보와 보수가 잘못 흘러왔다. 보수(保守)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는 입장이나 태도를 말한다. 보수의 반대인 급진(急進)은 목적이나 이상(理想) 따위를 급히 실현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변화의 속도에 따라 `반동(反動)-보수-온건-급진`으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바라는 태도에 따라 `진보와 퇴보`로 각각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를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파의 가장 끝 지점인 반동주의(反動主義)는 진보적이거나 발전적인 움직임을 반대해 강압적으로 가로막는 입장으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반동·회귀`의 위치에 서 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으로 내려오는 북한의 `김씨왕조`가 반동주의에 포함된다. 보수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 유지하는 입장을 취한다. 자유주의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이데올로기로 개인이 정치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힘에 의한 억압이나 부담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급진주의(radicalism)는 현존하는 정치체제나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온건한 개량·수정주의를 부정하는 주의다. 정치적 행동과 사상에 있어서 극단적인 좌파의 행동과 사상을 말한다.필자는 리버럴리즘(liberalism), 즉 `진보적 자유주의(진보하는 보수)`를 신봉한다. ▶진보는 좌파의 전유물 아니다 "우리나라 진보의 경우 깜빡이는 좌측으로 넣고 차는 우측으로 몰았다"는 주장은 `좌파=진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진보와 좌파를 동일시하고, 우파에는 진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좌파가 진보를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가져가 효과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선동과 선전에 강한 좌파는 보수를 권력을 유지하는 `수구골통`으로 몰아간 반면 자신들은 사회와 역사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하는 진보로 미화시켰다. 어느새 진보의 반대가 보수가 됐다. 보수에도 진보에도 속하지 않는 일부 중도층은 `보수골통`으로 분류되기 싫어 진보 쪽으로 기우는 경향도 있었을 것이고, 진취적으로 멋지게 보이는 진보가 득세한 것은 당연하다.민주주의에도 개인의 자유를 앞세운 자유민주주의와 정치·경제적 평등을 강조한 사회민주주의가 있듯이 진보는 좌파·우파 양쪽에 다 있다. 이를테면 진보는 좌파·우파로 구분해서는 안된다. 진보의 사전적 반대어는 보수·퇴보로 나온다. 그동안 우리는 진보의 사전적 반대말로 단순히 보수란 말로 거의 사용해 왔기 때문에 이같은 혼돈이 초래됐고, 좌파는 자기 진영에 유리한 대로 진보를 멋대로 이용했다. 좌파가 진보로서 변화와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각인해 놓은 결과 보수·우파는 자연스레 퇴보의 집단으로 매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수·우파가 역사의 죄인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좌파는 그럴듯한 진보를 앞세워 보수·우파를 잠식해 들어갔다. 이제는 좌파의 전유물처럼 돼 있는 진보를 우파(보수) 쪽으로 되찾아 와야 한다. 진보의 반대는 퇴보다. 따라서 진보의 이념적 스펙트럼의 반대를 퇴보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리라.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의 저자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등 진보적 학자들이 2019년부터 `진보에 대한 담론`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좌파의 진보 독점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최장집 명예교수는 "한국의 진보파가 이해하는 직접민주주의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뿐 전체주의와 동일한 정치 체제”라며 “진보파들은 제도권 밖 시민사회를 조직·동원하는데 사활을 걸었고, 이러한 흐름이 문재인 정부를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민주화를 주도했던 운동세력들의 다수가 ‘운동론적 민주주의관’의 경향을 보인다.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선과 악 등의 대립 항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념의 형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며 "운동권 학생들이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정치계급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전부터 `교조적 진보`의 틀에 갇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이비 좌파`의 진보의 민낯을 보지 않았는가! 최 교수가 지적했듯이 민주와 진보의 탈을 쓴 `사이비 좌파`는 진보와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퇴보시키는 전체주의식 체제로 흐르는 만큼 뼈아픈 자기반성이 요구된다. 자유민주주의보다 진보적으로 보였던 사회주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이비 좌파·진보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 동유럽과 구소련의 사회주의 체제 붕괴를 눈으로 목격하고도 말이다. 교조적 이데올로기와 순수한 이념을 구분하지 못했던 1980년대 학생운동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공산주의자`라고 발언해 재판에 넘겨졌으나 지난 9월 무죄 취지의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을 받은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1980년대 의식화 학습을 통해 젊은이들을 소위 뿅가게 만든 공산주의 이론은 ‘자유민주주의는 가짜’라는 것”이라 말했다. 고 전 이사장은 "공산주의는 자유민주주의를 놓고, 소수 부르주아가 다수 농민에 대해 착취하는 구조로 본다”며 “그래서 다수 농민이 소수 부르주아를 다스리는 세계가 바로 공산주의 이론”이라고 단정했다. 고 전 이사장은 공산주의 이론이 학생 운동권에 팽배했던 것과 관련해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은 권위주의 정부(군부독재)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달했다"며 "군사정권 하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좌절감이 좌익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로 흘러간 감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해 젊은이들은 공산혁명만이 길이라 생각했다"며 "전두환 군사정권을 타도를 위해 젊은이들은 차선으로 공산주의를 택한 것"이라고 강조했다.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인류의 공상적(空想的)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지 진보의 산물이나 혁명의 결과물이 아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했는데도 사이비 좌파·진보주의자는 이에 승복하지 않는다. 다원주의 시대에 역행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내걸고 일인 일당 수령 독재를 펼치고 있는 북한을 보라. 공산주의는 수천만 농민들이 똑같이 주권을 가질 수 없다. 노동자·농민들의 주권을 중앙 공산당에 위임해 결국 주권은 중앙 공산당이 가진다. 나아가 공산당원들 역시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이들은 공산당 중앙위원에게, 중앙위원은 1인 수령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피라미드 구조가 바로 북한 독재체제의 실체다. 수령 1인 독재 체제는 마치 500년 `이씨조선`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김씨왕조`(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를 고착시켰다. 그래도 이씨조선은 왕에게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사간원(司諫院)은 물론 목숨걸고 임금에게 주청한 사림(士林)과 유생(선비)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어떠한가. 노동당 고위간부들이 태양 같은 어버이 수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심스레 말하는 태도는 왕조시대보다 더한 신격화(神格化)가 아닌가? 이게 사회주의(공산주의) 진보인가! 진보는커녕 역사의 퇴보이고, 역사의 반동(反動)이다. 주사파나 친북·종북을 외치는 무리들은 이같은 북한의 `김씨왕조`가 무엇이 좋아서 아직도 찬양하고 있는가? 이들에게 그렇게 북한이 좋으면 북한에 가서 살라고 하면 과연 몇 명이나 자원할까? 사이비 좌파·진보가 하루속히 착각과 환상에서 깨어나기를 촉구한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탈북자 출신의 박연미(27) 북한 인권운동가는 2014년 10월 아일랜드에서 열린 `세계 젊은 지도자 회의`(One Young World Summit) 연설을 통해 북한 독재 정권의 인권 참상을 고발, 세계적 주목을 받은 바 있다.(유튜브 시청 `탈북 미녀 박연미의 가슴 뭉클한 연설` 검색) 박연미 탈북자는 이 연설에서 "북한에서는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 바보라서 그런 걸 까요? 70년간 지속된 억압 속에도 왜 한 번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제 답변은 만약 자신이 노예라는 걸 모른다면, 만약 자신이 고립되어 있고 억압을 받고 있는 것도 모른다면 어떻게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을까요?"라고 되물었다.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