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을 대표하는 과일인 참외는 전국에서 성주군이 대표적인 재배지로 널리 알려져 있기에 흔히들 성주를 ‘참외의 고장’이라 한다. 그러나 ‘성씨의 고장’이라는 명칭 또한 어울리는 브랜드이다. 전국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현상으로 성주 본향의 성씨가 많기에 어울리는 명칭이다.
그중에서도 이(李)씨의 본관이 여섯개나 되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성씨다. 성주육이(星州六李)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성주육이는 광평이씨, 경산이씨, 벽진이씨, 성주이씨, 성산이씨, 가리이씨를 말한다.
성주이씨가 타문중과 다른 점은 특이하게도 예악(禮樂)과 문장에 뛰어난 선조들이 많다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1천여년간 훌륭한 선조들이 수없이 많은 유문(遺文)과 시문(詩文)을 남긴 명문대가이다.
공자는 아들이자 제자인 공리(孔鯉)에게 요즘 시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다. 공리가 하지 않고 있다고 대답하자, 공자는 시를 모르면 높은 담장에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높은 담장에 얼굴을 마주 대하면 앞이 캄캄하다. 아무것도 안보이고 돌덩이만 보이는 것이다. 공자가 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공자는 『시경(詩經)』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제자들을 꾸짖으며 왜 시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시는 마음으로 느낀 것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게 한다. 둘째, 시는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해 준다. 셋째, 시는 개인이 어떻게 세상과 조화롭게 소통하며 방종과 타락에 이르지 않을 수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넷째, 시는 온갖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카타르시스(cathars) 작용을 한다. 다섯째, 시는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다. 여섯째, 시를 읽으면 새, 짐승, 풀, 나무 등의 생리와 명칭을 알게 해 주는 덤도 있다.
이게 바로 공자의 시론(詩論)이다. 이러한 인문에 관한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지적이 바로 공자 시론의 뼈대다. 그러니까 시는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회, 나아가 사람과 자연의 소통을 시켜 주는 중요한 매개자라는 이야기다. 공자는 『시경』을 일러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다. 사무사는 세속에 찌든 인간들을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힘이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주 만물의 소통을 시켜 주는 중요한 매개자 역할을 한 성주이씨(星州李氏), 이 가문 선조들의 학문은 아마도 현대사회의 세속에 찌든 인간들을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성주이씨 유래
신라 재상 시조공 이순유(李純由)는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했다. 그러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지금의 경북 성주읍 경산동에 숨어 살았다. 이를 안 고려 태조는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같은 백성”이라며 호장 벼슬을 내린다. 후손들이 대대로 호장을 맡아오면서 성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경주이씨로부터 갈라져 천년을 넘긴 성주이씨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시조공의 11대손 성주호장 이장경(李長庚)은 성주이씨의 중시조다. 그의 다섯 아들은 밀직공파 이백년, 참지공파 이천년, 시중공파 이만년, 유수공파 이억년, 문열공파 이조년이다. 그의 아들 다섯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이장경을 경산부원군에 봉했다. 손자 중 이승경은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웠다. 손자 이승경의 출세로 원나라 황제로부터 그의 조부 이장경이 농서군공에 추봉되었기에 성주이씨를 농서이씨라고도 한다.
다정가(多情歌)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백화헌시
주섬주섬 이 꽃 저 꽃 심을 것 없다
백화헌엔 백 가지 꽃이 차야 멋인가
매화꽃 국화꽃이 맑고 좋은데
울긋불긋 다른 꽃 부질없구나
작자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1269~1343)은 농서군공 이장경의 막내아들로 충렬왕 11년(1285) 17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벼슬은 판서를 거쳐 정당문학, 대제학에 이르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퇴계 이황은 공의 인품을 “고려 오백년의 제일인자”라고 칭송했으며, 익재 이제현도 묘지명을 통해 극찬했다.
시문으로 한국문학사를 크게 빛냈으며, 특히 다정가 시조가 유명하다. 이 시조는 충혜왕의 방탕함을 직간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우의법을 써서 왕에 대한 지극한 충성심을 나타낸 것이다. 1341년 성산군으로 사직을 청하였다. 경북 고령군은 공을 기리는 전국백일장을 해마다 4월에 개최하고 있다.
승사(僧舍)
산은 남북으로 오솔길이 갈라지고
송화는 비에 젖어 분분히 떨어지누나
도인은 물을 길어 띠집으로 들어가고
한 줄기 푸른 연기는 흰 구름을 물들이누나
추회(秋回)
하늘 끝에 가을은 왔으나 돌아가지 못하고
외로운 성의 지는 해에 슬픔 이기지 못하네
일찍이 대신으로 문관 자리에 있었건만
지금은 강호에서 낚싯대 추스르니
몸은 근심과 참소로 크게 여위었어도
시는 해방된 생각들 속에서 신기롭구나
진주와 율무는 끝내 구분될 것이나
단지 권세무리들 다스림이 어려운 게 두렵다
작자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1347~1392)은 밀직사사 이백년의 증손, 태재공 이인기의 손자, 가정공 이원구의 장남으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현(申賢)과 이색(李穡)에게 배웠으며, 공민왕 11년 문과에 급제했다. 도은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충신이며 성리학을 완성한 학자로서 고려말 삼은(三隱·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원래 삼은이라면 이색, 정몽주와 함께 야은 길재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 사이에 도은의 절의를 기리며, 야은 대신 도은을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색, 정몽주, 이숭인 세 사람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 죽임을 당한 반면 야은 길재는 천수를 다하고 죽었으니 절의(節義) 면에서 보면 고려의 삼은은 이색, 정몽주, 이숭인 세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도은은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정도전이 보낸 그의 심복 황거정에 의해 유배지인 고향 경산(京山)에서 살해당했다. 정도전이 그의 심복인 황거정을 도은이 귀양 간 고을의 수령으로 보내어 매일같이 잡아다가 매질하게 하였다. 하루에도 곤장 수백대를 때리고는 묶어서 말 위에 얹어 달리게 하여 드디어 인적이 없는 먼 곳에서 상처가 짓물러 죽게 하였다.
스승 이색은 이숭인을 가리켜 “해동 선비로는 겨룰 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빼어난 문장가였다. 저서로는 태종의 명으로 권근과 변계량이 조선조 최초의 금속활자본(1403년)으로 간행된 이 있으며, 그 후의 목판본은 보물 제1465호로 지정됐다. 도은을 배출해낸 성주군은 최근 도은의 영정과 도은집 등을 간직하고 있는 청휘당(성주군 수륜면 신파리)을 40억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또한 청휘당을 경유하는 가야산 선비길도 조성했다.
오로시(烏鷺詩)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작자 형재 이직(亨齋 李稷·1362~1431)은 이조년의 증손이며, 대재학 이인민의 장자로서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고려 우왕 3년(1377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제학을 거쳐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이조판서에 오르고 판사평부사 때 우리나라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태종 때 성산부원군에 봉해졌고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으며,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시문을 즐겨 ‘오로시’와 후손교육을 위한 ‘계자손시’ 등을 수록한 을 남겼다. 점필재 김종직은 “시문이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힘이 있다”고 예찬했다.
선시(扇詩)
군사를 거느리고 별이 빛나는 밤에 강을 건너니
조선나라 편치 않다는 말 확실하구나.
명나라 임금은 날마다 승전보를 기다리고
이 사람은 밤마다 즐기는 술도 끊었노라.
봄이 오매 하늘 운기 보고 마음 더욱 씩씩해
내가 가는 이 걸음에 왜적들의 뼈가 서늘하리라.
웃으며 환담하고 장담 중에도 승산이 없을까보냐
꿈에도 정마 탄 것 잊지 않노라.
이 시의 작자 이여송(李如松·1549~1598)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황제가 왜적정벌의 명을 내려 원병의 총책으로 조선에 파견됐다. 왜적을 소탕하고 우리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명(明) 조정은 사후에 소보영원백(少保寧遠伯)을 하사했다. 이 시는 개선환국하면서 당시 영의정 서애 류성룡에게 금부채(국보 제414호)에 써 준 작품으로 서애사당(西厓祠堂)에 전시되고 있다.
이여송은 참지공 이천년(李千年)의 7세손으로 이천년은 고려 원종 때의 문신이었던 이조년(李兆年)의 친형이다. 놀랍게도 조상을 거슬러 가면 고려의 문벌귀족까지 닿는다. 이여송의 본관은 성주이씨가 된다.
이여송은 조선족이었으며, 이여송의 부친은 요동총병관을 지낸 이성량이다. 이성량의 고조부인 이영은 조선에서 명으로 이주해 요동에서 살았으나, 집안은 이성량의 아버지 때 몰락해 살림이 매우 빈곤했다. 이성량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북경으로 가 말단 관리가 되었다. 이후 이성량은 무예와 병서 읽기에 진력하여 병법에 통함으로써 공을 세워 요동험산참장이 되었다가 요동의 대소 반란을 평정해 요동총병에 올랐다.
이성량은 91세까지 장수하다 죽었는데, 그의 아들 가운데 여송, 여백, 여정, 여장, 여매는 모두 총병관을 지냈다. 이여송은 이성량의 큰 아들로서 학문도 꽤 익혔고 아버지를 따라 군무에 오랫동안 종사했기 때문에 병법에 밝은 데다 기골이 엄청 장대했으며 매우 용맹했다. 이여송은 닝샤(寧夏)에서 일어난 몽골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장수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종(명 14대)의 명에 따라 조선 파병군의 사령관으로 동생 이여백 등과 4만3천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평양성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여 평양성을 수복하고 왜군의 기세를 눌렀으나, 왜군에 대한 승리로 교만한 채 벽제관전투에 임했다가 왜군에게 대패하고 개성으로 물러섰다. 왜군이 행주전투에서 깨진 다음 한양을 비우고 남하하여 남해안 일대에 웅거하자 명에서는 이여송을 소환하고 유정에게 남아서 명군을 이끌게 했다. 그 후 1599년 토만이 요동을 침공하자 방어에 나섰던 이여송은 적의 매복에 걸려 전사하고 만다.
이여송은 조선 파병 당시 본관이 봉화금씨 성을 가진 여인과 동거하였다. 이여송이 명나라로 돌아가고 몇 달 뒤에 태어난 아들이 이천근(李天根)이다. 이들의 후손이 현재 거제도 장승포에 살고 있다. 이여송의 손자와 이여매의 손자 역시 훗날 조선에 정착했는데 이들도 농서이씨의 후손이다.
◆투금탄(投金灘)···형제의 우애 이야기
이조년(李兆年)이 형 이억년(李億年)과 길을 가다 황금 두 덩이를 주워 나누어 가졌다. 공암진(孔巖津)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다 아우 이조년이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 형이 이유를 묻자 “저는 평소 형님을 공경했는데 금덩이를 나눈 순간부터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라고 했다. 형도 황금보다 형제간의 우애를 소중하게 여긴 아우 말이 옳다고 말하고는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 이때부터 공암진을 투금탄(投金灘), 즉 ‘금을 던진 여울’이라 불리게 됐다.
투금탄 이야기는 초등학교 국정교과서에 실렸으며,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우장산공원 ‘문화의 광장’에 강서문인협회가 건립한 ‘다정가’ 시비와 함께 이 비(碑)가 서있고, 고령 매국정에도 작은 돌에 이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오늘날 황금 만능시대에 이 이야기는 값진 교훈이 되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성주이씨가 배출한 많은 인재들이 각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수원에서 국회의원을 여러번 지낸 이병희씨를 비롯해, 이용택(11·12대 국회의원), 이대순(국회의원·전 체신부장관), 이종율(전 정무제1장관), 이재식(청와대 수석비서관), 이학봉(안기부차장), 이해봉(대통령 행정비서관), 이건상(전 민정당 총무국장) 등이 정계에서 활동했다. 재계에서는 세방기업 회장 이의순씨, 신영섬유(주) 회장 이운일씨, 국도화학공업(주) 이삼열씨 등이다. 군에서는 이규동, 이규승, 이규광(전두환 전 대통령 처가), 이소동(육군대장 예편), 이희근(공군대장 예편) 등이 있다.
성주이씨 문열공파 24대손 종손인 이상승 칠곡군의원(지천·동명·가산)은 동명면 금암3리 문중 소유의 부지를 칠곡군에서 매입해 주민들을 위한 공영주차장으로 개설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등 주민복지와 지역발전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칠곡군 집성촌은 석적읍 포남2리, 왜관읍 아곡리·금남리, 동명면 금암3리(`동석전`)·송산리 등이다.
신연식 본지 북삼지국장 sys233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