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옛날의 역사책을 보든 제가 살아오는 동안에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지난달 30일 방송된 KBS2 공연에서 이같이 말한 나훈아의 직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2007년 비서실장으로 수행했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래 말이 떠오른다. "대통령 욕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 욕하는 것으로 주권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전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1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토교통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최근 화제가 된 나훈아의 `테스형` 일부 대목이 연주됐다.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김현미 장관에게 "부동산 정책으로 국민이 힘들다. `테스형` 가사가 우리 국민들을 위로하는 마음을 절절히 담고 있다. 들어보고 국민의 마음을 읽어달라"며 노래를 틀었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라는 부분이었다. 송 의원은 "왜 국민들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시대가 됐느냐"며 "정부가 20번 넘게 대책을 냈지만 국민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KBS2가 지난달 30일 방송한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이 끝난지 보름이 지났는데도 이같은 열풍이 계속되고 있다. 이는 15년 만에 이뤄진 `가황의 무대`에 그치지 않고 그가 코로나19 등으로 심신이 지친 국민에게 공영방송이라는 공론의 장에서 아무나 하기 힘든 메시지를 시원스레 내던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영방송을 비롯한 대다수 언론매체와 정치권 등 영향력 있는 곳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리 국민이 믿고 따를 만한 어른과 훌륭한 지도자가 없는 대한국민의 현실을 보여주어 일각에서는 나훈아를 차기 대통령 후보까지 거론하기도 했다. 나훈아의 사생활에 불만인 안티팬(anti fan) 등을 제외한 일반 국민의 정서와 민심을 이번에 하나로 크게 모은 국민 대통합의 주인공으로서 수많은 시청자들(최고 시청률 38%)의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대통령(大統領)은 글자 그대로 "국민을 크게(大) 통(統)합하는 영(領)도자"로 해석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연예인 가왕을 대통령감으로 떠올렸을까. 상당수 국민이 정쟁(政爭) 일변도로 치달으면서 입으로만 협치(協治)하는 오늘날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는 결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연예비평으로 명성이 높은 김용호 전 뉴시스 기자는 "요즘 나훈아에게 지나치게 열광하는데 그는 연예인으로서 대중에게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쇼로 보여준 것이다. 나훈아처럼 카리스마를 보여주면 그게 대통령의 덕목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나훈아가 대통령이 될 순 없다"고 지적했다. 김 전 기자는 "앞으로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나훈아를 따라하면 대권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나훈아 본인이 정치를 하면 안된다. 본인은 전혀 할 생각도 없겠지만 나훈아가 보여준 것은 대한민국의 영웅상(像)"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 사전행사로 열린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에 나훈아의 참여를 원했으나 그는 불참했다. 나훈아는 일정을 핑계로 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는 국가적으로 아무리 중요한 행사라도 자기가 내키지 않으면 가지 않는 `가왕`(歌王)의 카리스마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 연예계 스타 정치인은 고(故) 이주일 전 국회의원이다. 1992년 통일국민당 후보로 제14대 총선에 당선된 이주일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 1996년 1월 29일 "정치를 종합예술이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지만 코미디라는 생각 밖에 안 든다.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4년간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는 말을 남겼다. 코미디언답게 정치를 코미디에 비유한 그의 직설에서 정치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함께 앞으로 희망과 기대감마저 사라진다. 고(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정계 은퇴 후 남긴 "정치는 허업"(虛業·실속 없이 겉으로만 꾸며 놓은 사업)이라는 명언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나훈아는 정치의 허무한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가왕`·가황`(歌皇)이라는 국민의 극찬과 열광에 대해 영혼을 담은 노래와 카리스마 넘치는 쇼로 응답했고, 이번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무료공연으로 국민의 가황이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훈아는 가수이고 연예인이다. 공연은 어디까지나 공연에 불과하고 무대에서 벌이는 쇼다. 공연의 열풍은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많은 국민이 그의 공연에서 감동을 받았다면 우리 삶의 실제무대에서 그 감동을 펼쳐나가야 하리라. 이제 우리 차례다. 우리 각자가 실존적 삶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야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해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정의와 진실, 희망을 담아내는 소통과 공론의 공간 마련도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만 완전해질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그의 명언보다 덜 알려졌지만 그 의미는 통한다고 본다. 대중(大衆)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고, 사회 속에서는 정치적 지배가 불가피하다. 그래서 대의민주주의 꽃인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등을 충분히 검증해 잘 뽑아야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국민을 위해 바르게 정치하는지 함께 감시해야 한다. 민주주의국가 국민이라면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경고를 늘 명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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