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기록·유적 많으나 정부는 무관심 제주도보다 훨씬 가까이 있는 대마도. 일본 영토이지만 우리나라 문화와 숨결이 배어 있다. 아니, 역사상 대한민국 땅으로 당연히 돌려받아야 하는데 정부와 정치권은 아예 관심조차 없다. 역사를 왜곡해 가면서까지 독도를 침탈해 가려고 하는 일본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망령을 부리면 우리는 대마도를 당장 반환하라고 응징해도 시원찮은 판국이 아닌가! 1402년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지도` 등 많은 고지도에는 대마도와 제주도가 `조선 남해안의 두 축`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 세종실록도 "대마도는 본시 계림에 속한 우리나라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을 뿐"이라고 적었다. 계림은 신라의 별칭으로 경상도를 가리킨다. 일본은 독일에서 보관 중인 고지도 `삼국접양지도`를 증거자료로 앞세워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오가사와라` 섬을 돌려받았다. 당시 사용한 삼국접양지도를 보면 일본 영토는 녹색으로, 조선은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대마도도 제주도와 조선과 똑같이 노란색이어서 한반도 영토가 아닐 수 없다. 일본 사료인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는 "`대마도주가 조선 임금의 인장을 받아 국사를 처리하고, 해마다 콩 50석, 쌀 50석을 받고 있다`며 대마도가 분명 조선에 예속된 섬"이라고 적고 있다. 이 책자는 1869년 일본 외무성이 사다 하쿠보 등 고위 공직자 2명을 대마도 주민으로 가장해 조선에 파견한 후 쓰여진 보고서이다. 당시 이들은 조선 정세를 정탐하고 독도와 대마도가 조선의 관할 하에 있는지 등 13가지 항목을 은밀히 조사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는 역사적 기록은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근대국가 재편과정에서 대마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당시 조선은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고 쇄국정책으로 열강의 개방 요구에 맞서다가 대마도를 일본에 내어 주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8월 18일 정부 수립 후 3일 만에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대마도를 반환하라"고 촉구했다. 그후 60여차례나 대마도 반환을 일본에 요구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마도에는 대마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리는 유적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유적을 몰래 없애고 오히려 남한 전체를 감시할 수 있는 레이더 기지를 대마도에 설치하는 등 대마도를 요새화하고 있다. ▶한국전망대 대마도 최북단에 위치한 한국전망대는 한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이다. 한국까지 휴대폰이 터지는 곳도 있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부산이 보인다고 한다. 이곳 팔각정은 파고다 공원의 정자를 모델로 설계 단계부터 철저히 한국인의 의견을 반영했다. 우리나라 자재와 건축 양식으로 1997년 건립했다. ▶`미우다` 해수욕장 `미우다` 해수욕장은 한국인이 선정한 일본 해안 100선에 드는 명소이다. 에메랄드 빛깔의 잔잔한 바다와 작은 섬들, 깨끗한 바닷물은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한다. ▶`와타즈미` 신사 `와타즈미` 신사는 대마도의 대표적인 신사로 바다의 신을 모신 곳이다. 전통적인 일본의 문 `도리이`가 독특하게 바다에 2개, 육지에 3개가 서있다. 특히 이 문의 방향이 서쪽 바다, 곧 한국 쪽을 향하고 있는 대마도 신사들의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마도 신사가 한반도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는 조선왕조 고종 황제의 딸인 덕혜옹주와 대마도주 양아들의 결혼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조선 왕실에 일본인의 핏줄을 섞어야 한다"는 일본의 정략에 의한 강제결혼이었다. 덕혜옹주는 고국을 그리다 정신병에 걸려 1961년 귀국한 후 1989년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었다. ▶`에보시타케` 전망대 `에보시타케` 전망대에 오르면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릴 만큼 빼어난 아소만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사면(四面)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몇 겹의 산과 바다 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은 저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 등 위대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590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예측하고 조정에 대책마련을 건의했다. 그러나 당시 집권세력이 동인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왜군은 요새 같은 대마도 아소만에서 조선 침략을 위해 맹훈련을 한 후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일본은 아직도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마도는 일본의 해양전진기지가 포진되어 있는 섬이다. 이에 맞서 우리도 대마도와 가장 가까운 한반도 남단 `국도항`을 시급히 개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도항을 비롯해 11곳의 국가관리 연안항을 해양전진기지로 구축해 외침(外侵)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를 망각하면 잘못된 역사는 되풀이된다. 우리 정부와 여·야도 과거 조선의 동인·서인처럼 싸우기만 하면 대마도를 되찾기는커녕 일본에게 독도까지 빼앗길 수 있다. 대마도=글·촬영 이성원 편집국장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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