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산면 죽전리 출토 유물로는 북삼읍 율리에서 출토된 간석기와 민무늬 토기 편을 비롯하여 지천면 창평리 일대에서 수습된 민무늬 토기 편과 홈자귀 등 다양하다. 윤용진(尹容鎭)은 석적읍 중리에서 민무늬 토기 편 여러 점의 발굴을 보고한 바 있고, 1988년 채억곤(蔡億坤)은 기산면 죽전리 일대에서 여러 종류의 화살촉, 예리하게 다듬어진 돌도끼, 석검(石劍) 파편, 돌창, 여러 개의 그물추, 그리고 청동 방울 등을 수습하였다. 이러한 석기 제작의 다양한 기술은 청동기 시대의 발전상을 보여 주며, 일부의 화살촉에는 슴베(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뾰족한 부분)도 보여 오랜 세월 동안 청동기 문화가 변화·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석적읍 중리와 기산면 죽전리는 모두 낙동강과 가까운 지역의 구릉 지대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환경에 비교적 잘 부합하는 곳이다. ◆지천면 창평리 선돌 유적으로는 지천면 창평리의 선돌이 대표적이다. 이 선돌[입석(立石)]은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한 형태로 멘히르(Menhir)라고도 한다. 높이가 4.5m, 밑 부분 둘레가 약 2m 가량이 되어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 선돌의 동쪽 주변을 개간 할 당시에 민무늬 토기의 파편과 수점의 간석기가 발견되었다. 이 선돌은 주변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의 내용과 당시의 역사적 사실(史實) 등을 고려 할 때 청동기·초기 철기 시대에 세워진 것이 분명하다. 선돌은 부족 간 경계의 표시나 전승(戰勝)의 기념, 또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액운(厄運)을 막아주는 신앙의 대상물로 세워지는 것이 보통이다. 창평리 선돌의 입석 동기를 풍수지리나 풍수도참설적인 의미로 풀어보려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나라에 풍수지리는 통일 신라 말에 전래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시도는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이 선돌은 당시 군장 국가(君長國家) 간의 경계의 표시나 전승(戰勝)의 기념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선돌의 하부에는 세로로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통일 신라 말기에 번창한 정토 신앙[淨土信仰: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가 주재(主宰)하는 정토(淨土)의 존재를 믿고 정토를 실현하거나, 본인이 사후(死後)에 정토에 왕생(往生)하기를 기원하는 신앙]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는 통일 신라 말기∼고려 초기에 주민들이 이 글귀를 새겨, 점차 이를 민중 불교적인 미륵 신앙(彌勒信仰)의 대상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여, 선돌의 의미가 종교적 신앙의 대상물로 변화된 것으로 짐작된다(경상북도 기념물 제 29호). 다음으로 우리 고장의 여러 지역에서는 고인돌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형태는 크게 북방식인 탁자식과 남방식인 바둑판식으로 나뉘는데, 우리 고장의 고인돌은 대부분 남방식인 바둑판식이 주류이다. 고인돌 밑에는 석관(石棺)이 있고, 그 내부에는 시신과 함께 부장품(副葬品)이 매장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약목면 복성리에 20여 기, 지천면 신리에 6기, 왜관읍 매원리에 3기, 석전리에 8기, 석적읍 남율리에 30여 기, 중리에 2기, 동명면 금암리에 5기, 봉암리에 2기, 기성리에 2기 등이 있다. 고인돌의 대부분은 이미 도굴되었고, 그 중 일부에서 몇 점의 민무늬 토기 편과 돌칼 2개, 화살촉 10여 점이 출토될 정도이다. ◆약목면 복성리 고인돌 우리 고장에서 출토된 마제석검과 고인돌, 그리고 선돌은 당시 지배층이 가진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따라서 칠곡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지역마다 다양한 지배, 피지배 계층의 계급 사회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치권력이나 경제력에서 우세한 부족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고 믿는 선민사상(選民思想)을 가지고 주변의 약한 부족을 통합하거나 정복하고 공납(貢納)을 요구하였다. 이렇게 강력한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를 족장(族長)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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