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전쟁 한 달만에 인민군 최정예 주력부대는 주요 병참선인 경부선을 따라 추풍령을 넘어 8월 초 낙동강 경계 군사적 최고의 요충지인 왜관을 향해 질풍노도처럼 진격해 왔다. 또 한편의 주력부대는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를 넘어 상주를 공략했고, 이화령을 넘어온 적군은 영남 좌로인 안동을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사기가 충천한 김일성은 인민군 최전선 사령부 소백산 수안보까지 내려와 대구와 부산을 함락해 남조선 공산혁명을 완수하라는 긴급군사 특명을 인민군 全 전선에 하달하고 하루 빨리 적화통일을 완수해 조선 공산당 인민공화국 기념식을 일제 해방일인 8월 15일 부산에서 대대적으로 거행한다고 전선을 독려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야전군 사령관으로 용맹을 떨친 미8군 사령관 워커장군은 한미연합 전선이 좌충우돌 후퇴만 거듭하자, 우선 국군과 미군이 연합공조에 의한 지휘체계를 확립하고 분산된 전선의 정비가 다급하기에 천년요새인 강을 중심으로 방어 작전을 짜면서 8월 1일까지 낙동강을 무조건 건너라는 후퇴 명령을 내렸다. 대구사수의 보루인 왜관 낙동강은 국도와 철로가 동시에 관통하는 요충지로 마지막 부산을 지키는 최후의 관문이었다. 303고지 자고산을 중심으로 좌우에 328고지와 268 금무봉 삼총사 고지를 축으로 낙동강 천년요새를 방패 삼아 6·25전사에 길이 빛나는 `워커라인`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지축을 흔들며 쳐내려오는 적 탱크부대의 절박한 위기 속에서 게이장군은 지휘관으로 생애 최고 어렵고 괴로운 결정인 8월 3일 왜관 낙동강철교(현재 호국의다리) 폭파 명령을 내렸다. 천지가 진동하면서 피난민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강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다리 폭파와 함께 피난민들의 처참한 모습은 가혹한 민족적 시련이요, 비극이며 참담한 전선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야전군 지휘관을 긴급 소집한 워커사령관은 왜관 삼총사 고지 중심축으로 적을 막아내지 못하면 대구와 부산이 바로 함락될 것이며 우리 모두는 태평양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음을 주지시키고 “내 사전에 후퇴는 없다”면서 명령 없이 후퇴하는 자는 군법회의에 넘겨 강력히 처단한다고 경고했다. 미8군사령관 워커장군의 단호한 처신은 마치 사냥개와 같다고 해서 `불독`이라는 별명과 함께 최전선에서 계급장도 없이 알 철모만 쓰고 전장을 누볐던 장군은 세계2차대전에서 가장 용감하고 탁월한 야전군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날렸다. 국토의 1/10만 남은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 낙동강 워커라인 방어선을 축으로 대구와 부산을 사수한 삼총사 고지는 호국의 상징으로 성역화가 시작된 303자고산 고지를 중심축으로 강 하류 268 금무봉(금산공단 뒷산) 고지와 강 상류에 인접한 328고지(석적읍 포남리 뒷산) 좌우에 함께한 `삼형제봉` 고지라고도 한다. 왜관 303고지를 기준으로 268고지 낙동강 경계 따라 고령, 창녕, 마산에 이르는 남서부 전선은 미군 기계화 2개 사단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303고지에서 강 상류 328고지를 시작으로 유학산~다부동~팔공산~영천~포항까지의 북동전선은 산악전투에 강한 국군의 방어 영역이기에 백선엽 1사단장은 328고지와 함께 유학산 다부동 가산산성을 지키고 있었다. 한국군과 미군이 효율적 연합작전으로 긴밀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미군이 점령한 왜관 303고지와 국군이 지키던 석적 328고지 중간야전에 한국군 1개 소대와 미군 1개 소대가 함께 최초 한·미 합동 연락지휘소를 두었다. 미군은 다급하게 낙동강 다리를 폭파해 공포의 적 탱크와 주력부대를 저지했지만 인민군 주력은 왜관중심 강 하류인 상대적으로 강폭이 넓으면서 수심이 얕은 성주군 선남(船南)나루터를 시작으로 미군이 지키고 있던 268금무산 고지를 향해 총공세를 취해왔다. 8월 6일 268 금무산 고지를 첫 공격목표로 정하고, 왜관 금산공단 뒷산 고지를 향해 인민군 2개 대대 규모의 선발대가 야간에 개인용 소총과 무기를 머리에 이고 지고 강을 건너 왜관 낙산초등학교가 있는 뱃태(배터) 마을에 진격하면서 경부선 도로와 철도를 감지하는 전략요충지인 268고지를 빼앗겼다. 다음날 268고지를 향해 2개 연대 인민군 주력부대가 야밤을 틈타 대규모 도강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군은 적군이 강을 건너는 절정의 시간에 조명탄을 띄우고, 미 공군의 지원 폭격과 함께 포대의 집중 화력으로 2개 연대 후속부대를 괴멸시켰으며 강물은 피바다로 물들었다. 6·25전쟁 시작 후 미군은 최대 전공을 세우면서 국군의 사기충천과는 반대로 인민군 3사단은 작전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미군은 날이 밝자 적의 선발대에게 빼앗긴 268고지 탈환작전을 위하여 집중 공격하는 과정에서 미 야전사령부에 포가 떨어져 안타깝게 미1기갑 부사단장과 작전 참모장이 전투현장에서 전상 당하면서 268고지를 향해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많은 미군병사가 전사하고 부상자가 속출하여 한국군이 미군 보충병으로 긴급대체 투입되었다. 268고지 탈환을 위한 한·미 연합 합동작전에서 미군에 파견된 한국군들의 용감한 전투력과 남다른 조국애에 감동한 미군은 휴전협정 후에도 오늘까지 카투사(KATUSA)라는 미군 특수부대로 운용되고 있으며 카투사 탄생 명칭유래는 268고지 전투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인민군 주력부대의 8월 1차 총공세에서 가장 치열했던 268고지 전투 현장인 금무산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천상륙작전의 승리와 함께 고난의 피난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오니 담장을 지키던 감나무에는 빨간 감 홍시가 주렁주렁 달려있고 모내기 후 피난을 떠난 벼가 가을햇살에 누렇게 익어 전쟁의 상처를 아는지 모르는지 평화로운 농촌풍경 그대로였다고 한다. 그러나 금무산 계곡마다 많은 인민군과 미군의 시체가 뒤엉켜 죽어있었고, 산 정상 능선을 따라 방공호 속에는 전방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인민군이 살아있는 모습 같아 아이들은 혼비백산 마을로 도망쳤다는 얘기도 들었다. 다음날 다시 268고지에 올라가 총을 겨누고 있는 인민군을 향해 돌을 던져보아도 움직임이 없자 가까이 살펴보니 아무런 상처도 없이 죽어 있었기에 어린 마음에 귀신에 홀려 죽었다고들 떠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화공무기 사용영향이라고 마을 어른들은 입을 모았다. 매일 산에 올라 포탄과 실탄을 주워 엿장수에게 빨래 비누나 엿을 바꿔 먹었다. 어쩌다 재수가 좋은 날은 야전용 종합 음식물 박스(시레이션)를 발견하면 초콜릿, 비스킷, 껌, 통조림 등이 가득 들어있어 포식했다. 왜관읍 낙산리 C어르신은 은박지에 싸인 향긋한 봉지를 잠이 안 오는 마약이라고 해서 모두 내다 버렸는데 지금 알고 보니 커피였다고 했다. K어르신은 박격포 포탄을 디딜방아의 방아고와 같이 예뻐서 지게로 지고 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다. 실탄이나 포탄을 수집하는 과정에 폭발해 손발을 잃어버린 불구자도 많이 발생했다. 낙산리 B어르신은 상처에 바르는 연고를 먹는 젤리 과자인 줄 알고 먹어 배탈로 혼이 났다는 이야기도 했다. 금남리 P어르신은 전쟁이 끝나고 268 금무산 계곡에 땔나무를 하고자 낙엽을 갈퀴로 끌어 모으면 인골과 갈비뼈가 많이 걸려 나왔다고 했다. 사람들은 무서워 땔감을 구하러 가까운 금무산에 가지 못하고 꽁꽁 언 낙동강을 건너 멀리 성주 쪽으로 나무꾼들이 줄을 이었다고 했다. 8월, 1차 워커라인 총 공세에서 인민군은 268고지 점령에 실패하자 산악전투와 야간전투에 능한 적 주력부대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면서 화력이 약한 국군1사단 백선엽 장군이 지키던 328고지를 8월, 2차 공격목표로 정하고 북삼읍 마진(馬津)나루터에서 낙동강을 건너 석적읍 포남(浦南)나루터를 향해 야간에 수중다리를 놓으면서 치밀한 공격준비를 했다. 인민군은 북삼 마진, 일명 `말구리` 나루터를 시작으로 강물속 30cm 밑으로 가마니와 목책으로 수중보를 설치해 낮에는 미공군기의 폭격을 피하면서 적군은 포남나루터(낙동강세계평화문화대축전 기간 중 6·25전쟁 당시 낙동강 도하작전을 재현하는 낙동강전승행사 현장)를 건너 8월 14일 328고지를 향해 공격 해왔다. 8월 13일부터 12일간 정상 주인이 15번이나 바뀌는 치열했던 328고지 전투와 함께 다부동전투는 꺼져가는 조국의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살려낸 구국의 성지이기에 영광된 세계 전투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철원 백마고지 전투는 휴전회담 막바지에 38선을 경계로 단순한 영토 확장을 위한 치열한 전투였지만, 328고지 전투는 풍전등화 대한민국의 사활이 걸린 전투이자, 자유민주 수호를 위한 삼총사 고지(328·303·268고지)의 수문장 역할을 했기에 국가적 재조명 재평가가 이뤄져야 하겠다. 328고지를 중심으로 다부동 전투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매일 700명 이상 사상자가 발생하자 전투에 투입할 추가병력이 턱없이 모자라서 부대 인사장교는 징집영장도 없이 피난민을 강제동원해 군번 없는 군인을 보충병으로 투입했다. 전쟁 중에 국민을 강제동원하는 것은 위법이지만 국법도 나라의 풍전등화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인민군 전선 사령부는 328고지 공격 8월 2차 공세 실패를 거듭하자 8월 마지막 공세를 독려하면서 적군은 다부동으로 총집결했다. 대구를 압박하고자 328고지 앞 마진나루터를 건너온 주력부대와 함께 상주, 안동을 따라 군위 효령 삼거리에 집결한 인민군 3개 사단과 탱크를 앞세운 1개 기갑사단을 합친 적군은 2만1,000명으로 기세등등한 대군단을 이루었다. 인민군 4개 사단과 탱크부대를 앞세운 막강한 화력에 대항하는 백선엽 1사단장은 빈약한 소총수부대 8,000명이 전부였다. 백선엽 장군은 그야말로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지만 6·25전쟁사에 가장 빛나는 낙동강 다부동전투의 영웅답게 장군은 구국의 일념으로 미군 7함대가 태평양을 건너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하도록 55일간 지연작전을 펼친 것이다. 백선엽 1사단장이 지키는 전선이 철옹성처럼 완고했기 때문에 초조한 김일성이 공포의 심리압박 작전으로 방어망이 취약한 가산산성에 야간 침투시킨 인민군 포부대는 8월 17일 대구시내를 향해 포탄을 쏘아댔다. 포탄이 대구시내에 떨어지자 시민과 피난민들은 우왕좌왕 극도의 불안으로 민심이 크게 동요되었다. 대구에 둥지를 튼 임시정부가 다시 피난민과 대구시민을 버리고 몰래 부산으로 대피하면서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으며 나라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극도의 공포에 떨고 있는 대구시민과 수 많은 피난민들을 향해 당시 조병옥 내무부장관은 확성기 가두방송으로 군과 경찰이 반드시 대구를 사수한다면서 백성들의 불안을 잠재웠다. 미군정 혼란기에 김일성 사주에 의한 남조선 공산당(남노당)의 총수인 박헌영이 주도한 제주4·3사건, 대구2·28사건, 지리산 공비토벌 여수·순천 주둔군 반란사건과 함께 위조지폐 (일본 총독부시절 화폐발행 인쇄소)를 대량으로 무단 발행한 조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나라경제를 마비시키면서 건국여명기 국기를 흔든 4대 반란사건이었다. 건국 초기 칠곡 출신 수도 경찰청장 장택상과 경찰총수 경무부장 조병옥은 공산당의 악랄한 만행을 경찰조직을 통해 4대 폭동사건을 철저히 파헤치면서 미군정 책임자 하지중장에게 남한 공산당 해산을 강력히 요청했으며 두 사람은 박헌영 공산당 지하조직(남로당)으로부터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암살대상 첫 목표였으며 건국초기 혼란한 나라의 치안을 목숨 걸고 지켜낸 구국 1등 공신들이었다. 소련제 신형 탱크 T/37 기계화 사단을 앞세운 인민군이 가산과 유학산 계곡을 따라 다부동에 이르는 긴 계곡에 전진 배치하여 총 공세를 취한다는 긴박한 정보를 입수한 백선엽 장군은 열세를 만회하고자 즉각 미8군 사령관에게 탱크로 무장한 막강한 화력의 기계화 부대를 다부동 전선에 긴급 투입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대한민국에서 이승만 대통령보다 백선엽 장군을 더 신임한 미8군사령관은 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지상의 천하무적 최신형 M/26 퍼싱 신형탱크와 적 전차를 귀신같이 잡아낸다는 3,5인치 유도탄 발사기를 함께 보유한 최강화력 미군 27연대가 즉각 유학산 산악전투에 처음 투입되었다. 기계화 여단의 막강한 미군은 지상의 왕자인 전차를 앞세우고 백선엽 1사단장의 격려와 함께 국군 병사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최신형 무기로 무장한 미군이 개선장군처럼 인민군과 치열하게 대치한 다부동 전선에 위용을 자랑하며 나타났다. 가산에서 다부동을 향해 유학산 계곡 따라 대구로 넘어오는 국도가 긴 협곡 중심으로 6·25전쟁 최초로 야간 탱크전이 시작되면서 8월 17일 미군 탱크와 인민군 탱크들이 상대방 전차를 향해 발사되는 철갑탄들이 불바다를 이루며 탱크 포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야광탱크 포가 유성처럼 미끄러지듯 상대방 전차에 명중되어 화염 속에 폭발하는 적 탱크가 마치 볼링 공에 맞아 여러 개의 핀이 와르르 무너지는 볼링게임과 같이 보여 미군 병사들은 `볼링장 전투(BowIing, AIIey)`라고 불렀고 6·25 전사에 독특한 전투기록과 함께 칠곡군 가산면사무소 국도 옆 `볼링전투` 탱크모형 승전기념탑이 오늘도 호국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 8·15 광복까지는 부산을 함락해 적화통일을 하겠다고 장담한 김일성은 백선엽 국군 1사단의 치열하고 철저한 방어로 인하여 대구, 부산 공략이 어려워지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백선엽 장군 생포에 현상금 10만원이라는 거금을 걸었다. 당시는 황소 100여 마리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야간을 틈타 인민군 정예부대를 조직한 적 게릴라 부대는 백선엽 장군을 생포하고자 가산산성을 넘어 1사단 사령부가 있는 동명초등학교에 야간침투하면서 사령부를 지키고 있던 보초병과 교전하는 총소리에 잠을 깬 백선엽 장군은 평소 비상대기 상태로 취침하고 있었기에 신속하게 안전지대로 대피할 수 있었다. 55일간 낙동강 전투에서 전략적 요충지인 328고지가 15번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 중 한 때 적에게 328고지를 점령당하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후방인 망정초등학교 삼거리를 인민군에 장악당하자 적군은 아곡동 뒷산인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303 자고산 고지를 포위하고 완전 고립시켜 버렸다. 국군을 위장한 인민군이 303고지에 접근하여 정상을 지키던 미군 46명을 포로로 잡아 시계와 군복 군화를 빼앗고 맨발에 알몸을 밧줄로 묶어 303계곡으로 끌고 내려와 8월 17일 기관총으로 무참히 학살해 버렸다. 피범벅 처참한 시체 속에서 구사일생 살아난 4명의 미군 병사에 의해 그 잔혹한 참상이 폭로되면서 맥아더 장군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대노함은 물론 전 미국 국민이 분노했다. 한국전쟁이 길어지면서 2차 세계대전 버금가는 전비를 미국이 부담하고, 또한 미국 젊은 군인들이 남의 나라 전쟁에서 전사자가 속출하자 미국도 한국전쟁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 미국 내 반전여론의 확산을 계기로 미국 의회에서도 한국 전쟁비용을 과감히 삭감하겠다고 했다. 그 무렵, 303고지의 계곡에서 미군 42명이 무참히 학살당한 참혹한 죽음 앞에 미 국민이 분노하면서 반전여론이 갑자기 확전 여론으로 돌변했다. 미국은 더 많은 전비 투입과 함께 미리 계획된 B/29 폭격기 98대가 약목 관호산성 주위 적의 병참 집결지에 융단폭격을 했다. 2차 세계대전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 융단폭격 이후 최대폭격으로 적의 사기를 단번에 꺾으면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인민군은 8월 총공세에서 1차 268 금무산 고지전투와 2차 328고지 공격에 실패하자 극도의 초조, 불안과 함께 자존심이 상한 김일성은 인민군 전체 사기진작을 위하여 8월 15일 부산 점령을 포기하고 목표를 변경, 대구라도 탈취하겠다면서 워커라인 북동부전선과 남서부전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마지막 총공세를 취해왔다. 당황한 미 연합사령부는 데이비슨 라인을 설정, 울산~밀양~마산까지 밀리면 유엔군과 미군을 일본 오키나와로 철수하는 것은 물론 이승만 대통령도 모르게 대한민국 해외망명정부 계획을 수립해 버렸다. 약소국의 비애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자국의 이익이 최우선이라는 냉엄한 국제현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웠다. 석적읍 328고지 망정마을 K어른에 의하면 유학산 자락과 계곡에서 시체가 즐비하여 고을 어른들이 동원되어 골짜기에 우선 합동으로 매장했으나 마을과 골목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하여 응급 결에 텃밭에 가매장하니 시체가 거름이 되어 그해 가을에 과일이 아이들 머리 만하게 커졌다는 것이다. 석적읍 도개마을 K어른 충청도 처갓집 들판에는 전투중 인민군이 배가 고파 보리밭에서 손으로 보리를 비벼먹다가 총에 맞아죽은 적군의 입에서 보리 싹이 돋아나 있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안타까운 전쟁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2국민병 한국 노무단(KSC)인 군번 없는 보국대는 아군 전체 전투력 증강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한국 전쟁의 절반은 노무대의 공이라고도 했다. 특히 유학산 다부동 산악전투에서 고지를 향해 실탄과 음식을 지게에 지고 힘겹게 올라와 다시 전사자와 부상자를 지고 내려오는 성실한 모습에 모든 야전군 지휘관들도 감동했다. 큰 아쉬움은 흰옷 입은 피난민들이 그대로 전투현장 노무대로 동원 되어왔기에 산악을 오르내리면서 흰옷의 노무대가 적에게 쉽게 노출되어 5만70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노무자가 사망했다고 6·25전사 통계자료는 전하고 있다. 미8군사령관 벤푸리트 장군은 묵묵히 시키는 대로 맡은 일만 충실히 해내는 한국 노무자를 격려하고 격찬하면서 한국전에서 노무자 보국대가 없었다면 미군 십만 명이 더 필요했을 것이라 격찬하면서 노무자들의 많은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미국은 6·25전쟁에서 생사를 같이한 한국 노무자들의 조국사랑에 감동하고 미군을 위한 전투보조 역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국 워싱턴 DC 6·25참전 기념 국립공원에 한미 우정을 영원히 기리고자 노무대의 아름다운 이야기의 글을 비에 새겨 놓았다고 한다. 노무자가 등에 졌던 지게가 영어의 첫자 `A`를 닮았다고 제2국민병 노무부대를 `지게부대(A, Frame, Army)`라고 불렀다. 군번 없는 학도병들의 숨은 이야기는 눈물겹다. 삼총사 고지 전투 중 가장 치열한 328고지 전투에서 매일 수백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면서 긴급 투입된 군번 없는 학도병은 고지전투 공방전과 육박전으로 무참히 죽어갔고 살아남은 자도 생과 사를 넘나드는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전투가 없는 고요한 밤 중에 여기저기 포탄 터지는 소리에 놀라 옆자리 곤히 잠든 고참병을 깨워 일어난 선배 장병의 말인 즉, 포탄 터지는 소리가 아니라 죽은 시체의 배에서 가스가 차올라 배 터지는 소리라고 했다. 미 육군사관학교 전투교범에 수록된 유명한 다부동 전투 승리의 영웅 백선엽 장군은 해마다 현충일이면 다부동 전적 기념관을 매년 찾아 방명록에 서명하고 산천을 헤매는 부하들의 한 많은 원혼들의 명복을 빌고 있으며 자신도 죽으면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아니 가고 다부동 유학산 양지바른 산자락 부하들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은 참으로 고귀한 명장이며 만인의 귀감이라 하겠다. 낙동강 다부동 55일(1950년 8월 1일~9월 24일) 전투에서 인민군 1만7500여 명, 아군 1만여 명 합해 2만7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치열한 다부동 전투는 세계전투사에 가장 참혹하고 치열한 전쟁역사의 평가와 함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사수한 자부심을 가지면서 칠곡은 세계적 호국의 고장답게 워커라인 따라 삼총사고지 중심으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성지순례 필수코스를 개발해야 하겠다. 세월은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처럼 흘러 올해 어느덧 6·25전쟁 발발 67년을 맞았다. 무심한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지만 자랑스러운 호국의 고장 칠곡은 조국 근대화와 함께 살기 좋은 역동적 호국의 고장으로 빛나고 있다. 경상북도와 칠곡군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삼총사 고지의 맏형격인 303고지 성역화가(28억원)가 올해부터 시작되었다. 삼총사 고지에 조국수호를 위한 귀중하고 거룩한 숨은 전투 이야기를 많이 발굴해 비문에 아름답게 새겨 삼형제 고지에 북한산 정상 신라의 국보급 진흥왕 순수비와 같이 우뚝 세우고 참배하여 그들의 숭고한 넋을 위로하고 호국의 징표로 삼아야 하겠다. 6·25 전쟁당시 종군기자로 참전한 중견 작가인 조지훈 시인은 다부동 전적기념관 충혼탑 비문에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多富院), 죽은 자 산 자가 다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불고 있다”라는 시 구절에서 다부동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케 하고 전쟁의 슬픈 역사를 새삼스레 돌아보게 한다. 세계적 미래학자 토인비는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미래의 밝은 역사는 없다고 갈파했다. 조국을 수호한 최후의 마지노선이자 낙동강 교두보의 워커라인 중심축인 자랑스러운 삼총사인 303고지 328고지 268고지가 수문장 수호신이 되어 아름다운 금수강산, 낙동강을 굽어보며 오늘도 칠곡 호국의 고장을 보살피고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