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의 상징으로 국가 문서에 사용되던 도장을 우리는 “국새(國璽)”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국새는 언제부터 썼을까요?. 《삼국사기》에는 “신라 남해왕 16년(서기 19)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 임금의 도장을 주워 임금께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도장은 실물이 전해지지 않지만, 예맥(濊貊)은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의 뿌리임을 생각하면 적어도 문헌상에 보이는 우리 겨레 국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일 것입니다.
그 뒤 고구려에서도 국새에 대한 기록이 보입니다. “차대왕(次大王)이 시해되자 좌보(左輔, 고구려 초기에, 병마`兵馬`를 총괄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어지류 가 사람을 보내서 임금의 동생을 모셔 오게 했다. 그가 오자 어지류는 꿇어 앉아 국새(國璽)를 바치며 말하기를, ‘임금이 불행히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이 있으나 능히 나라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무릇 인심은 어진이에게 돌아가므로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니 청컨대 보위에 오르소서.’하였다.”
이를 보면 새로운 임금을 맞이할 때 고구려 신하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국새를 올리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명과 청으로부터 받은 공식적 국새는 모두 으로 ‘인(印)’자를 새겼고, 손잡이의 모양은 신하의 도리를 상징하는 거북이였지요. 그러다 1897년 고종이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황제국가에 걸맞은 를 새겼고, 그밖에 , 등을 새겨 쓰게 됩니다. 고종때야말로 제대로 된 나라의 위상이 세워지게 된 것이지요./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