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창원군 다호리 고분(사적 제327호)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은 한국고대사의 공백기인 고대국가 형성시기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데 문자 생활의 증거인 붓과 가야금의 원조인 현악기 같은 것들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1호 목관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동검, 중국거울(한경)을 비롯한 청동기와 오수전, 철검, 손칼, 부어 만든 도끼(주조철부), 두드려 만든 판상철부 등 철기제품이 나왔으며 칼집, 활, 화살, 합, 붓, 부채, 칠기와 민무늬토기, 와질토기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다호리 고분은 서기 1세기 후반에서 기원전 1세기 사이의 유적으로 여기서 출토된 것 가운데 하나인 붓은 우리 겨레의 글자 생활이 역사가 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붓은 예부터 문방사우 곧 종이, 붓, 먹, 벼루 가운데 하나로 그 재료는 털로 만든 모필 외에 대나무로 만든 죽필, 칡으로 만든 갈필(葛筆), 짚의 이삭부분으로 만든 고필(藁筆) 따위가 있습니다. 특히 모필(毛筆)에는 토끼털, 양털, 이리, 너구리, 사슴, 족제비, 말, 고양이, 노루,쥐수염, 닭털 따위의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지만 족제비털로 만든 황모필이 유명합니다. 박지원은 자신이 쓴 에서 “보드라운 털을 빨아서 아교를 합하여 날을 만들되, 몸이 대추씨 같고, 길이는 한 치도 못되는 것을 오징어 물에 담갔다가 종횡으로 치고 찌르니 굽은 것은 세모창 같고, 갈라진 것은 가짓창 같고, 곧은 것은 화살 같고, 팽팽한 것을 활 같다”고 해서 붓을 잘못 놀리면 그 해악이 병기와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균여의 에 보면 “마음으로써 붓을 삼아 부처님께 그리는 마음 다하나이다” 라고 해서 정성을 다해 부처를 그린다(寫)는 것은 부처를 그리는(慕) 것과 같은 뜻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붓은 오랜 세월 우리 겨레가 마음을 표현하던 도구이자 벗이었습니다. 큰비로 농사를 망치거나 죽은 사람을 빠짐없이 보고하라 시냇물 불었단 말 문득 듣고 /허겁지겁 높은 언덕에 오르니 / 놀란 물결이 모래톱을 삼켰고 / 세찬 물살에 기슭이 다 잠겼네 / 흐르는 나무 등걸 포구에 널렸고 / 물에 잠긴 버들은 시내 속에서 춤춘다 / 이 늙은이 보기에는 장관이지만 / 농부들은 머리를 맞대고 시름하누나. 위 시는 이응희(1579-1651)의 《옥담사집(玉潭私集)》에 나오는 “불어난 물살을 보며”라는 시입니다. 요즘처럼 장맛비에 불어난 물을 보러 높은 언덕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모습을 ‘장관’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농부들의 시름이 컸음은 짐작이 갑니다. 《명종실록》 10권, 5년(1550) 윤 6월 11일자에도 전라도의 큰비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주에 이번 6월 24일 유시(酉時)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큰비가 퍼붓듯이 내려 잠시도 쉬지를 않았습니다.(중략) 하천이 넘쳐, 물가의 논밭은 내가 되기도 하고 모래가 덮이기도 했습니다. 산이 무너져 여자 3명이 깔려 죽고 남자 2명은 치여서 다치고, 1명은 압사했습니다” 이에 대해 임금이 전교하기를 “지금 전라감사의 장계(狀啓)를 보았다. 해마다 이러한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부덕(不德)한 때문이라 근심스러운 생각에 놀라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감사에게 글을 내려 물길이 바뀌고 모래가 덮여 농사를 망친 곳과 물에 빠져 죽거나 산사태로 죽고 다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빠짐없이 갖추어 아뢰게 하고, 재해를 입은 곳과 산사태로 다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도 아울러 지시하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밖에도 《세종실록》 14년 7월 20일 자 기록에 "황해도 평산부에 큰비가 와 산이 무너져 압사한 사람이 9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름철이면 큰비로 말미암은 피해와 산사태 등 각종 재난이 잇따릅니다. 무엇보다 예방이 좋겠지만 만일 피해가 났을 때는 신속한 피해 파악과 복구만이 피해를 본 분들의 시름을 덜어 주는 일일 것입니다.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