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의 숫자가 급속하게 줄고 있다. 몇 년 동안 자살률이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요즘에는 가족이 함께 자살하였다는 가슴 아픈 뉴스를 드물지 않게 접하게 된다. 전철을 타고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모두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머리를 그곳에 묻고 있다. 얼굴을 마주할 때 서로 미소를 짓는 경우는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예쁜 어린아이를 귀엽다고 쓰다듬을 수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서로를 믿지 못해 이웃 없는 세상이 되어 간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짜증이 나고 신경이 예민하게 되어 화가 나기 직전의 상태다.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나? 근대화를 해서 산업사회를 이루고, 민주사회를 이루어 보다 살기 좋은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얼마나 투쟁하며 노력하였는가? 신앙을 가진 종교인의 수는 인구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많지 않은가. 모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실은 자기만 잘살기 위한 노력을 하며 살아왔다. 외적 성취에 몰두하고 승부에 집착하는 가운데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본래 선한 마음을 잃어버렸다. 유학은 기쁨과 즐거움의 학문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먹을 것, 입을 것, 살 공간이 필수적이니 이를 마련하기 위한 산업과 경제의 발달이 필요하지만 모든 문제를 경제의 각도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경제논리는 돈의 논리여서 돈은 있는 자에게 모이게 마련이다. 경제논리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에 대하여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 유학사상이었다. 유학이 한 때 도덕만을 중시하여 경제를 무시하는 경향을 낳기도 했지만, 선을 중심으로 하는 유학의 문제의식은 오늘날도 재검토를 필요로 한다. 유학자라고 하면 엄숙하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유학의 도덕사상을 바로 이 권위주의의 원천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현대인들은 대부분 도덕을 쓸데없는 불편한 것으로 여긴다. 오랜 봉건주의 사회에서 지배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하며 유학은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된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유학은 권위주의 사상의 체계가 결코 아니다. 나 역시 유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연구하기 시작하였지만, 경전을 공부하며 진리의 인식과 실천의 체계로서의 유학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견과정에서 처음 만난 긍정적인 측면은 경전에 나오는 즐거운 삶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었다. 유학 경전에는 즐거움과 관련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논어』첫 장은 학문의 기쁨과 벗과의 사귐에 대한 즐거움으로 시작된다. 부귀를 넘어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삶을 즐겁고 가장 귀한 삶으로 묘사하고 있는 곳이 많다.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함만 못하다(未若貧而樂)”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다(回也不改其樂)” “아는 것이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이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거친 밥에 물마시고, 팔 굽혀 베개 삼아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학문에 분발하여 먹는 것을 잊고 즐거워 근심을 잊는다(發憤忘食, 樂以忘憂) 학문과 삶에서 즐거움을 이렇게 중시할 뿐 아니라 사상의 두 기둥을 음악과 예법에 두고 그 상호관계를 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유학이 자연에 대한 객관적 물질적 인식에 뒤떨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유학의 정신적 측면을 낮게 평가하면 안 된다. 인간의 고귀함을 온전하게 실현한 성인의 철학으로서의 유학은 21세기에 다시 빛을 발할 것이다. 선한 삶이란 지극히 즐거운 삶 송대의 성리학자들은 유학을 진리의 학문, 곧 도학이라고 여기고 공자 이후의 학문을 사서로 체계화하였다.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 그것이다. `대학`에서는 유학의 도를 지선(至善)이라고 하고 그 지선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지선이 무엇인지 아는 방법을 격물치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사물에 대한 대상적 인식에 익숙한 학자들에게 선한 본성을 실현하는 삶으로서의 선에 대한 인식은 쉽지 않아 해석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에서 지선은 “일을 마땅하게 처리하는 것”, “천리를 다하여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는 것” 등으로 설명하지만 결국은 그러한 삶이 어떤 삶이냐고 물으면 “마음에 딱 맞는 삶”, 즉 “마음에 지극히 즐거운 삶”이라고 설명할 뿐이다. 선이란 본성으로서의 인간의 마음에 즐거운 당연한 도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선한 삶을 인식하고 실천하면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되며 즐거운 삶을 통하여 삶이 고양되면 인간은 개체를 넘어 자연의 진리와 하나가 되어간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본성을 다하게 되면 하늘을 알게 되고 하늘과 하나가 되는 삶에 도달한다고 유학에서는 말하고 있다. 유학에서 인간은 참으로 고귀한 존재이며 인간을 낳아 기르는 자연은 더욱 귀한 생명의 세계이다. 아무리 어려움이 많은 세상이라도 인간의 정신이 살아있고, 선한 삶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고, 그래서 상호 신뢰와 존중이 살아있는 사회는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삶의 희망이 가물가물하게 느껴지는 우리 사회는 어디서부터 희망의 불빛을 밝혀야 할 것인가! /이광호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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