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갔을 때다. 산동성 주도인 제남공항에 도착하자, 20대 중반의 자그마한 청년이 수줍은 듯 우리를 반겨 맞았다. 산동의 경제도시인 청도에서 기차로 4시간 이상 달려 이곳 제남으로 온, 우리의 안내원이었다. 길림성 연변 출생의 조선족인 그는 조금 초라한 듯 부끄러움을 타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런 여행 안내원이 수입이 보장되는 괜찮은 직업이다. 관광버스에 오르자 한족인 중국기사를 소개하며, 한국말은 전혀 모르니 욕도 실컷 해보라고 우스개를 하면서도 연방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그가 서서히 문제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눌한 조선족 말씨도 시원스럽지 못하지만, 제대로 학습된 안내지식이 없는 신출내기 표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렵게 입을 열어 기본상식 몇 가지나 전해 줄 뿐, 나그네의 마음을 충족시키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라 보였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최고의 선물이 궁금증과 호기심이라고 말한 에디슨은 아니지만, 나같이 궁금증이 많은 사람에게는 특히 아쉬움이 컸다. 일행들이 드디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여헹사에 항의를 하자는 과격파도 있었지만, 다행히 우리의 일행이 모두 50줄에 든 나이라 자식 또래인 그를 이해해 주자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그의 나이가 25살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 모두는 와! 웃음을 터뜨리며 "어머나, 내 아들과 동갑이잖아", "내딸과도 같다"를 연발했다. 분명히 그는 직업인으로서는 부족했다. 까다로운 관광객을 만났다면 단칼에 베일 뻔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밉지를 않았다. 내 아이 또래라는 가까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알 수 없는 친근감과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묘한 애처로움이 있었다. 사람 잘 만난 복 많은 가이드라고 우리는 스스로를 우아한 사람으로 치켜세우며 이국의 바람 속에 웃음을 날렸다. 정말 밉지 않았다. 잘생기지도, 유창한 말솜씨도, 유머도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때묻지 않은 순진한 얼굴 분위기가 우리의 마음을 잔잔히 적셔주었다. 아마 그의 이런 순수함에 우리가 대책 업이 설득당하고 만 것일까? 살아가면서 주위에서 밉지 않은 사람을 가끔 본다. 준 것 없이 사람에 비해, 받은 것 없이 예쁜 사람이 있다. 억지로 안 되는 이런 마음의 조화(造化)가 어디서 불어오는 신통력인지 모르겠다. 알 수는 없지만 여기에도 보이지 않는 존재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설득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아 내편으로 만들어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디에서도 승리할 수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과도 다르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일 것이다. 특히 그중의 하나가 `호감의 법칙`으로, `미인은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말이 있다. 뇌리를 친다. 이것을 어찌 불공정의 잣대라 할 수 있으랴, 정곡을 찌른 신묘한 마음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똑같은 일을 하여도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그 사람에게 점수를 주고 싶은 마음의 세계가 있음에 아무도 고개 젓지 않으리라. 이런 마음의 세계가 없다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바싹 마른 기계가 하는 일과 무엇이 다를까?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는 곳이다. 마음은 이성이 아니다. 그러기에 기계가 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그리움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부지런히 미인이 되어 점수를 얻도록 노력해야 할 일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고고한 미인인들 상대가 미인으로 보아주지 않는다면, 이 또한 무묭지물이 아닌가? `마음의 호감`이란 법치에는 이렇게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신비를 남긴다. 아차피 인생은 정답이 없는 것이니 이것도 정답 없는 정답으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어찌하였거나, 그 어눌하던 조선족 청년은 무죄! /서경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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