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전쟁의 역사는 표면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농촌 진흥청 산하단체인 농업과학기술원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경제 개발이 본격화된 1985년부터 1993년까지 8년 동안에 토종작물의 74%가 집중적으로 멸종된 기간이었음이 드러났다.
100여 년 전인 1890년에 미국의 최대 육종업체인 뉴욕 피터 핸더슨 회사에서 배재학당 등 기독교 재단학교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면서까지 우리의 잔디씨를 인천항을 통해 소쿠리째 실어 내갔으며 개량을 거듭한 끝에 정원이나 야구장, 축구장, 테니스장, 골프장에 심는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금잔디를 만든 것을 비롯하여 1970년대 중반에 미국의 식물학자들이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허락 하에 전국의 산야를 1년여에 걸쳐 샅샅이 뒤져 261종에 달하는 우리의 식물들을 빼내 간 것도 종자 전쟁이었다.
그때 우리 정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반출에 최대한 예산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제주도 구상나무는 1917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 부설 아놀드 수목원의 직원이 미국으로 가져가 지금까지 15개 품종으로 개량을 거듭하여 세계적인 ‘크리스마스트리’로 변신시켰다. 또 세계적인 정원수로 자리 잡은 라일락은 1947년 미국 뉴햄프셔대학교 적십자협의회의 한 직원이 한국에 파견 근무할 때 북한산 백운대에서 털 개회나무 씨앗 12개를 채취하여 그 중 7개를 발아시켜 개량한 것이다. 이것을 한국에서 온 아가씨라는 애칭으로 ‘미스킴 라일락’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고 현재 화훼류 중에서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정원수가 되었다.
뉴질랜드는 야생다래를 가져다가 개량시켜 `키위’란 이름으로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으며 뉴질랜드의 키위 수출회사인 ‘제스프리’사는 매년 총 수출액 3억 달러의 1%에 해당하는 300만 달러를 새 품종 개발비로 재투자하고 있는 실정이다. 패랭이꽃은 전 세계의 어버이 가슴에 달아주는 ‘카네이션’으로 둔갑한 지 이미 오래다. 순결의 상징인 ‘흰백합’도 네덜란드가 우리의 하늘말나리를 가져가서 개량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토종 종자 보존을 위하여 과연 얼마나 노력했던가 자문해보아야 한다. 현재 미국에서 우리의 토종 작물이 자기 나라 상품명으로 개량되어 판매 중인 것이 163종이고 미선나무, 노각나무, 산딸기나무, 느티나무 등의 25종의 우리 토종식물이 현재 개량 육성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농작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확량이 적은 토종오이는 다수확품종인 미국종 오이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고, 목화솜 대신에 캐시미론을 사용하면서 목화를 심는 농가가 사라져 버렸다. 우리의 양념으로 빼놓을 수 없는 고추도 토종은 멸종되다시피 했다. 토종 고추에는 비타민C가 사과의 18배나 들어 있어서 풋고추 3개면 비타민C의 1일 섭취량이 충족되는, 그야말로 비타민C의 진액이다. 고추를 중요한 양념이라고 한 것도 약으로 생각한 약념(藥念)에서 나온 말이다. 현재 미국에서 재배하고 있는 밀의 90% 이상이 우리 토종밀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재래종 오리, 흰 오골계, 토종닭, 돼지, 검정소, 얼룩소, 칡소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겨우 몇 가지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라는 노랫말은 젖소가 아니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얼룩배기 황소는 이제는 전설의 소가 되고 말았다.
1986년 소값 파동 당시 정부에서는 농민들의 소 사육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대책을 내놓고 20만 마리의 암송아지를 사들여 도살한 것이 멸종의 한 원인이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육되고 있는 한우 고기소는 대부분이 헤리퍼드종, 에버딘 앵거스종, 샤롤레이종들이다.
개도 마찬가지이다. 액운을 쫓는 개로 사랑받아온 삽살개도 1940년 3월 8일 조선 총독부령에 의하여 전쟁에 충당할 가죽용으로 연간 10만 마리에서 50만 마리씩 도살되면서 멸종의 길로 들어섰다. 외국에서는 우리의 토종종자 반출에 혈안이 되어 있던 그 시기에 우리는 몸무게가 22~37kg밖에 나가지 않는 토종돼지를 식량 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여 버리고 200~250kg이 나가는 송아지 만한 바크샤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희망을 걸어도 좋을 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의 토종 약초 분야이다. 나무나 꽃들은 거의 관상용이므로 저들이 개량해서 육성하면 상품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으나 우리 씨 약초만은 외국사람이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약초라도 외국 땅에 심으면 벌써 그 약초는 우리 고유의 약효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배나무를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심었더니 자라서 첫배가 열린 것이 이미 미국 배였으며 월남전 때 맹호부대 막사 옆에 참외와 수박을 심었더니 참외는 손가락 크기밖에 자라지 못했고 수박은 사과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중국의 산삼은 우리나라의 인삼 정도의 효능밖에 없다. 그래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물자가 귀한 중국에서 그곳 산삼 한 뿌리를 우리 관광객의 목걸이 볼펜과 서로 맞바꾸었으며 미국산삼은 우리나라 무우 뿌리의 성분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또 대만산 홍화씨의 골절 치료 효과는 토종 홍화씨의 1/10에 불과하며 미국 홍화씨는 거의 효과가 없다. 은행잎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슈바베’라는 제약회사에서 국제특허를 내기 위해 제출한 한국은행잎을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혈액순환 개선물질인 ‘징코프라본 그리코사이드’라는 성분이 중국과 일본의 은행잎에 비해 무려 20배나 더 들어 있다. 국가 차원에서 토종약초 하나만 육성하더라도 우리나라 경제에 큰 효자 상품이 될 것이다.
/반재원 돌씨학회(토종연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