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년대, 긴 보릿고개로 허기진 농촌시절은 연탄에 의한 식생활과 난방문화는 도시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왜관읍내 사람들도 대부분 지게를 지거나 소달구지를 몰고 아침 일찍부터 십리도 더 되는 나뭇길을 나서야했다. 읍내에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사방에서 나무와 장작을 팔기위한 행렬이 이어지고, 나무전과 우시장이 가장 붐비는 곳이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바지저고리와 흰두루막이 시장을 가득 메우면 황량했던 시골 장은 금방 흥청거리며 거나한 잔치판이 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나면 농촌마을 어디에서나 갈무리한 김장독을 묻고 월동준비에 여념이 없다. 월동준비 중에서도 땔감을 마련하는 일은 가장 으뜸이 되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나선 모든 산길은 곧 나뭇길이 된다. 지금은 골프장 개발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나무하던 어린 시절 그 당시 윗마을 하고도 더 깊은 큰 산 양지바른 기슭에 화전촌을 연상케 하는 마을이 있었다. 햇볕 밭이 유난스런 돌담집은 옹기종기 군락을 이루어 따뜻한 아랫목 같은 정감을 주면서도 생동감이 넘친 곳이었다. 호젓한 나뭇길에 보았던 돌담 마을은 오래도록 각인되어 늘 혼자 기억하는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 새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사전(事前) 문화유적 탐사를 했는데 토관묘 속에 아무나 소장할 수 없는 청동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천주교 박해 시절 마을 공동체로 운영되던 옹기굴 또한 발견되었지만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얼마간 세월이 지난 후, 우연한 기회에 천주교 박해시절 조선 교구장이셨던 머텔 주교 일기를 볼 수 있었다. 주교의 일기장에 의하면 교회 사목활동을 하기 위해 이곳 왜관 산골마을인 장자동 천주교 공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방문 당시 29가구에 신자수가 자그마치 109명이라는 자료를 읽는 순간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어린 시절 나무하러 다녔던 나뭇길 옆 돌담 마을이 천주교 탄압을 피해 살았던 사람들의 피난처고 그곳이 공소터임을 직감했다. 얼마후 영남카톨릭교회연구소 마회장을 만나 이곳의 유래를 듣게 되었다. 김수한 추기경님의 아버님 김 요셉께서 장자동 공동체마을 책임 도공으로 있을 때, 김수한 추기경도 자연히 유년시절을 이곳 옹기골에서 보내게 되었다고 했다. 생전에 추기경께서는 어린 시절을 보낸 장자동 옹기골을 못 잊어서 어릴 때 추억을 더듬어 찾아보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영면하셨다. 아쉬움을 가지고 떠나셨을 추기경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니 늘 나뭇길 옆에 있었던 이곳 공소를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하는 회한이 가슴앓이로 남는다. 어린 시절 나뭇길을 인연으로 자칫 사장(死藏)될 뻔한 역사를 찾아 우리 고을의 자랑거리로 간직할 수 있은 것은 더 할 나위없는 수확이었다. 천주교 장자동 공소가 있었던 옛 터에 그곳의 역사를 전하는 작은 표식이라도 세워둠이 먼 훗날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한 이 고장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수헌 왜관농협 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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