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게 걸으세요. 행복하게 걸으세요. 우리가 내딛는 걸음은 평화로운 걸음입니다. 우리가 내딛는 걸음은 행복한 걸음입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평화로운 걷기라는 것은 없고 평화 자체가 걷기라는 것을 알게 되고, 행복한 걷기라는 것은 없고 행복 자체가 걷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틱낫한 걷기 명상 중에서 느린 움직임으로서의 걷기 군대생활을 하던 중 어느 봄날 아침 위병소에서 근무를 서고 있을 때였다. 위병소 앞 도로로 초등학교 1학년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꼬마가 가방을 메고 등교를 하느라 걸어가고 있었다. 꼬마는 걷다가 길가에 핀 꽃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기도 하고, 가던 길을 멈춰 앉아 땅위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기도 하며 혼자서도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저러다 지각해서 혼날 수도 있겠다 싶어 "꼬마야 얼른 학교에 가야지!"하고 일깨워 주었다. 꼬마는 한번 흘깃 보고는 빙긋이 웃기만 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꼬마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가며 마치 길과 대화를 나누는 듯 했다. 그 꼬마의 뒷모습은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꼬마의 여유롭고 느린 움직임은 잠시나마 군대생활의 팍팍한 일상에 지쳐 있던 마음을 잠시나마 훈훈하게 만들어 주었다. 가끔 느리게 걷기를 시도한다. 특별한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 도시의 골목이나 쇼핑몰, 시골의 오솔길 등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곳이 도시의 대로이든 좁은 골목길이든, 시골길이든 산길이든 상관이 없다. 무엇인가 관찰의 대상만 있으면 그만이다. 걷다가 어떤 구경거리가 나타나면 멈춰 서서 한참을 구경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그 공간들은 새로운 의미의 장소로 바뀐다. 특히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할 때 조사대상자들과 만나기 전에 그 지역에 있는 길들을 구석구석 다니며 탐색을 한다. 여기저기를 걸어서 다니다 보면 어느새 현지조사의 틀을 새롭게 구성하기도 한다. 때로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이때 얻게 되는 정보들이 현지조사의 맥을 짚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현지조사는 그 지역에서 느리게 어슬렁거리는 데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급하게 서두른다고 좋은 민족지나 현지조사 보고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두르다가 맥락을 놓치게 되어 현지조사를 망치는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에서 느림은 미덕인가? 악덕인가? 장점인가? 단점인가? 현대사회에서 느림은 악으로 간주된다. 심지어 도시사회의 구조 속에서 적응하지 못할 태도로 지적받는다. 일의 완성도를 떠나 빨리 처리하는 사람이 대접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조급증을 가지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느린 움직임을 견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와는 달리 어떤 철학자는 `느림`이라는 말에 대해 참을 수 없을 만큼 관능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느림은 아름다움이며 온전하게 사물을 관망하고 감상하는 것을 허용한다. 느린 움직임을 통해 우리들은 세상의 무한한 매력 속으로 빠져들 수 있고 풍부하고 재미있는 자연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던 사물의 시시콜콜하고 섬세한 부분들은 느린 움직임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빠른 움직임으로는 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걷기는 바로 느린 움직임 그 자체이다. 느린 움직임을 통해 세상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느린 움직임인 걷기조차도 속도 경쟁을 펼치듯이 앞만 보고 빨리 걸으려 한다. 다리 운동은 되겠지만 길과의 교감이 없는 걷기는 따분하기만 하다. 여유로운 걷기를 통한 느림을 통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다. 느림에는 특유의 힘이 있다. 걷는 행위는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과 같다. 발, 다리,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걷다보면 어느 듯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을 열게 되면서 이런 저런 정보를 접하게 되고 명상에도 빠지게 된다. 관광의 목적이든 학술적인 목적이든 어떤 지역을 잘 알고자 한다면 걸어서 다니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걷기와 탈것 최초의 원인(原人)이 직립보행을 시작한 지 200만∼400만 년 후, 그들의 뒤를 이은 또 다른 원인들이 도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직립보행을 시작한 지 400만∼600만 년 후인 약 10만 년 전에는 우리와 같은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했다. 직립보행은 인간과 유인원을 구분해주는 해부학적 특징을 만들어 냈다. 인간이 해부학적으로 수직구조를 갖게 되고 두 발로 일어서게 되면서 골반과 팔다리의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골반의 두께가 달라지면서 낳을 수 있는 아기의 크기 또한 달라졌고, 이로 인해 아이를 낳은 후 돌봐주어야 하는 기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가족이 발달하게 되었다. 손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짐에 따라 인간에게는 도구 제작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인류학자 조지프 A. 아마토에 따르면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손의 관절을 이용해 걸을 때에 비해 무려 35%나 되는 칼로리를 절약하게 되었고, 이렇게 남아도는 칼로리를 뇌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직립보행은 또한 걷기와 말하기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을 더욱 극대화 시켜주었다. 심리학자 로버트 프로빈은 원시인들이 직립보행 덕분에 호흡과 성대를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게 되어서 코를 킁킁거리거나 숨을 헐떡거리기만 하는 유인원들에 비해 더 다양하고 복잡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들은 직립보행하게 되면서 자유로워진 손으로 도구를 사용하고 주위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손이 자유롭게 되자 인간의 뇌도 진화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약 1만 년 전부터 식량으로, 노동력으로, 물물교환 수단으로 동물들을 이용했다. 동물들은 사람의 손에 의해 길들여져 걷기, 노동, 운반, 농사일 등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가축 특히 말을 이용해 이동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제 권력자들은 가마나 말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고, 걷기는 노예들이나 비천한 사람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탈것이 발달하면서 걷기에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가 따라 다녔다. 서기 500년에서부터 시작된 중세시대의 대부분 기간 중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걷기 이외의 대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시대의 보행자들은 탈것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평생을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깨닫곤 했을 것이다. 산업혁명은 엔진이 인간과 동물의 힘을 대체하게 되었다. 바퀴 위에는 점점 더 크고 무거운 차체가 얹히게 되었고, 기계의 힘이 차량들을 움직였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차는 보행자를 승객으로 바꿔놓았다. 20세기에 초에 등장한 자동차는 훨씬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기차와 자동차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을 이어 주었고, 도시와 시골을 하나로 묶어 놓았다. 획기적인 탈것의 발명으로 인해 인간들의 걷기는 점점 줄어들었다. 자동차는 매우 빠른 속도로 걸어 다니던 인류의 생활 패턴을 바꾸어 놓았다. 걷기의 종말 루이스 멈포드는 20세기에 `보행자의 종말`이 도래한 것은 자동차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동차는 인간들을 개인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자동차가 모든 계층에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걸어 다니는 사람과 앉아 있는 사람, 걸어 다니는 사람과 탈것을 이용하는 사람, 걸어 다니는 사람과 운전자들 사이의 계급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걷는 사람들의 지위는 점점 떨어졌다. 길에는 걷는 사람이 없고 오직 자동차들만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 도시지역이 증가하고 고속도로가 사람들이 걷는 길을 끊어 놓았다. 고속 철도나 도로가 점점 늘어나 숲속과 산 정상까지도 차의 접근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바람에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세계는 날로 좁아진다. 어떤 지역의 관광수입 증가는 대개 도로 기반시설의 정비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런 시설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은 보행자를 고려의 대상에 넣지 않는다. 도보관광객들이 점점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이 볼 때 보행자란 특별히 할당해 놓은 지역을 걷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다. 자동차를 숭상하는 문화가 도처에 만연하여 걷는 사람들이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도로는 늘 위험에 직면한 불안한 시설일 뿐이다. 길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 사라지고 오직 자동차들만 씽씽 달리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옛사람들에게는 걷는 것이 장소를 이동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걷는 것은 하나의 선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걷기는 여전히 인간들에게 매우 중요한 이동수단이지만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동할 때 걷기는 매우 위험한 선택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도로는 자동차로부터 사람을 보호해 주는 장치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시골의 도로에는 인도가 따로 없는 경우가 많아서 걷기가 더욱 힘들고 위험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자동차로 인해 우리들은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고, 걷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걷기 위해서조차도 자동차를 타고 쇼핑몰이나 헬스클럽을 가거나 산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 차를 타고 온다. 일상생활에서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다면 굳이 걷기 위한 시간을 따로 낼 필요가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사회는 자가용이든 대중교통이든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일상생활을 하기가 매우 불편한 구조로 재편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걷기는 여가나 스포츠 등 건강을 위한 활동으로 변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시대에서 걷기는 사람들에게 잠재의식 속에 자아를 찾고 건강과 치유, 그리고 즐거움의 행위로 인식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항상 자동차 속에 갇혀 자연과 격리되어 지내는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는 여가가 생기면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며 걷기를 시도하려는 의식이 존재한다. 현대문명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걷기는 여전히 인간의 삶과 움직임의 핵심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걷기의 부활과 길의 복원-지역문화의 부활 최근 우리나라도 걷기의 열풍에 빠져들었다. 도시와 농촌, 평일과 주말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걷기에 열중하고 있다. 제주도 올레길로부터 시작된 걷기 열풍으로 서점가에도 걷기에 관련된 도서가 넘쳐나고 있다. 러닝머신 위에서 걷든 쇼핑몰에서 걷든 도시 속을 걷든 산길을 걷든 곳곳이 걷기의 붐으로 들썩이고 있다. 걷기 열풍은 회색건물에 갇힌 도시인들이 바쁜 일상에서 탈출하고 건강을 회복해 보겠다는 열망이자 슬로푸드와 슬로라이프 운동의 일환이기도 하다. 또한 속도를 강요당하는 현대인들이 숨 막히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인 동시에 인간의 본능적 행위로의 회귀 욕구의 분출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처럼 걷기와 슬로라이프에 대한 열망은 최근의 관광 형태에도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 오래된 골목과 지역의 관광이 생겨났다. 많은 이들이 도보로 혹은 자전거로 역사와 추억이 배어 있는 오래된 골목을 걸으며 마음을 위로해 주는 향수와 편안함을 느끼고자 한다.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면 사람들은 그곳에 더 오래 머물고 싶고 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어떤 지역의 원래의 길을 단지 잘 보존하거나 복원하는 것을 통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그 사람들이 다시 그곳을 거닐며 추억을 쌓게 된다. 특히 도시의 골목은 걷기를 통해 사람과 사람들이 만나고 어우러져 상생의 문화가 형성되는 곳이다. 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 는 것이 아니다. 차도 대신에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골목길을 더 많이 보존하고 복원하여 그 지역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놀고 먹고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를 통해 골목길의 생태가 살아나게 되면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그곳을 자연스럽게 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관광산업은 희귀하고 소중한 여러 장소들을 소비에 내맡긴다. 그 결과 그 장소들은 본래의 아우라가 파괴된 진부한 공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최근 중국 베이징에는 오래된 골목과 지역에 대한 삼륜차관광 내지 도보관광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이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본래의 낡았지만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골목의 분위기 대신 깔끔하고 화려한 느낌의 밋밋한 공간으로 바뀌고 말았다. 낡고 초라한 공간에서 가난하지만 당당하고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보며 추억에 잠기길 좋아하던 관광객들은 이제 잘 정돈된 테마파크와 같은 새로운 골목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다. 걷기는 도시를 복원하는 사업에서도 계속 핵심적인 역할을 해 오고 있다. 보행자가 바로 그 도시 자체가 된다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동네의 분위기를 복원하고, 관광객과 쇼핑객을 끌어들이고, 아름다운 거리를 설계하고, 도시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 걷기가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의지나 계획을 통해 걷기를 강요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나 시 당국이 인도를 만들고 거리의 가게들을 늘려놓는다고 해서 보행자들이 저절로 찾아오지는 않는다. 보행환경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지 않는 도시는 죽은 도시다. 아무리 많은 돈을 투자하여 새로운 길과 전통가옥을 건설하여도 그곳에 사람의 향기가 없고, 그 길과 어우러진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죽은 길이다.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길 위에 무수한 장소들이 이어져야 한다. 길 위의 공간이 장소가 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위한 배려와 보호가 충분하여야 한다. 근대사회가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축적, 그리고 소비를 모든 사회과정의 중심에 설정한 소비사회였다면 오늘날 이와 같은 물질주의적 패러다임은 도처에서 인류와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주의적 패러다임이 새롭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심각한 위기 극복의 필요성에서 기인한다. 걷기를 통한 길의 부활과 상생의 문화, 오래된 문화의 보존과 복원은 21세기 문화의 시대에서 요구되는 가장 핵심적인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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