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창구직원이 "로또복권 안사세요"? 하고 묻는다. "안 사요 나는 그런 행운 안 바라요"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왜요? 하긴 그런 분 가끔 있긴 하더라고요"라며 말끝을 흐린다.
여태 나는 한번도 내 손으로 복권을 사본 적이 없다. 내가 부자거나 물욕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한테 그만한 행운이 돌아오지 않을 게 뻔하고, 또 돌아온다 해도 겁이 날 것 같아서다. 갑자기 쏟아지는 햇살에 생체리듬이 흔들릴 수 있고, 남의 것을 빼앗은 듯한 도박성이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걱정을 하면서도 누구보다 터무니없는 공짜 꿈을 나는 잘 꾼다. 일테면 어느 대가의 도자기 전시회에 갔다가 그냥 하나 준다면 어느 것을 가질까 하는 것에서부터, 길 가다 아무도 몰래 거액의 돈을 주워드는 몽상 같은 환상의 꿈까지 말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시대에 최고로 꾸는 공짜 꿈은 역시 로또복권 1등이다. 현실에서 거부하는 인생역전의 행운을 나는 공짜 꿈의 세계에서 싱그럽게 누려보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실은 이것을 위하여 내가 맹랑한 헛꿈을 꾸어보는 것이다. 거액의 돈이 거저 주어졌으니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다음 순간 거짓 없이 나는 순수한 천사가 되어본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불우이웃이다. 이 돈은 내 것이 아니니 맘껏 이들에게 베풀어보리라. 평소에 마음 쓰였던 가난한 이웃, 친지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리라. 구체적 계산서도 작성해 본다. 가난의 등급에 맞추어, 친소 관계의 등급에 맞추어 나는 합당한 인정을 베풀어나간다. 내 몫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한참 추진을 하다보니 엉뚱한 생각이 든다. 아니다. 당연히 이것을 내가 가져야 한다. 남에게 그렇게 선심 쓸 필요가 있을까? 나도 평소에 절약하며 살아가고, 하고 싶은 것 누르며 살아가는데, 또 내가 누려야 할 물욕의 세계가 끝없이 열려 있는데, 그리고 내 아이들도 있잖아.
나는 천사에서 정직한 인간으로 되돌아온다. 이것을 누가 탓하랴? 떳떳한 내 돈으로 노후보장을 든든히 하고, 사고 싶은 것 다 사고, 가고 싶은 곳 세계 어디나 누비고 다녀야지. 욕구는 욕구에 의하여 더욱 욕구를 부채질한다.
그런데 한참 욕구의 바다에 떠밀려 부풀어가던 마음에 난데없는 허무의 물결이 일어난다. 마음에 드는 백화점 물건 점찍어 놓았다가 망설임 끝에 사들였을 때의 기쁨도, 어쩌다 한번씩 떠나는 해외여행의 설렘도 사라져가고 있다. 끝까지 달려온 욕망의 종점에서 나는 또 다른 결핍을 깨닫기 시작하는 걸까?
꿈속의 복권당첨을 헤매 다니며 나는 지금 욕망의 끝없음과 그 끝없음의 허무에 오락가락하고 있다. 채워지지 않는 사람의 욕심은 허무의 하늘을 향해 달려가는 신기루에 다름아닐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운을 바란다. 행운도 행복의 하나이다. 누군가의 귀한 손이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희망이 솟는다. 그러나 인생의 진정한 행운은 평상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어지는 수많은 행운의 꽃다발을 안고 일상의 건전한 삶을 살아간다.
로또복권 같은 놀라운 행운을 인생역전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홀대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제 진짜 로또복권 하나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 1등이 되어 꿈꾸던 불우이웃 돕기를 하여, 인간에서 천사로 변한 정말로 놀라운 인생역전의 기록을 세워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다./서경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