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산실 왜관 매원동 본관이 광주(廣州)인 이승해(李承海) 선생은 지난 1903년 11월27일 경북 칠곡군 왜관면 매원동(현 매원리) 390번지에서 매원동 불천위 박곡종가(朴谷宗家) 11代宗孫 이경석(李庚錫)님의 아들로 12代 大宗孫으로 출생했다. 이승해(1903∼1957) 선생의 성정은 늘 온유하고 공정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조부님의 문중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한후 경북 성주군 가천면 천정동 출신 백농 최규동 선생이 설립한 사립 명문 서울 중동고보(현 서울 중동 중·고교)에 진학하였다. 일제강점기 전 조선에서 거족적으로 일어난 3·1 독립만세운동은 일제하에 신음하는 우리 한민족의 울분의 발로였으며, 세계식민지사에 그 유래를 찾아 보기 어려운 불굴의 항쟁이었다. 3·1 독립운동의 여진은 1926년 4월25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피맺힌 한을 토하는 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을 거두는 비통한 사건이 일어났다. 순종 황재의 붕어(崩御)로 3·1 독립운동이 다시 일어 나려는 기미를 보이자 일제당국은 긴장과 초조속에서 더욱 삼엄한 경계를 폈다. 이러한 경계 속에서도 중동학교를 필두로 하여 중앙, 배제, 휘문, 보성고보 생들의 동맹학생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승해 선생은 1918년∼1919년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검속되어 퇴학처분을 당하고 고향인 왜관 매원동으로 낙향했다. 1930년에 일본의 동화 정책에 조선인에게 창씨개명령이 발포(發布)되었으며 각 가정에 일본 천황의 신주를 제공, 매일 참배단을 만들어 놓고 참배토록 강요하였으나 이를 모두 거부했고 일본의 부당성을 역설했었다. 낙향하여 있는 동안 해방때까지 요시찰인물로 지목, 순사가 허리에 긴 칼을 차고 동태 파악차 집에 수시로 찾아오면 선생의 모친은 순사온다하며 정신 없이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순사가 가고 나면 긴 한숨을 쉬며 내려오곤 하였다는 말을 수차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중동학교 재학중 당시 가까이 지낸 분으로는 안호상 박사(초대 문교부 장관 ), 변영태(외무부 장관), 전진한(사회부 장관), 허정(내각수반), 이인석(삼촌) 외 확인 되지않은 10여분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한복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10여명이 찍은 사진과 이승해 선생의 양복 입은 독사진 등은 보관돼 왔으나, 왜관읍 매원동 종가집은 6·25 전쟁 왜관전투 때 모두 소실되고 그 당시의 사진은 한 장도 건지지 못하고 전부 없어지고 말았다. 당시 숙질간에 중동학교에 신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같이 진학한 숙부 이인석님의 다락방에 보관해오던 당시 중동하교 재학시 교과서 7권정도가 다행히 보전, 이 교과서가 유일무이한 당시의 증빙자료가 되고 있다. 중동학교 동문이었던 안호상 박사의 장남 안경홍님이 부친으로부터 들은 구전 사실 입증확인서 및 종조부님(이인석)의 장손 이광식 재종제가 들어온 사실 입증확인서 등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있다. 선생은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됐으나 불굴의 적개심을 품고 박곡종가(대지 1,600여평 건평 한옥 80칸으로 솟을대문(큰 대문에서 중문대문을 거처 안대문 등 세개의 대문을 거처 안체에 들어가는 큰 집) 솟을대문 칸 채의 방에서 야학당을 개설하여 문맹퇴치 운동과 일제의 부당성을 은연중 고취시키는 운동을 전개, 선생의 대소가는 전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이를 입증해주는 1939년(소화 14년) 대구지검 형사사건부 829호에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검거된 형사사건부에 올라 있는 매원동 광주이씨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매원동 422번지 이이석(당시 30세), 421번지 이두석(당시28세-애족장), 이달영(당시 29세·주소는 왜관동 365번지로 돼있으나 매원동 390번지 박곡종가 후손으로 2009년 독립유공자 지정), 매원동 417번지 이승택(당시 26세), 매원동 344번지 이재석(당시 29세), 매원동 421번지 이수목(2005년 대통령표창) 외 왜관동 623번지 이항진(당시 24세) 등 선열들의 불굴의 항일운동 사실은 일제 강점기 광주이씨의 매원동 종택이 항일 운동의 산실이었음을 이 형사기록을 통하여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이수목(1890년생)지사는 대구 안일암에서 국권회복 운동에 참가 자금모금과 선전활동을 전개하였고 여운형 선생이 주도하는 조선 건국동맹에 재무담당자로 자금조달과 자금관리 등을 맡은 것으로 당시 박곡종가 사랑방 (큰집 宗孫과 종숙질간)에서 정보를 들어왔으며, 극비리에 독립자금을 조달하였다고 이수목 지사의 딸 이준석(생존 1929년생, 미국 LA거주 시민권자)님이 이를 증언해 주고 있다. 큰집에서도 당시엔 필경 독립자금을 조달하였을 것이라고 자료를 발굴토록 권유하고 있으며, 서울 법원 문서고에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특히 이언식씨의 아버지 이승해 선생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서울 중동학교 재학중 항일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검거, 퇴학처분을 당하고 낙향해 애국계몽운동을 하던 중에도 서울에 자주 왕래했는데 유추해 보면 서울의 항일 정보원과 극비리 접선을 통하여 정보제공을 함으로써 상기 언급한 1939년 대구지방검찰청 형사 사건부 829호 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매원동 광주이씨가 항일운동에 대거 참여 국권 회복 운동에 선봉에 서서 활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경의 극비 문서를 통하여 알수 있듯이 왜관사건의 전모와 이 사건의 `아지트`는 독립운동의 산실이 매원동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또 서울의 명문 중동학교는 경북 성주 출신 백농 최규동 선생이 1906년 이 학교를 설립, 이희승(1896년생) 국문학자, 이병도(1896년생) 사학자, 윤치영(1896년생) 국회의원, 안호상(1902년생) 초대문교부장관, 전진한(초대 사회부장관), 변영태(초대 외무부장관), 허정(4·19 내각수반) 이승해(1903년생 박곡종가 12대 대종손), 양주동(1903년생) 국문학자, 이교선(1905년생) 국회의원, 김광섭(1906년생) 시인, 이병철(1910년생) 기업인(삼성 창업자), 김충현(1921년생) 서예대가, 김응현(1927년생) 서예대가, 허건행(1924년생) 기업CEO(LG 사장) 및 그 외 나라에 충성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명문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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