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의 학자를 찾아서(10) 양졸재(養拙齋) 정추(鄭錘)의 자는 평보(平甫)이며, 본관(本貫)은 東萊이다. 公의 5대조는 吾老齊 정종(鄭種)으로서 세종 2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단종 1년(1453년) 이징옥의 란을 평정한 공으로 책록 되었으며, 세조3년 이시애의 란에 공을 세워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으며, 충청도 관찰사, 경주부윤 등을 지냈다. 또한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운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병조참판 정여강(鄭汝康)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성리학을 듣고는 조예(造詣)가 정심(精深)하였다고 한다. 1612년(광해군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文穆公 鄭逑는 祭文에 “옛 나의 죽은 벗 청휘(晴暉) 處士가 그 좋은 사위를 두었다더니 그대였었다. 몸가짐이 단아하면서도 근엄하고 뜻과 행실이 모두 아름다웠다. 장인과 사위가 의기투합한 것이 양반 자식 일뿐만 아니었다. 나 또한 공이 나를 믿고 자기의 정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니 나는 그런 까닭으로 공을 사랑하여 의리로써 인도했다. 군자의 학문은 반드시 가까움을 필요로 하여 선비가 되는 것을 귀하게 여기나니, 다만 손을 드리우고 발을 꿇어앉는데 있을 뿐 아니라, 뜻은 원대함을 기약하고 공을 오직 여러 번 쌓아야 한다"고 하였다.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이 만사(挽詞)에서 이르되 "모습은 온화하나 안은 밝으며 행동은 공손하나 말은 엄하였다. 부드러워도 유속을 따르지 않았고 강하고 사나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승지(承旨) 이언영(李彦英)이 만사(挽詞)에서 이르되, "옛날 같이 놀던 이가 零落(세상을 떠나도) 내 마음 슬픈데 하물며, 청춘부터 일찍이 지기(知己)로 지냈음에랴. 강정(剛正)함은 확실히 지금 세상의 태도는 아닌데 청수함은 가장 고인의 자태(姿態)에 가깝네. 선사암가에서 같이 은거(隱居)하던 날 노곡(蘆谷) 뜰 앞에서 대작했었네. 지난 일은 아득히 한바탕 꿈을 이루었으니 이별의 말을 쓰려니 눈물이 두 줄로 흘러내림을 어찌 견디리오"라고 했다. 양졸재 실기(實紀)가 1권 있으며, 生員 송이석이 행장(行狀)을 지었고 참의(參議) 이상정이 비갈(碑碣)을 지었다. 후에 오양서원(梧陽書院)에 제향(祭享)하였으나 1868년(고종5년) 서원철폐령으로 피철(被撤)된 후 존경당(尊敬堂)을 세워 추모하고 있으며, 존경당은 현재 칠곡군 지천면 연호리(납실)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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