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선(京釜線)은 서울을 기점으로 대전, 대구, 부산을 연결하는 복선철도로서 1899년에 개통된 경인선을 부설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철도망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의 2대 간선축인 서울-부산과 서울-신의주를 잇는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공작을 벌였고, 1898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을 방문하여 경부철도합동조약이 체결되었다. 부설권을 취득한 일본은 ‘경부철도’를 설립하고 1901년 8월 21일에 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각각 착공식을 거행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수물자 수송 등의 이유로 빠르게 공사를 진행하여 1904년 12월 27일에 완공되어 1905년에 개통되었다. 해방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중추간선으로서 기능하였고, 한국전쟁 때 군수물자와 병력수송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국토해양부 소유인 왜관철교(인도교)는 1905년 일제가 군용 단선 철도로 개통한 경부선 철도교로서 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다리이다. 왜관철교는 북한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역할을 했던 유적이면서 삼각형으로 만들어진 철재 트러스를 이용해 교량의 하중을 지지하는 100년 이상 된 트러스교(Truss bridge)로 교량사(橋梁史), 철도사적인 가치도 크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왜관철교 경간(經間)은 트러스가 제거됐기 때문에 복구된 교량 하중을 지탱할 수 있는 교각(다리기둥)을 새로 세운 것이며 이 교각은 트러스를 양쪽에서 지탱하는 기존의 교각에 비해 폭이 좁다. 왜관철교는 1905년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해 부설한 경부간 군용철도의 교량으로 가설했다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군수물자의 신속한 수송을 위해 경부선을 복선화하면서 1941년 11월 30일 새로운 복선철교를 상류 쪽에 가설했고, 왜관철교는 경부간 국도의 인도교(步車道)로 사용하게 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시 왜관이 북한군에 넘어갈 경우 북한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북한군의 남침도강을 저지하기 위해 8월 3일 밤 11시 30분경 미 제1기병 사단장인 ‘게이’ 소장의 명에 의해 철교 제2경간과 복선 제1경간이 각각 폭파되었다. 북한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했고 이후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북진의 계기를 마련해 ‘호국의 다리’로 불린다. 유엔군 주력부대와 북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로, 폭파당시 없어진 두 번째 경간과 철골에 구멍 뚫린 포탄 자국만이 민족 비극의 상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폭파된 왜관철교 경간은 10월 총반격 때 침목 등으로 긴급복구한 후 계속 인도교로 활용하다가 교각이 홍수에 유실 또는 부식, 노후 등으로 1979년 11월부터 통행을 전면 차단했다. 칠곡군은 1991년 8월 전면 보수작업을 착공하여 1993년 2월에 인도로 개통하며 호국의 다리로 명명하고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땅히 가볼 만한 관광명소가 없는 칠곡군은 왜관철교를 중지동전적지와 다부동전적지를 연계한 호국 및 전쟁, 평화를 테마로 하는 관광벨트를 조성하여 ‘찾아오는 칠곡’을 만들어 지역 경제 활성화 등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지금 왜관철교 진입로에는 구미산업단지의 물류를 위한 도로의 다리공사를 하고 있으며 그 아래 낙동강만이 그 숱한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흐르고 있다./우태주 리포터 woopo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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