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위해 나라를 저버리겠는가" 이서우 선생은 병자호란(1637년)때 순국(殉國)한 충신으로 자는 무경(茂卿), 본관은 광주(廣州), 고려말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8세손이며 석담(이윤우)에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儀)한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이광복의 아들로 1584년 칠곡군 지천면 상지리에서 출생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11세 때에 부친상을 당하니 그 슬퍼함이 성인과 같았다고 한다. 인조 때 무과에 등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32년(인조10년)에 용양위의 병절교위(秉節校尉), 부사과(副司果)로 승서되었다. 인조 14년 청나라의 태종은 만주, 몽고의 한인(漢人)으로 조직된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동년 12월 심양을 출발, 압록강을 건너 우리나라에 대거 침입하였다. 임금이 도성을 딴 곳으로 옮겨 피난했으나 호병(胡兵)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서우가 급히 감영(監營)으로 돌아오니 군사를 이끌고 상경(上京)하라는 감사(監司)의 명령을 받았다. 상경하는 중에 모친과 처자를 만나 모친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며 탄식하여가로되 "승부(勝負)는 천(天)이요, 사생(死生)은 명(命)이라 소자의 안위(安危)를 크게 상심치 마시옵소서" 라고 말씀드리고, 또한 처자에게 일러 가로되 "어머님을 극진히 섬겨서 나를 잊으시게 해주면 내가 죽어서도 눈을 감겠다"고 당부하니 처자는 붙들고 통곡을 하였으나 어머니는 슬픈 안색은 감추고 공에게 훈계하기를 "네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니 반드시 나라에 충절 또한 다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서우는 영군(營軍) 500명을 거느리고 경기도 죽산(지금의 安城부근)의 쌍령에 도달하였다. 공이 진세를 살피니 지세가 아군에 매우 불리한지라, 적군이 만일 고지에서 내려치면 아군이 감당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어 주장(主將)에게 그 뜻을 고하였으나, 주장은 공의 진언을 듣지 않았다. 또한 화약 배정이 원활치 않음을 재삼 고하였으나 역시 들어주지 않으니 전세가 불리하였다. 1637년(인조15년) 적군이 엄습함에 아군의 탄환에 많은 적병이 죽었으나 호병(胡兵)들은 기회를 놓칠세라 풍우처럼 몰려드니 아군이 대패하여 도망병이 늘어나고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나, 공은 조금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활로써 적을 대항하니 부하 군졸이 고하기를 사태가 위급하므로 속히 피하시라 하였으나 공이 대답하되, "대장부가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죽을 것이거늘 어찌 목숨을 위하여 나라를 저버리겠느냐" 하고 고군분투하다가 드디어 적탄에 맞아 향년 54세에 순사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니 공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중훈대부(中訓大夫), 군기시부정(軍器侍副正)에 증직 되었다. 순국충신 이서우(부정공)의 8대손인 이이전는 각 지역마다 천주교를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이복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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