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목 관호리 구왜관에 설치하려다
왜관읍은 신라시대는 팔거리현, 고려시대는 팔거현에 속했다. 원래는 달오(月塢) 뒤에 있는 파산(巴山)의 이름에서 유래된 파며면이었다가 파미면(巴彌面)으로 고쳐 월매(越梅)·사라(沙羅)·장달(長達)·중매(中梅)·상매(上梅)·월오(月塢)·두동(斗洞)·평장(平章)·회동(回洞)·이동(耳洞)·관동(館洞)·상석(上石)·고제(古堤)·반송(盤松)·서매(西梅)·신매(新梅)·좌봉(座鳳)·장자(壯者)·관동(冠洞) 등의 19개 동리를 관장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노곡면(蘆谷面)의 부동(釜洞)·노호(蘆湖)·추동(秋洞)·강창(江蒼)·보병(步兵)·저동(楮洞)·대곡(大谷) 등의 7개 동리와 도촌면(道村面) 완정(完亭) 일부를 병합하여 왜관면이라 하고, 왜관(倭館)·석전(石田)·매원(梅院)·봉계(鳳溪)·삼청(三淸)·금산(錦山)·낙산(洛山)·금남(錦南) 등의 8개 동리로 개편 관장하다가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6호에 의하여 읍(邑)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석적면 아곡동(牙谷洞)이 왜관읍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칠곡군조례 제1157호로 동(洞)을 리(里)로 변경하였다.
◆명칭유래(名稱由來)
왜관(倭館)이라는 지명은 고려말기 이후 조선초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태종(太宗) 때 일본인 사신(使臣)이나 교역자(交易者)들이 머물게 하고 물자를 교역하게 하던 장소로 왜관(倭館)을 부산포(富山浦-東萊, 현 초량동 부근), 제포(薺浦-熊川, 현제 경남 창원), 염포(鹽浦-현제 울산) 및 서울 동평관(東平館-현제 중구 인사동) 등에 지어 관리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수로(水路)를 이용하는 일본인을 위하여 설치한 왜관지(倭館址)로는 두모포(豆毛浦), 절영도(絶影島), 가배량(加背梁) 및 초량(草梁) 등과 낙동강의 중간숙소인 소규모 왜관(小倭館)으로 약목면 관호리 구왜관(舊倭館), 왜관읍 금산리 강창(江倉), 김해(金海), 창원(昌原), 화원창(花園倉) 등 5개소 도합 10여 개소를 설치하였으나 그 지명이 그대로 내려오는 곳은 칠곡군 왜관뿐이다.
1904년(광무 8) 초여름 일본인이 경부선 철도공사의 시찰을 마치고 실견조사보고(實見調査報告)한 경상도(慶尙道)에 의하면, 당시 인동군(仁同郡·府) 관하(管下)인 약목의 관호동은 경상도내의 중요한 상품집산지로서 대구·청도·김천 등과 함께 일익(日益)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왜관의 위치는 원인동군(元仁同群·府) 관하인 낙동강 연안으로 동쪽은 직수(直水)에 임해 있고, 남쪽 일대는 충적지(沖積地)로 넓은 들이 펼쳐졌고, 호수가 약 100호, 인구 500여명으로 낙동강을 이용하여 짐을 운반하는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였으니 이는 지금의 칠곡군 약목면 관호리 구왜관(舊倭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경상북도사정(慶尙道事情)에 의하면 이 곳 왜관을 설명함에 있어 금후 상품집산지로서 날로 발달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하였으며, 보고서 끝부분에 일본인회사가 관장하는 경부선 철도의 정차장(停車場)을 이 곳 약목면 관호동 구왜관이 아닌 강 건너 칠곡군 파미면(巴彌面. 현 倭館邑) 석전동(石田洞) 회동마을에 왜관역을 건설하고 정차장 이름을`왜관(倭館)`이라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관은 원래 금산과 달오에 있는 파산(巴山)의 이름을 따서 파며방이라 부르다가 그 후 파미방(巴彌坊)이라 하였다. 지금의 왜관 중심지인 낙동강변은 모래밭, 갯벌, 늪 등 불모지대(不毛地帶)로 현 석전리(石田里) 일대에만 사람이 살고 있어 석전(돌밭)이란 지명으로 많이 불러진 곳이고 낙동강변의 넓은 지대가 장래성도 있고 철도역에 역사(驛舍)부지로 알맞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왜관의 지명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駐屯)이나 거주(居住)로 인하여 생긴 지명으로 잘못 알려지고 있으나 지금의 왜관지명은 약목면 관호2리 구왜관에 설치하려던 왜관역 설치로 인하여 유래되었다.
또 일제 때 기록한 통감부(統監府) 공보(公報)에 의하면 1907년(순종 원년) 3월 3일 통감부고시 제30호로 당시 인동군 약목면 관호동(구왜관)에 우편소(郵便所)의 설치를 허가 하였다가 위치를 변경하여 칠곡군 파미면 석전동 회동(지금의 왜관역 앞 옛 우체국자리)으로 옮겼으나 우편소의 명칭은 옮겨온 지명으로 고치지 않고 왜관역 이름과 함께 왜관우편소로 이름 지었다.
그 후 파미면(巴彌面)은 왜관면(倭館面)으로 고쳐 사용하게 되었고 관호동의 왜관은 구왜관(舊倭館)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1년에 간행한 일본어판 조선지(朝鮮誌)와 일부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하거나 거주로 인하여 왜관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說)은 정확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자료제공 칠곡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