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바르고 맑은 기운, 뛰어난 행실"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1851∼1926)의 자는 순화이며, 본관은 인동으로 고려말 두문동 72현인 충정공 장안세(張安世)의 17대 손이며, 우리나라 성리학의 6대가의 한분으로 관직은 의정부 우참찬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여헌 장현광 선생의 9대손이다. 8대조인 장응일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으로 증 이조판서이며, 7대조 장벽은 관직이 세자 익위사 위솔이었다. 회당 장석영은 칠곡군 기산면 각산에서 태어났으며, 각산은 마을이 형성된 후 전통 있는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여러 분야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유림에서는 ‘군자의 마을’로 회자되고 있다. 회당 장석영의 사적비 서두에 “천지간에 차 있는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굳센 맑은 기운이 모여져 뛰어난 행실로 당시에 큰 절의를 세우고 백세토록 아름다운 명성을 전하는 데에는 회당 장석영 선생이 있었다”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장석영의 항일정신과 학문사상을 함축하여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장석영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효제(孝悌)의 도리와 예의, 절도를 실행하여 보는 이가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선생은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고 끝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 곽종석과 더불어 연명으로 대궐에 나아가 소를 올려 을사오적의 처벌을 간청하기도 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칠곡의 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으며, 이후로도 비밀결사의 대표를 맡아 항일투쟁 앞장섰다. 장석영은 김창숙, 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국제회의에 청원문을 작성하여 보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파리장서’이다. 또 여러 차례의 항일운동과 만세운동 등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장석영은 당대의 이름 높은 문장가로서 여러 학자들 중에서 파리장서를 초안한 것에서도 알 수 있으며, 세태가 급박하여 도맥(道脈)이 끊어지는 것과 국운을 양성하는 길은 후진을 양성하는 것이 첩경이라 생각하고 유흥을 부흥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장석영의 저서로는 문집 43권 21책을 비롯하여 해외 독립기지 건설운동과 이주개척지 교포생활상을 담은 요좌기행(遼左紀行)이 있으며, 요좌기행은 해외 독립운동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밖에 의례집전(儀禮集傳), 대례관견(戴醴管見), 四禮節要(사례절요), 汰記(태기) 등이 있다. 장석영은 항일운동으로 1977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이복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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