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를 지킨 송원기 선생 송원기(宋遠器) 1548년(명종3년)∼1615(광해7) 자는 학무(學懋) 호는 아헌(啞軒)이며, 휘(諱)원기(遠器) 야성송씨(冶成宋氏)이다. 명종 6년(1548년)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응규(應奎)의 손(孫)자이며 교위(校尉)휘 사호(師顥)와 의인(宜人) 팔도거인 사이에서 출생했다. 종조부 시(諡) 충숙공(忠肅公) 희규(希奎)로 야계산옹(耶溪散翁) 숙부사이로 신연(新淵)공 두분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품이 근엄하고 굳세었으며 효성과 우애를 온건히 갖추었다. 선조25년 1592년 임진왜란때 명나라 병사가 팔거 칠곡(漆谷)에 진(陳)을 칠 때, 백씨(伯氏) 원도(遠度)로 경헌(敬軒)과 함께 사재(私財)와 모곡(募穀)으로 군량미 700석을 지원하였다. 체찰사(體察使)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공에게 군무십책(軍務十策)을 진정(陣精)하여 활용하도록 하였다. 선조(宣祖)31년 1598년 명나라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이조(李朝)를 무함(誣陷)하자 변무사를 지어 명나라 사신 진어사(陣御使)에게 올렸으며 진어사는 이 변무사를 명나라 조정에 전달하여 이름이 중국에도 드러나게 알려졌다. 이로 인하여 선조 38년 1605년에 형제분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 광해(光海)2년(1610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봉훈랑(成均館學諭奉訓郞)에 제수되어 출사하였다. 임금에게 육강소, 정심술(正心術) 입지기(立志氣) 진기강(振起綱) 용인제 득민심(得民心) 수군정(修軍政)을 상소하였으나 임금이 불윤(不允)하므로 징병이나 하고 낙향하여 를 아헌(亞軒)이라 하고 두문불출하였다. 동강 김우옹 문하를 출입하여 득문(得聞)하였으며 도의지교(道義之交)하여 영남사람에 알려졌다. 광해 7년에 향년 68세로 고종(考終)하였다. 현재 문집 5권2책이 남아 있으며 유림의 천거에 의하여 매양서원(梅陽暑院)에 향사(享祀)되었다. 대구시 북구 매천동에 매양서원이 있으며 2006년 병술년(丙戌年) 4月에 신축건립(新築建立) 복원(復元)되었다. 현재는 지천면 연화리 비올에 후손들이 살았으나 지금은 화물기지로 편입되어 아쉽게도 손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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