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학자를 찾아서(6)
신익황(申益愰) 선생(1672년-현종13년∼1722년-경종2년)의 자(字)는 명중(明中), 호는 극재(克齋),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통어사(統禦使) 명전(命全)의 아들로 약목면 복성리에서 태어났다.
公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호탕하여 매사에 얽매이지 않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국내의 명승지를 두루 탐방하여 안목을 넓히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公은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의 문인(門人)으로 일찌기 학문에 뜻을 두고 경전(經傳) 자사(子史) 잡지(雜誌) 패설(稗說)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섭렵하여 통달하기에 이르렀다. 공은 孔子의 경설과 여러 선현들의 학설을 모으고, 자신의 생각을 첨가하여 만든 것이 곧 경재잠집설(敬齋箴集設)이다.
公은 약목에 주자(朱子)의 학문전통을 본받아 사창수계를 창설하였다. 사창의 기능과 업무는 재난을 만나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는 봄에 곡식을 나누어 주고,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들였으며, 또 효제(孝悌)에 힘쓰고 예의를 익히고 기강을 밝혀 풍속을 바르게 하는 사람을 골라 그 공적을 높이 칭송하였다.
公은 갈암 이현일 선생을 찾아가 군자가 학문하는 법을 직접 보고 듣고 배웠다. 公은 42세에 세마(洗馬)로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성리학에 뜻을 두어 이기설(理氣說)을 연구했다. 저서로 극재집(克齋集), 운곡도산휘음(雲谷陶山徽音), 경재집해(儆齋集解), 성리휘언(性理彙言), 이기성(理氣性)정통간도(看圖), 동국승경와유록(東國勝景臥遊錄) 등이 있으며 公이 돌아가신 후 문하(門下)와 유림들이 사당을 지어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약목면 복성리 양촌(陽村)에 있는 사당 앞에 갈암의 외증손 이상정(李象靖)이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公의 아들 염(琰)이 귀(貴)하게 되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추정되고, 현재는 새로 복원된 곤산서원(崑山書院)에 배향(配享)되 어있으며 신익황 선생의 묘소는 칠곡군 기산면 행정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