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명(1646년;인조24년∼1701년;숙종27년) 공은 조선조의 숙종 때 명신으로 자(字)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이담명(李聃命)은 1646년에 성주 속현 칠곡 왜관 석전리 태어났다. 退溪(李滉)-寒岡(鄭逑)-미수(許穆)-이담명으로 영남학통을 이어받아 학자요, 정치가, 행정가였다. 이담명은 뛰어난 정치 역량으로 흉년이나 아사 직전의 놓인 영남의 70개 고을 주민을 모두 구휼하기도 했다. 이담명의 가계는 대대로 학문과 문장이 끊이지 않았고 가풍은 강직했다. 이담명은 일찍부터 당대의 거유를 닦아 24세에 대과에 합격하는 문재를 보였으니 그의 재능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1680년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집권하는 정변(경신사화)이 일어나자, 그의 아버지 이원정은 유배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장살되었다. 이 피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담명은 너무나 원통하고 억울하여 아버지의 피 묻은 적삼을 9년 동안 입고 다니면서 복수의 칼을 갈았다. 숙종은 그를 불러 "네 부친이 가장 원통했다"며 그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그의 아버지의 벼슬을 복관시키고 文翼이란 시호를 내렸다. 뒷날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슬퍼한 정조는 이 사실을 듣고 "李모의 복수는 결국 양 나라의 양공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며 그의 인격적인 효성이 지극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이듬해 영남지방의 미증유의 봄 가뭄이 들어 수확기가 되어도 한 톨의 곡식이 없었다. 당시는 보릿고개도 넘기기 힘든 실정이었으므로 영남의 70개 고을 주민은 아사직전에 놓였다. 조정은 어전회의를 열고 긴급구조작업을 펴기로 결정한 후 그 적임자엔 이담명 밖에 없다며 그를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했다. 한시가 급한 그는 경기, 충청, 함경도의 양곡 수십만 섬을 반입하고 이원정 등에게 오천냥을 주어 황해도의 양곡 칠천섬을 사오게 했다. 그는 부임지에 도착하자마자 각 군, 읍을 순시하면서 재해 현장을 둘러보고 재해 차등을 사등분하고 또 남녀노소를 각각 등분, 양곡을 골고루 배부하면서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얼마나 노심초사해가며 진력했던지 몇 개월 만에 머리가 모두 희어졌단다. 그의 부모를 위한 불같은 집념은 다시 백성을 위한 뜨거운 열정으로 꽃피웠던 것이다. 가을 수수가 예정보다 늦어지고 조달된 양곡은 바닥이 났을 때 호남양곡이 서울로 이송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직접 낙동강으로 나가 강제 하역시켜 그것으로 주민을 구휼했다. 이 사건은 곧 조정에 보고되어 그가 조정의 허락 없이 타도의 관곡을 사용하여 재해주민에게 세금을 면제한 것을 들어 그를 문책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이담명은 "백성의 생명은 조석 간에 달렸고 조정의 의논은 시일만 지체하고…. 전하께서 나의 백성을 살려달라고 신을 내려 보냈는데 이제 신이 그 백성을 다 죽이고 난 뒤 무슨 면목으로 전하를 뵐 수 있겠습니까"라고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 이현일(李玄逸)도 "그의 조치는 사복을 채울 목적이 아니고 다급한 기민을 구제하기 위한 편법이었을 것"이라며 변호하고 나섰다. 이는 이담명은 형식과 권위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임기응변의 능력을 갖춘 합리적 행정을 실행한 뚝심이 센 학자임을 반증하고 있다. 이때의 상황을 소상하게 적은 《정재문집》이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당시 영남 도민들은 그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을 세웠다. 이 비석은 현재 왜관 자고산 남쪽 기슭 애국동산에 이건돼 있으며, 또한 유덕을 기려 영남 유림들이 세운 소암재는 한울 아래 경암재, 낙촌정 3대 재사가 있으며 통칭은 동산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숙종20년 밀려났던 인현왕후가 복원되자 정권은 서인에게 또다시 넘어가고 정가에는 갑술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이담명은 창성으로 유배되어 가면서 "생사는 두렵지 않으니 늙은 어머님을 모시지 못하고 멀리 떠나니 간장이 끊어진다"며 思親曲 12장을 한글로 지었다. 이 시조는 "봄은 오고 또 오고 풀은 푸르고 또 푸르네. 나도 이 봄 오고 또 푸른 것처럼. 어느 날 고향 돌아가 노모를 볼 수 있을 것이오(1장)"라는 시구에서 보듯이 80세 노모를 그리며 읊었다. 이담명 선생은 5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치니 영남유림은 비상한 사람을 잃었다고 슬퍼하였다. /이복희 리포터 칠곡향토사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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