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를 바탕으로 인륜도덕 완성
이언영(李彦英 1568∼1639년 선조1∼인조17) 선생은 조선조 인조 때의 명신으로 자(字)는 군현(君顯), 호(號)는 완석정(浣石亭)으로 의리가 아니면 한올의 털이라도 취하지 않았던 절의지사(節義志士)로서 1568년 2월 18일 축시에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벽진(碧珍)인 공(公)은 벽진장군 (碧珍) 이총언의 21세손(世孫)으로 나이 20세가 되어 보다 참된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찾아 갔는데 한강은 "요사이 젊은 사람중에서 마음가짐이 확연하고 자질이 굳건한 사람이 흔치 않은데 이제 그대를 보니 이와 같으니 후일 크게 성공 하리라"고 했다.
유년기에 집자성구(集字成句)가 가능했던 공(公)은 소년시절에는 서사원(徐思遠)의 훈도를 받았고 20세가 갓 넘자 그는 정구(鄭逑)로부터 심성론과 절의학을, 장현광(張顯光)으로부터 심오한 우주철학을 배웠으며, 공은 영남우도에서 맹열한 의병활동을 전개한 오운(吳雲), 조종도(趙宗道), 박성(朴惺), 성안의(成安義)등 제공과 함께 토적(討賊)을 의논하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후 1601년(선조34)에 효렴(孝廉)의 천(薦)으로 순능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1603년(선조36) 10월 1일 36세의 나이로 임란(壬亂) 때문에 10년만에 처음 실시되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 가문과 고장을 크게 빛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균관에서의 공부를 그만두고 천리를 홀로 달려와 가산을 팔아서 마려한 전마 40필을 갖추고 곽재우의 의병진에 참여하고 동지들과 같이 외적토벌에 전념하는 한편 진양으로 김성일을, 창녕으로 이원익을 찾아가 왜적 섬멸에 앞장선 사실등으로 미루어 공은 충효를 바탕으로한 강력한 실천력을 겸비한 우국지사, 절의지사임에 틀림없다. 이와같이 공은 특히 담력이 있어서 선조때 막좌 (幕佐)로 10여년동안 외적 격퇴에 전심전력을 다하였으니, 그의 출처관은 충효를 바탕으로한 인륜도덕의 완성에 있었고, 이를 지탱하는 이론적 기반은 이황(李滉) 학통에서 구했다.
公은 향리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인조반정후 영남의 절의지사를 지칭하는 8학사로 선정되고 나라의 부름을 받아 다시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되었고, 1633년(인조11년) 1월에 선산도호부사를 제수받고 흥학(興學)을 도모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1628년(인조 6년) 12월∼1630년(인조 8년) 3월까지 밀양도호부사로 제임중 전란으로 피폐해진 학교를 세우고 공무를 틈타 친히 강학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향음주례를 하도록 하는 등 민심을 교화 선정을 베풀었다.
이같이 지방수령직을 수행하면서 백성을 진심으로 어루만지고 그들의 생활향상과 흥학을 도모하는 한편 향시(鄕試)를 공정히 집행, 국법질서 확립과 민심안정에 주력해 많은 사람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임기가 만료되어 귀향하는 公의 행리(行李)에는 몇 권의 책과 옷이 전부였으니 公은 관직에 임하면서 항상 청렴과 근면을 위정지도(爲政之道)의 으뜸으로 삼았다. 관에서 물러난후 성주(星州)에 완석정(浣石亭)을 세워 학문을 연구했고, 후진교육에 전념하였으며 현지 묘는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 산80번지 촌후산(村後山) 임좌(壬坐;서북 방향을 등지고 앉은 자리)이며, 석물(石物)이 갖추어져 있다.
처음 완석정은 1621년(인조13) 성주(星州) 동쪽 30리 지점인 선남 내곡 낙동강변에 건축시 완암정(浣巖亭)이라 했다가 公의 말년에 보수때 자호(自號)를 따서 완석정(浣巖亭)이라 하게 되었으며그 후 자손들이 완석정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로 옮겨, 현재는 강학지소(講學之所)와 종당(宗當)으로 사용되고 있다.
완석정을 운(韻)으로한 공(公)과 그의 아들 이창진(李昌鎭)이 지은 별지(別紙)와 같은 시(詩)가 경산지(京山紙)와 칠곡지(漆谷誌)에 전해오고 있다.
公의 13대 종손 이종건(李鍾健)이 성주군 초전면 월곡1리 809번지 경북문화재자료 제163호인 완정고택(浣亭古宅)과 사당(祠堂)을 관리하고 있다./이복희 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