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군 관광객 도내 하위, 브랜드화 시급 칠곡군이 도내에서 관광객수가 하위를 기록, 국민 누구나 즐겨 찾는 관광지 개발 등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지난 15일 경북도에 따르면 지난 9월말까지 경북도를 찾은 관광객은 6천300여만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5천500여만명보다 15%인 800여만명이 늘었다. 도내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은 곳은 포항시로 438만여명이었으며 다음으로는 성주군(174만명), 안동시(126만명), 영덕군(121만명)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관광객이 가장 적었던 곳은 울릉군(4만명), 상주시(4만1천명), 칠곡군(4만2천명), 영주시(5만2천명) 등이었다. 도관계자는 "시군들의 가을 및 겨울 축제가 끝나면 순위가 다소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수헌 왜관농협장의 호국관광벨트 조성과 관련한 제안내용이다. 칠곡은 호국의 고장이자 순교의 고장이다. 우리는 민족최대의 비극인 6·25전쟁을 겪었다. 거듭되는 패전 속에 국군과 유엔군은 이 고장 낙동강과 다부동에서 결사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일진일퇴하는 피바다의 격전을 치르면서 승전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낙동강전투와 다부동전투의 승전으로 대한민국과 민주주의가 오롯하게 보전되었기에 이 고장을 호국의 고장이라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또한 왜관읍 매원 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 경주의 양동 마을과 함께 영남3촌이라는 오랜 전통과 명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금오산, 가야산, 팔공산이 삼각지점을 이루며 그 가운데로 낙동강이 관류하여 지세가 안정되고 물산이 풍부하여 전·근대사를 통해 기백이 넘치는 걸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향반의 지역이며 그 어떤 고장보다도 역사의 향기가 짙게 배어있는 고장이다. 한국가톨릭사에 의하면 1784년 천주교가 태동할 당시 달오리(현재 왜관읍 왜관8리)에 살아온 유학자 창녕 성씨가 처음으로 천주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고장에는 이미 224년 전부터 메시아의 씨앗을 틔워왔다고 볼 수 있으며 이렇게 시작된 천주신앙의 포교 활동은 병인년(1866년) 천주교 대박해 시 산골 오지로 숨어 들어간 곳이 신나무골 성지와 한티 성지였다. 전국에서 가톨릭 성지가 두 곳 이상이 되는 곳은 흔치 않으며, 아울러 이 고장을 순교의 고장이라 자랑할 수 있다. 명실상부하게도 낙동강이 굽어 보이는 곳에 우뚝 선 가실성당은 천주교 공인에 따라 1892년에 건립되었고, 서울의 명동성당과 동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그 역사적 의미는 자못 깊다. 인연은 더 좋은 인연을 따라 만나는 것이 섭리라면 공산주의를 피해 베네딕도 대수도원이 함경도 덕원에서 왜관으로 옮겨와 이 지역사회의 정신문화와 교육의 기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던 이 고장 사람들의 고귀한 기개와 절대적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이 또한 우리 고장의 자긍심이 되고있다. 그리고 아직 가톨릭사에 등재되지 않은 중요한 천주교 역사의 족적이 이 곳 왜관읍 봉계리의 윗마을인 옛 장자동에 있다. 천주교 대박해 무렵인 1860년대부터 이 장자동에는 성당공소가 설치 운영되고 있었고 29가구에 109명이나 되는 신자촌 마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올해 봄까지만 해도 29가구나 살았던 돌담이 옹기종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옆에는 옹기를 만들던 가마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리고 지난 여름에는 청동 십자가가 이 곳에서 출토되기도 했다. 바로 이 장자동에서 종교계와 우리 사회에 한국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이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아버님과 어린 시절을 보내고 누님은 이 곳에서 태어났다고 신동교회 평신도회장이며 신나무골 성지화를 위해 애쓰시는 마백락 회장이 김수환 추기경님께 직접 들었다고 했다. 오지와 다름없는 이 장자동에는 조선 고종 때, 서울 특별시장격인 한성판윤을 제수하고 대한제국 당시 철도우정국대신 자격으로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철도 설치를 직접 관장하신 이채연씨가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 장자동 돌담 집터와 옹기를 굽던 가마터는 역사적으로 꼭 보전해야 할 가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규 골프장 공사로 인해 요식적인 문화재 발굴만 하고 무참히 흙더미에 묻혀 버렸다. 지금은 이 곳에 관한 짤막한 내용을 기록한 팻말만이 외롭게 서 있다. 골프장 건립을 하는 사람들의 역사의식과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인가 싶어 허탈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근대화가의 거목인 이중섭 화백이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구상시인과 함께 베네딕도 수도원을 따라 왜관에 와서 생활한 것은 널리 아는 일이다. 6·25남침으로 이중섭화백이 제주도 서귀포에 피난 가서 잠시 거처했을 뿐인데 몇 해 전 서귀포시와 그 지방의 뜻있는 예술인들이 모여 시내에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고 수십억원을 들여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잠시 머물다간 사람이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서귀포 시민들의 높은 가치의식이 이중섭화백을 서귀포 사람으로 귀화시키고, 서귀포 시민들의 자랑으로 독점하여 관광객 유치라는 미래의 자산을 획득했다. 왜관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이중섭화백을 놓친 것도 아쉽지만 박해받던 천주교의 산역사를 보여 주는 장자동 돌담터와 옹기터를 보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최근 6·25로 인한 낙동강 중심의 승전에 대한 국가적 사업을 구체화, 활성화 시키고, 카톨릭계는 천주교 박해의 상징인 신나물골 성지와 한티성지를 축으로 장자동 공소를 중간 기착지로한 기념관 등을 만들어 우리 나라 성지순례의 메카로 만든다면 호국의 고장이자 순교의 고장인 칠곡을 널리 알려 많은 국내외인들이 탐방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우리 고장은 명당의 고장이기에 건드리기만하면 묵은 기왓장 같은 이야기가 주저리주저리 쏟아진다. 기산면 각산리 뒷산 봉화산 정상에는 우리 고장을 사수하고 낙동강을 굽어보며 지키는 봉화대의 유적이 남아있고 석적읍 중지리엔 위급함을 알리는 나라의 비상선인 파발에 의한 역마제도의 하나인 창마(倉馬)라는 옛 지명을 간직하고 있으며 왜국(倭國)과 국제교역에 의한 조공 관세의 보관 필요에 따라 만든 성주 칠곡을 중심으로 한 조세보관창고가 왜관읍 금산리의 옛 지명을 강가에 창고가 있다고 하여 강창(江倉)이라고 하며 이러한 문화유산을 많이 발굴하여 잘 다듬고 가꾸어서 칠곡 고장의 보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우리 고장은 6·25라는 비극 앞에 침몰하는 대한민국호를 지킨 호국의 고장이고, 천주 신앙의 근원지이고, 순교의 고장이다. 호국과 순교의 역사를 연계하여 브랜드화하고 테마화한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칠곡의 훌륭한 성장 동력이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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