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짙어가는 6월, 우리는 다시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였다. 6일은 현충일이며, 또 25일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6·25전쟁 발발 58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처럼 호국·보훈의 달은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신명을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위훈을 우러러 추모하고 국가유공자와 그 유가족에게 따뜻한 정성을 보내는 기간이다. 또한 그분들이 보여 주었던 높고 깊은 애국애족정신을 되새기면서 이 나라 이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마음속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달이기도 하다.
정부에서는 매년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설정하여 열흘 단위로 추모의 기간, 감사의 기간, 화합과 단결의 기간으로 나누어 중앙과 각 지방에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명복을 비는 추념행사를 거행하고,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의 희생과 영예를 기리며 예우와 감사의 뜻을 표하는 한편 화합과 단결로 온 국민이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펼치고 있다.
이렇게 정부에서 6월 한 달 동안 추모와 감사의 마음으로 다양한 행사를 펼치는 것은 과거만을 생각하며 어둡고 침울한 마음을 갖자는 것이 아니라 선열들의 희생을 현재에 되살리고 미래를 밝히는 가치로 우뚝 세우고자 함에 있다.
따라서 칠곡문인협회서도 매년 6월 5,6일 양일간에 걸쳐 낙동강 둔치에서 `낙동강·자연· 평화`를 주제로 하는 호국보훈의 문화행사를 치루고 있다.(올해는 우천관계로 군민회관에서 개최)
이제 다시는 6·25같은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호국 영령들은 절대로 그런 비극을 원하지 않는다. `꽃잎처럼 스러져간` 호국영령들의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이 곡은 9·28 서울 탈환 후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전진하고 있을 무렵 만들어졌다. 이 노래가 발표되자마자 온 국민의 애창곡이 되어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펴져나갔다.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에는 하얀 전적비가 우뚝 세워져 있다. 길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산으로 폭 쌓인 다부동은 대구에서 경북 서부와 북부로 갈 수 있는 요충지였던 셈이다. 이 곳을 뺏기면 대구까지는 삽시간에 점령당할 수 있는 그런 요충지였다.
1950년 7월, 더 이상 남쪽으로 밀려서는 안될 처지에 놓인 국군과 유엔군은 현 전선에서 사수명령(死守命令)을 내렸다. 백선엽 국군 1사단장은 고지마다 주검이 쌓이고 시체를 방패삼아 싸우고 또 싸우는 다부동 방어선 모습을 두고 "나는 지옥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모르나 이보다 더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다 파괴한다. 생존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고, 그래서 더 이상 비참할 수도 더 이상 나락(奈落)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지옥이 바로 전쟁터다.
6·25 전쟁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사주(使嗾)를 받은 북한 공산집단의 김일성이 기습 남침한 전쟁으로, 공산세력의 세계적화 의도를 대한민국은 16개 참전국과 함께 저지한 세계자유수호 전쟁으로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대표한 전쟁이었다.
"Stand or Die (버텨라! 아니면 죽는다)"
전쟁발발 3일만에 서울을 함락한 인민군은 거침없이 남하(南下)하기 시작했다 그해 8·15 광복절에 맞추어서 남진통일(南進統一)을 이루겠다는 목표로….
7월말이 되자 인민군은 전국토의 90% 정도를 점령했고, 이제 남은 지역은낙동강 이남 뿐이었다 워커 8군사령관은 영덕에서 마산에 이르는 낙동강에 방어선(일명 워커 라인)을 치기로 했다. 그가 방어선을 치면서내린 첫 명령이 바로 "Stand or Die" 였다. 그만큼 전황은 다급하고 심각했다.
낙동강을 두고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는 어린 청소년들까지도 동원된 것이다. 6·25를 직접 겪어본 나에게는 다시 한 번 이 노래를 가만히 불러본다. 그리고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가고 죽고 죽이는 전쟁터를 그려본다.
평화는 염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에게는 6·25가 지금도 `현재 진행형` 이다!/박호만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