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일본에서 19세 된 청년이 계곤폭포를 보면서 대자연의 웅장함에 비해 한없이 왜소한 자신을 너무나 부끄럽게 생각한 나머지 염세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오 척도 안되는 이 몸이 우주의 신비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라는 이 짤막한 글을 신발에 접어두고 폭포로 몸을 던져 자살을 했던 것이다. 자살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자 감수성 예민한 십대들이 그 영향을 받아 잇달아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 두보(杜甫)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60평생 주옥같은 시를 남긴 그는 중국 일원에서 제일 높다는 곤륜산을 바라보며 노구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에 곤륜산 정상을 올라보고 싶어 했으며 끝내는 힘겹게 산 정상에 올랐다. 시인의 성품을 갖고 태어난 두보(杜甫)는 산 정상에서, 자연의 신비와 웅혼(雄渾)함에 한껏 도취된 나머지 독백을 하기를 “나는 곤륜산보다 5척이나 더 높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환경의 힘이 너무나 커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통감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불경기다 해서 이중 삼중의 고통을 당하면 누구나 자포자기하고 싶은 심정이 되기 십상인데 그러나 우리는 역경에 처할 때마다 일본 청년처럼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두보의 자긍심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역경 위기를 국면전환의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불경기를 탓하며 호황의 훈풍이 불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듯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수난이나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개인이나 국가는 긴장감에 빠져본 경험이 없어 도약할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역경을 극복해 본 사람은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욥기에서 욥은 그가 당하는 고난을 친구들은 그의 죄 때문이라고 보았으나 그는 참아내기 힘든 아픔과 고통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하여 단련시키고 바로 잡아주기 위한 하느님의 채찍이라고 보았으며 그 고난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치며 욥은 “이제껏은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기 42:5)라고 고통과 아픔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났다는 이야기이다.
맹자의 이런 말은 또 다른 큰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장차 사람에게 큰 일을 내리려고 하시매 반드시 먼저 그들의 심지를 괴롭히고 그들의 살과 뼈를 힘들게 하며 그들의 배를 굶주리게 하고 그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만들지만 이 모두는 그들의 마음을 분발케 하고 자기의 성질을 참게 하여 자기가 해내지 못하던 일들
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孟子’ 告者章句下 15)”했다.
역경위기를 국면전환의 기회로 삼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의 쓰임 받는 큰 그릇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현재의 아픔과 고통은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세상은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태주 리포터 woopo20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