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읍 석전리 속칭 `후문` 이곳은 미군 부대 캠프캐롤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한때 60∼70년대 달러와 양공주, 미군 물자가 흥청거렸던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 미군부대가 있는 동네와 읍소재지 문화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문화라 하면 대중문화, 지역문화, 토속문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들어보면 무엇인지 대충 이해가 간다. 그러나 생소한 문화가 있다. 바로 ‘기지촌문화’라는 이름이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군기지가 주둔한 지역을 기지촌이라 했다. 기지촌 문화는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시대의 아픔이기도 하다. 이것을 소위 문화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전쟁 이후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빵, 소시지, 햄, 잼 등은 환상적인 음식이었다. 기지촌 주변은 여인들이 미군 병사들에게 몸을 맡기고 생활을 해결하던 현장이기도 했다. 미군부대 음식들이 흘러나와 새로 만들어진 것이 ‘부대찌개’의 유래다. 부대찌개는 미군부대 주변에서 생겨났고 우리의 찌개 문화에 미제 소시지와 햄 등이 들어가 탄생한 국적 불명의 음식이기도 하다. 미군병사들이 먹고 남은 음식 잔반을 모은 이른바 ‘꿀꿀이죽’을 먹고 끼니를 해결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친구 아버지는 미군부대를 다녔고 퇴근할 때면 빵과 햄, 치킨, 미제 양과자가 들어있는 봉투를 가슴에 안고 돌아오곤 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시대에 미군부대를 다닌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초콜릿과 파인애플 통조림, 케이크 등을 먹을 수 있다는 의미도 됐다. 그 시절, 미군부대 다니는 집안의 아이들은 과외를 받고 좋은 옷을 입었으며,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녔고 햄과 소시지 등 고기를 먹고 자랐다. 반면 부모가 농사를 짓거나 고아원의 아이들은 꽁보리밥을 먹으며 허리에 보자기로 책을 싼 책보를 둘렀다. 지나가던 그 동네는 다닥다닥 붙은 골목에 영어 간판이 어지럽고 팔과 다리를 드러낸 여인들이 붉은 커튼 사이로 보이기도 했고 피곤한 눈빛으로 밖에 나와 지나가던 아이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철없는 어린 눈에 화장을 하고 양장으로 멋있게 뽑아 입은 여인들이 하이힐을 신고 미군병사와 팔짱을 끼고 지나가는 모습은 예뻐 보였고 우리들은 흘끔거리며 쳐다보고 옷과 하이힐을 부러워했다. 이들은 분단이 빚은 비극의 여성들이었다. 전쟁으로 피폐하고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죄로 말이다. 전쟁은 여성들을 이렇게 전락하게 하며 어린이들에게 구걸하게 만든다. 어릴 적 미군을 잘 만나 국제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갔다는 얘기도 종종 들려왔다. 당시 미국은 환상의 국가였고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저 너머 무지개 같은 나라였다. 그러나 한국에 나온 미군 병사들 대부분이 학력이 없어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그런 사람이 미국에서 사는 삶이란 오죽하겠는가. 국제결혼으로 부러움을 받으며 미국을 건너간 이곳 여성들의 생활 또한 하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뻔 한 일이었다. 미군부대 주변을 한국군 전경들이 정문을 지키고 있던 모습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었다. 미군 장갑차에 2002년 효순·미선이를 비참하게 죽었고 전 국민들이 분노했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반미 시위와 불평등한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사회단체들의 소리가 높았다. 그때 미군부대 주변은 전경들이 철통같이 둘러싸고 미군을 보호(?)하고 있었다. 미군부대와 함께 군사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군사보호법으로 묶여 있어 개발에 제한을 받았고 부분적으로 풀린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편의점(석전약국)에서 들어가는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가는 골목의 크기는 거의 바뀐 게 없다. 낮고 닥지닥지 붙은 집마다 작은 창에는 어김없이 빨간 커튼이 쳐져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피곤한 얼굴로 집 앞에 나와 우리를 구경하던 그녀들의 얼굴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남북이 통일되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한국 전쟁의 흔적이리라. 영어 클럽 간판들이 쓸쓸하게 기지촌을 지키고 있고 왜관시가지에는 헬기장과 미사일기지를 반대하는 현수막이 묵묵히 거리를 지키고 있다. /우태주 리포터 woopo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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