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東明)은 칠곡 읍내(邑內)를 중심으로 볼 때, 그 위치가 서북쪽이다. 그래서 본래는 서북면(西北面)이라 했던 곳이다. 그런데 1914년 일제는 이 지역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기존의 서북(西北)면에, 하북(下北)면과 동북(東北)면 일부를 병합하여 당시 서북(西北)면에 있던 ‘독명(犢鳴)’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동명(東明)’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한편으로 이 ‘독명(犢鳴)’과 ‘동명(東明)’은 우선 듣기에는 그 이름이 얼핏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독명(犢鳴)’과 ‘동명(東明)’은 글자의 음(音) 뿐만 아니라 그 뜻 자체가 완전히 다른 이름이다. 물론 한글 이름에 있어서 ‘독명’이 자음동화 현상에 의해서 ‘동명’으로 바뀔 수는 있다. 그리고 한자(漢字)는 그 표기상 오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순히 우리말의 음운현상이나 표기상의 오류로만 보아 넘기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일제는 당시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시켜, 그들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런 일제가 우리 조상들의 생활이나 풍속 등이 그대로 내재되어 있는 이 ‘독명(犢鳴)’이라는 우리의 옛 땅이름을 그냥 그대로 놔두었겠는가 하는 말이다. 본래 ‘독명(犢鳴)’은 지금의 동명(東明)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4km 되는 지점에 있었다. 그곳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당시 행상인들의 왕래가 아주 많았고, 그들의 숙식소인 주막촌(酒幕村)이 있었던 곳이다. 그 주막촌(酒幕村)을 당시 사람들은 독명원(犢鳴院)이라고 불렀다. 당시 그 독명원(犢鳴院)의 일반인들 숙식소(宿食所)에는 길손과 함께 짐을 싣고 한양을 오가던 소달구지들이 줄줄이 널어서 있었다. 그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던 소들이 날이 저물고 젖마저 붓자, 집에 떼어놓고 온 송아지가 생각나서 떼를 지어 울었다고 한다. 그로 말미암아 ‘어미 소가 송아지 생각으로 울었다.’는 뜻으로 그곳을 송아지 독(犢)자 울 명(鳴)자를 써서, 독명(犢鳴)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이 독명(犢鳴)이란 옛 땅이름 하나를 통해서도, 지난날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이나 사고방식 등 그 원형의 역사를 약간이나마 재조명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옛 땅이름이 어느 한 개인에 의해 갑자기 명명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집단 사이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떤 이는 “우리의 옛 땅이름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라고 서슴없이 말하곤 한다. 그만큼 우리의 옛 땅이름은 역사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재술 순심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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