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의 무한한 자유공간에서 네티즌들은 나만의 세계를 만끽한다. 그 시간 만큼은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는다. 네티즌이 조작하는 대로 컴퓨터는 100% 순종한다. 또 주인이 클릭하는 대로 인터넷은 열린다. 이를 두고 이원 시인은 자신의 시집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이렇게 적었다. "잉크 냄새가 밴 조간신문을 펼치는 대신 새벽에/무향의 인터넷을 가볍게 따닥클릭한다/신문지면을 인쇄한 모습 그대로/보여주는 PDF서비스를 클릭한다/코스닥 이젠 날개가 없다/단기외채 총 5백억달러/클릭을 할 때마다 신문이 한 면씩 넘어간다/나는 세계를 연속 클릭한다/클릭 한번에 한 세계가 무너지고 한 세계가 일어선다" 인터넷 세상과 주체적 세계 그러나 자신이 클릭해서 나타난 인터넷 세계가 진정 자신의 참된 세계일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있는 `비본래적 인간`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실존)을 잃어 버릴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인터넷 중독자 등은 자신의 실존(實存)을 망각한 채 밤새도록 `인터넷의 메커니즘`(mechanism)에만 몰입돼 있을 뿐이다. 네티즌들은 `어떻게 살아야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하는 인생의 근본적 과제는 물론 골치아픈 자신의 문제 등을 모두 잃어버리고 인터넷을 즐긴다. 아니 신경쓰이는 일을 망각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특히 인터넷 중독자들은 인터넷과 접속돼 있지 않는 시간은 공허하고 불안하기에 늘상 인터넷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불안한 마음과 괴로운 심정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다. 일상적 인간은 이를 떠올리면 자신이 불행해지는 것 같아 원초적으로 떠올리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수시로 엄습해오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 등에서 탈출하기 위해 술에 취하거나 인터넷, 섹스, 도박 등에 탐닉하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경우 세계에서 인터넷접속 시간이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이는 네티즌들이 자신이 원하는 자료와 정보를 곧바로 인터넷에서 찾아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스탑(One-stop)`에서 `넌스탑`(Non-stop)으로 치닫고 있는 초스피드 시대에 인터넷은 네티즌의 다양한 요구를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들어준다. 인터넷은 `나의 클릭이 곧 해결`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켜 준다. 남의 정보를 차용하는 인터넷 그러나 그렇게 인터넷에서 빌려온 지식과 정보가 진정한 나의 지식이나 지혜가 될 수 있을까. 인터넷에서 차용된 정보와 지식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나의 진정한 앎과 지혜가 될 수 없다. 인터넷에서 그대로 가져온 정보를 배우고 익혀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지는 않는한 인터넷은 남의 정보를 빌려주는 차용도구에 불과하다. 인터넷에 가면 언제나 내가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데 구태여 힘들여 정보와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사고방식이 네티즌 사이에 팽배해 있다. 인터넷은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정보의 상품으로 네티즌을 유혹한다. 백화점 상품처럼 사고 팔 수도 있다. 인터넷의 정보상품은 나의 혼이 깃든 나의 작품이 아니라 남의 것이다. 따라서 나의 색깔과 고유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티즌들은 인터넷에서 남의 상품을 그대로 가져와 마치 나의 작품인 양 사용하기 쉽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도용이다. 정성스레 올려놓은 남의 작품을 애써 이해하고 나의 것으로 활용하려는 시간도 가지지 않고 돈주고 상품을 사듯 순식간에 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서양철학자들 가운데 근세철학의 선구적 역할을 한 데카르트는 외부와 남의 것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사고나 자신의 내부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도출하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동원했다. 그 결과 데카르트는 `신학의 시녀`가 된 중세 철학을 마감시켰다. 그는 인간을 지배한 중세의 절대적 신의 존재를 무너뜨린 철학자이다. "신이 죽어야 인간이 산다"며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이체에 앞서서 말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창조한 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중세시대의 막을 내리고 인간을 신의 피조물이 아닌 주체자로 등장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는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해당한다. 신이 창조주일 때는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고 신의 노예이다. 따라서 인간이 주체적으로 설 기반은 없어지고 오로지 신만이 인간의 예배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반면 인간이 신의 노예에서 해방, 주체자로 뒤바뀔 경우 인간이 되레 신을 만들고 신을 자신들의 맘대로 창조하게 된다. "태초에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성경 구절이 데카르트의 근세철학을 계기로 "인간이 신을 창조하고 있다"로 전환된 것이다. 데카르트는 중세의 신을 비롯, 모든 것을 회의하면서 철학을 출발한다. 만약 절대적인 신이 존재한다면 하늘나라나 저쪽 바깥에 있을 것이고 내안에 없는 신을 나는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외부에 있는 저 테이블과 의자 등 물건은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면서 그렇게 연장적(延長的)으로 존재하는데 어떻게 내 이성이 그걸 제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데카르트의 회의적 고민은 극에 달하게 된다. 혹시 속이기를 좋아하는 악마의 신이 있어 내가 이것을 의자 등으로 인식하도록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나는 내가 인식하는 것 가운데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나의 이성이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오랜 여행과 고독한 명상을 통한 이같은 데카르트의 회의적 고민은 급기야 한줄기 지혜의 빛을 발견한다. `철학적 깨달음`(覺)의 순간이다. 나는 내가 인식하는 모든 걸 의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다 회의하면서도 회의할 수 없는 유일한 실체가 있다. 그것은 바로 회의하고 있는 나 자신을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이다. 회의하고 사유하는 정신만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문구가 데카르트의 제1명제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내가 의심하고, 심지어 악마의 신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의심하는 순간에도 나의 사고와 의심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심(사고)하는 나`가 곧 나의 존재이고 나의 존재를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의심하거나 사고하는 것`, `나`와 `나의 존재`는 따로 구분돼 있지 않다.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외부에 존재하는 신을 비롯한 모든 걸 의심하는 의심과 사고, 의식, 인식 이 모두가 내자신에게서 밖으로 나간다는 명백한 사실을…. 따라서 `사고하는 나`는 모든 인식과 사고의 출발점이다. 인식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내안에 있는 나의 이성이 바깥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고와 인식의 주체가 신이 아니라 나이다. 인간중심의 주체 철학이 처음으로 데카르트에게서 정립되는 순간이다. 이로써 그는 이성의 시대를 여는 근세철학의 아버지가 됐다. "나는 클릭한다"와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의 명제가 인터넷 등이 성행하는 오늘날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대체됐다. 이성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근세(modern)의 절대이성주의는 인간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좌초하고 말았다. 모더니즘(modernism)의 종말과 함께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붕괴되고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rnism) 시대가 도래했다. 어떠한 완벽한 이론이나 이성의 논리도 전체의 세계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서 근세 `이성 시대`의 종말을 고한 포스트 모더니즘은 다양성과 대중성을 중시하게 됐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성과 절대이념, 이데올로기 등도 거부했고 급기야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활짝 열었다.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사회주의와 이 체제의 전형인 소련이란 국가가 무너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후기산업사회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더니즘의 산업사회는 대량생산 시대였지만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뤄졌다. 이제는 매스컴과 컴퓨터산업의 지식·정보화시대를 맞아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의 과소비를 위해 매스컴 등의 광고가 범람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나는 클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생겨난 것은 당연할지 모르겠다. 초고속 인터넷 쇼핑몰 및 인터넷 주식거래, 인터넷 뱅킹 등은 고도로 발달된 첨단 기술에 의해 초고속으로 대량 생산되는 상품을 대량으로 판매하기 위한 시대적 산물이다. 따라서 인터넷 클릭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터넷 클릭으로 나의 존재를 띄우는 것은 `넓은 세계의 웹`(www:world wide web) 사이트와 컨텐츠를 열어보는 것에 불과하지 데카르트적 나의 주체를 확인하는 실존적 차원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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