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架山)의 남쪽 남원리(南元里)로 들어서면 헌방 마을이 보인다. ‘헌방’이 도대체 무슨 뜻을 지니고 있을까? 그 의미가 금방 와 닫지 않는다. 이 ‘헌방’의 유래(由來)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의병장 김덕령 장군이 가산바위에 앉아 천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홀연히 오색구름이 나타나 두 장군에게 하는 말이 “저기 오는 저 구름이 보이느냐? 저 구름 속에 왜장이 타고 있다.” 하고는 사라졌다. 이 말을 들은 김덕령 장군은 “구름이 땅에 내려오기 전에 왜장을 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공중으로 날아가 왜장의 목을 베었다. 그때 그 왜장의 시체가 흡사 헌방아(헌 디딜방아)처럼 이 마을에 떨어졌다고 한다. 여기에 연유하여 이 마을 이름을 헌방(헌방아)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헌방 마을 뒷산 일부에는, 그때 그 왜장이 흘린 피 때문에 아직도 붉은 색을 띠고 있다고 한다. 김덕령(金德齡) 장군은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 몸이 민첩하고 신용(神勇)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조선의 조자룡’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의병을 일으켜 20대 젊은 나이에 호익장군(虎翼將軍)이란 칭호를 받았다. 그때 장군은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용맹을 떨쳐 왜군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중에 반란군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29살의 젊은 나이에 옥사(獄死)했다고 한다. 그때 장군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노래한 춘산곡(春山曲) 한편이 전해지고 있다.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죽는구나. 저 산의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이후 김덕령 장군의 이러한 억울한 죽음과 미완의 일생에 대한 백성들의 안타까움은 참으로 컸다. 그래서 그에 대한 전설이 많고, 아직까지도 그는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대체 출신이 무엇이고 당파가 무엇이던가. 진실과 정의에 눈과 귀를 막아버린 암투의 역사에 기가 막힌다. 왜적을 눈앞에 두고 무고한 장수를 죽인단 말인가. 과연 현명하지 못한 임금과, 모함과 질시로 날을 샌 당쟁의 결정판이다. 국가적 불행이란 결국 개인이나 패거리의 사욕에서 비롯되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정재술 순심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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