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왜관읍 매원리는 이조 초기 세조, 예종조에 극견(克堅)선조가 성주목사로 부임하면서 그의 아들 승사랑공이 최초 칠곡 입향조이다. 그리고 매원 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영남의 삼대(三大) 명가 마을로 알려져 있다.
특히 칠곡 입향의 중흥 조인 이윤우(석담, 1569∼1634) 선조께서는 일찌기 조정에서 낙향하여 고향 마을에서 후손·후학을 위하여 감호당(鑑湖堂) 정사를 지어 많은 인재를 길러내어 문익공 시호와 함께 영의정 추서를 받은 적손자 원정과 둘째 손자 원록, 원례와 함께 세 손자가 국반시험에 장원을 하고 증손자 담명은 문과 아헌을 하였으며 그 후 장원 급제한 후손들이 10여명에 이르고 있다. 이와 함께 후세 사람들은 매원을 일명 장원방(壯元房)이라 호칭하였다. 이러한 공적과 사회적 추앙을 받아서 성주 회연서원, 칠곡 사향서원에 퇴계 전통 학맥의 중추적 역할을 한 정한강과 함께 배향되어 사회에 사표가 되었다.
정3품 이하 당하관이면서도 학문적 깊이와 덕망을 갖춘 양반선비 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인 한림(翰林)의 벼슬에 4대 내리 석담공, 낙촌공, 문익공, 교리공을 귀하게 배출하였으며 이와 함께 전국적으로 흔하지 않은 불천위(不遷位)의 작위를 나라와 유림에서 하사 받은 분이 석담공, 문익공, 박곡공, 묵헌공 네 분이 계시며 그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 지금도 유지·관리되고 있다.
또한 박곡공 종택은 본관 정침이 38칸이며 사랑채, 행랑채, 청지기, 곡간 등이 60여 칸으로 입구자형 우람한 건물이 6·25때 주위의 많은 건물과 함께 폭격으로 완파되었으며 그 아래 사랑채는 10여칸으로 주춧돌의 흔적만 외로이 남아있으며 그 자리에 옛 모양대로 후손들이 복원 계획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해은 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복원되었고 이와 함께 매원이라는 울타리 한마을 안에 사송헌재(齋), 관수재, 용산재, 귀후재, 아산재 등 많은 재실이 아직까지도 유지·관리하고 있으며 이곳은 일가 친척간, 이웃간 백대지친(百代之親) 하라는 화합과 전통 교육의 장소로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향리의 향반으로서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지도·노력하였기에 나라가 인정한 격상된 국반의 존칭 대우도 받았다.
일제 치하 망국의 국치인 근세 사회에서도 칠곡 호국의 성지 애국동산(작오산)에 독립지사 기념비가 11위가 계시는 곳에 이수택(일몽), 이두석, 이동영, 이수일, 이담명(불망비) 등 5위가 매원을 모태로 한 석담 후손도 수문장이 되어 호국의 고장을 지키고 있다.
칠곡은 호국과 순교의 고장이며 매원을 선비의 영남 삼촌(三村) 전통·문화재 마을로 복원한다면 삼각축이 형성되고 낙동강 연안 개발과 함께 관광벨트화, 칠곡군 미래 성장동력의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된다./이수헌 왜관농협 조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