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독립운동가를 찾아서(3) 정부는 제91주년 3·1절을 맞아 왜관읍 매원리 출생인 이수각(국내항일) 선생 등 독립유공자 105명에 대해 포상했다. 이수각 선생의 호는 긍제 자는 계주(季周)이며 본관은 광주(廣州)로 조선중기의 대사헌을 지낸 박곡(朴谷) 이원록(李元祿)의 10대손이며 1880년(고종17년) 11월20일 유학자이신 원팔(原八)이규영의 아들로 경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385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긍제 이 수각 선생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여 장부의 기질을 타고 났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선생의 문중은 400여년을 칠곡군 왜관읍 매원마을에서 조상의 문묘를 수호하며 살아온 가문으로 문중에서 설립한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선생은 특히 천문 지리 병법 보학에 밝았으며 주역에도 조예가 깊어 원근(遠近) 사림(士林)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선생이 15세 되던 해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와 황해도 지방을 선두로 부패한 관료들의 학정과 수탈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전국에서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선생의 고향인 칠곡군에서도 동학군이 봉기하여 관군과 동학도들의 치열한 전투는 밀고 밀리는 접전의 연속이 있을 때 선생의 부인 벽진(碧珍) 이씨(李氏)가 시집 올 때 가져온 재물과 가산을 처분하여 동학도들에게 지원을 해 주었다 이러한 내용은 선생의 부인이 별세 하였을 때 쓴 친필 제문에 기록이 되어 있으며 칠곡군에도 동학봉기를 창궐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조정에서는 동학도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일군을 불러 들이므로 청일전쟁을 유발시켰으며 결국 조선은 일본제국주의 하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선생은 국권회복운동( 國權回復運動)의 일환으로 칠곡 문중 내에 야학당을 개설하여 당시의 금서인 사민필지(私民必知)중등만국신지지(中等萬國新地志)등의 책을 구해 개화의 신문물을 전수하기 위해여 동분서주하였다. 선생은 국권회복 당위성과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 등을 역설하며 일제의 만행을 신랄하게 성토하므로 우리 국민에게 감화와 감동을 주므로 국권회복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의 외숙 되시는 일괴(一槐) 이명균(李明均) 의사를 비롯하여 백농(白農) 이동하(李東廈) , 심산( 心山) 김창숙, 일창(一蒼) 허발, 일헌(一軒) 허규(許珪) ,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선생 등과 평생 항일동지로 활약하면서 항일전선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1919년 3월1일 전국에서 일어나는 만세운동으로 조선인들이 체포 구금 되어가는 것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해 상경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종로 가회동의 한규원(韓圭源),서산에 이만행(李敏行)과 수은동 수은여관에서 허만필( 許萬弼)등에게 상해 임시정부와 내통을 협약하고 임정에 지원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밀회를 거듭한 결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독립자금 모집 기관으로는 현신사(玄申社),익명상조조합(匿名商社組合)이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했다. 許萬弼(허만필)은 경산남도 진주군 성내리에 거주하는 부호를 접촉하여 자금 출자를 권고하였으며 그 해 7월 말 동군 성내리 허준(許駿)의 집을 방문하여 자금 조달 중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됨으로 현신사라는 비밀조직이 와해되고 유신사라는 비밀결사단체를 재조직하여 종로에 있는 문아당(文雅堂)이라는 인쇄소에서 정관 및 규약과 일만 원 권 증권을 인쇄하여 군자금 조달에 박차를 가해왔다 수원, 천안, 진주 등을 돌며 자금을 모집하던 중 이 사실을 알고 잠복중인 일경에게 1920년 2월 25일 체포되어 천안 경찰서로 긴급 후송되었으나 악랄한 고문에도 기밀을 누설 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미결로 천안 경찰서유치장에서 영어(囹圄)의 신세가 되었으며 그 후 긍제 이수각 선생은 공주형무소로 이감 송치되었다. 군자금 모집 비밀결사 사건은 일제 강점기 동아, 조선, 양대 신문과 조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보도되어 그 전모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조직의 연원은 긍제 선생의 외숙 되시는 일괴(一槐) 이명균(李明均)의사로, 의사는 1920년 남만주 군정서의 노백린(盧伯麟)장군과 군정서 총재 석주(石洲)이상희(李像羲)(초대임정국무령)선생과의 비밀연락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을 조직하여 재무부장에 총책을 맡았다 이명균(李明均)의사가 심한고문으로 사경에 이르게 되자 긍재 선생은 부질(婦姪)인 당시 판사 동초(東樵) 이우익(李愚益)에게 부탁하여 그의 주선으로 가석방되게 하였다. 긍제 선생은 또한 군자금을 모집하여 같은 사건의 핵심 인물인 이종국(李鍾國)과 함께 임정(臨政)에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이후 이종국(李種國)은 일경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에도 끝까지 긍제 선생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1920년 출소 후 긍제 선생은 외숙인 이명균 의사의 소유 임야를 벌채하여 그 자금을 별동대를 통하여 전달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중국에서 활약하던 심산 김창숙 동지를 비롯하여 백농 이동하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운동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긍제 선생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천문, 지리, 역사, 인물과 주역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 오늘날 향토사학자로서 일제 말인 1936년 칠곡의 오랜 숙원이었던 칠곡지(漆谷誌)(건곤2책)를 편찬하기 위하여 통문으로 발의하니 군내 유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문헌을 수집 하였으나 조선 총독부 발매규정에 의한 발매, 반포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출판허가를 받지 못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칠곡지를 자비로 출판을 하였다. 2002년에 칠곡군문화원에서 사료의 가치를 인정하여 국역으로 발간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할 것이다. 긍제 선생은 해방을 맞이하여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정당의 난립으로 혼미해진정국에 한독당의 입당과 독립 유공자의 신청을 권유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군정이 물러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선생과 오랜 동지이자 수하로 활동한 죽산(竹山) 조봉암이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입각하였다. 1950년 긍제선생은 칠곡군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장남이 공산당 남조선 선전부장이라는 날조된 김천형무소 사건으로 수감되자 출마를 포기하였다. 그 후 사실이 규명되자 아들은 무죄 석방되어 복직 되었으며 1956년 1월 26일 조봉암, 김성주, 박용의, 서상일, 박기출, 신숙, 신백우 이동하 양운상, 장지필 등이 주동하여 창당한 진보당에 고문으로 추대되어 활동을 하였다. 오로지 조국독립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1963년 1월16일 그 파란 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현재 왜관 매원마을에는 이두석, 이수목, 이달영 선생에 이어 네번째로 이수각 선생이 지난 3월1일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추서를 받게 되었다./이동진 낙동문학회장(이 내용은 `긍재집`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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