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읍은 1949년 8월 13일에 왜관면에서 읍으로 승격됐다. 최근 일본의 경제 제재로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가운데 `왜관`이란 명칭부터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렇다면 `왜관` 명칭의 기원은 어떻게 되나? 왜관(倭館)은 한자로 왜나라왜(倭)자에 관사관(館)이다. 사전적 의미는 `왜인의 관사`이다. 조선시대 입국한 왜인(倭人)들이 머물면서 외교적인 업무나 무역을 하던 관사를 말한다. 때문에 왜관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장소에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우리가 알아야 사실은 당초 왜관이 지금의 왜관읍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초의 왜관은 지금의 약목면 관호2리 백포산성 동남쪽 낙동강변 서안에 설치됐다. 지금도 그곳을 `구왜관`(舊倭館)이라 부르고 있다.
◆약목면 관호리 `구왜관`이 먼저
북으로 일식정 거리에 있는 당시 인동군 약목면 관호2리(仁同郡 若木面 觀湖二里)의 백포산성 동남쪽 아래의 왜관(倭館)이 있었다고 인동부읍지(仁同府邑誌)인 옥산지(玉山志) 강원조(江源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江源…中旨灘卽雙樹淵下流 栢浦灘卽中旨灘下流 倭館淵卽栢浦淵下流…` 즉, 백포탄은 곧 중지탄의 하류이고, 왜관연(倭館淵)은 곧 백포연의 하류이다. 여기서 `왜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강이름으로 나타내고 있다.
백포산성은 낙동강으로 돌출한 나지막한 산인데 이 산은 신라시대의 고성(古城)인 토성(土城), 즉 백포성(栢浦城)이 있다. 아마 백포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왜관`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왜관`이란 명칭의 유래는 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말 이후 조선 초기까지 경상도 지역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잦았다. 조선 태종은 그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한 유인책으로 왜관을 설치했다고 한다. 왜관을 설치하여 그들의 교역을 비롯한 활동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인들이 머물렀던 곳에는 관사와 숙소 등이 세워졌고, 이 장소가 곧 왜관이 됐다.
일각에서는 왜관이란 지명이 조선 성종 때부터 낙동강 하류에서 뱃길을 따라 올라온 왜물(倭物)을 서울에 실어가기 전에 보관해 두었던 창고인 `왜물고`(倭物庫)가 있었던 데에서 생긴 명칭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이 있은 후 우리나라에 설치된 왜관은 모두 폐쇄됐다. 이후 일본과의 외교 사정에 따라 왜관은 설치와 폐쇄가 반복됐지만 부산포(동래)와 제포(내이포라고 함;진해), 염포(울산) 등 삼포(三浦)는 대표적인 왜관을 설치해 교역·접대 등에 관한 일을 계속 맡아보게 했다. 조선시대에 왜인이 많을 때는 한 해만 6천명이 넘는 왜인이 입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왜관`이란 지명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칠곡군
오늘날의 왜관은 약목 관호2리 구왜관을 설치한 후 나중에 설치된 곳이다. 이를테면 `신왜관`인 셈이다. 일제는 조선 수탈을 본격화하기 위해 1904년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약목면 관호2리 구왜관에 역을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구왜관보다 민가가 없지만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변의 넓은 모래밭이 있는 현재의 위치가 발전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역사를 세우고 역이름을 `왜관`으로 정했다.
약목면 관호리 주민들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관호리 구왜관은 왜인들의 도박장(倒泊場;배가 머무는 장소)으로 그들은 소금을 배에 싣고 와서 이곳 농민들의 쌀과 교환해 갔다는 것이다. 때로는 이렇게 그들의 교역장으로 몰려든 배가 수십척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 관할청인 인동부사(仁同府使)의 허가를 받고 동래온천(東萊溫泉)을 다녔다고도 한다.
과거 낙동강 연안에는 `왜관`이 10곳이나 설치됐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없고 `왜관`이란 명칭조차 모두 사라졌다. 다만 칠곡군 왜관읍만이 군청소재지로 유일하게 `왜관(倭館)`이란 지명을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국제자유무역항`처럼 낙동강 중-상류서 가장 번창한 왜관나루터
칠곡향토사학회 박호만(작고) 고문은 「낙동강 수운사에 대한 연구」(1998년 한국문화원연합회 향토사료 발굴 논문 공모에서 우수작 선정)라는 논문에서 왜관과 낙동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박 고문은 이 논문 서언에서 "근대적 교통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량의 물자수송은 낙동강 수운(水運)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왜관`은 남쪽에서 올라온 해산물과 북에서 내려온 영남내륙 지역의 농산물이 만나는 `교역장`으로 중계교역이 매우 성행하였다. 따라서 낙동강에는 항시 크고 작은 나룻배와 범선(帆船)들이 떠다니고 있어 `돌밭(石田)나루`는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서는 제일 번창한 나루터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종의 `국제자유무역항`에 해당하는 낙동강 왜관은 부산 구포에서 출발해 경남 삼랑진과 남지를 거쳐 올라온 소금배들의 중간 기착지였다.
또한 왜관은 일제강점기에 경부선 개통 후 교역이 성행했던 낙동강변과 왜관역을 잇는 협궤철도(狹軌鐵道)가 생겨 수운과 육상을 연결하는 역할까지 담당했다. 협궤철도는 소형 도르래식 무개차로 화물을 싣고 인력으로 미는 방식이다.
왜관은 낙동강을 따라 내려온 상주·의성·안동·문경 등 경북 북부지방의 농산물 등을 받아 다시 경부선을 통해 전국으로 운송하고, 경부선으로 운반된 물자는 다시 왜관에서 낙동강을 따라 경북 북부지방을 비롯해 전국으로 운송하는 물류기지였다. 물론 남해안에서 올라온 해산물도 왜관을 거쳐 각지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왜관나루터(이전에는 돌밭나루터)가 칠곡군지역 낙동강의 12개 나루터 중 교역이 오랫동안 가장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은 낙동강의 수운과 경부선 철도(육로)가 이곳에서 함께 가동됐기 때문이다.
왜관나루터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소금배가 대세였으나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성냥을 비롯한 생필품과 석유 등의 활발한 교역장으로 많은 상인이 왕래했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명칭이 `돌밭나루터`였는데 왜관을 점령한 일제 강점기부터 `왜관나루터`로 바뀐 것도 왜인의 영향이리라.
왜관나루터는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들의 거처를 제공하며 물건을 맡아 팔거나 흥정을 붙여 주는 일을 하던 상인도 있었고, 상인이나 뱃사공 등이 머무는 객주(客主)도 몇 채 모여 있었다고 한다.
칠곡군 `왜관`은 `일본인 관사` 시절부터 이때까지, 즉 처음부터 상인들이 판을 치는 `교역의 장소`였다. 상인과 장사꾼은 자신에게 유리한 흥정을 위해 때로는 상대를 속이기도 해야하는 등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해야 한다.
왜관이 경주(慶州), 상주(尙州), 영주(榮州) 등 선비정신이 깃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을(州)과는 달리 교역의 장소에서 자신의 이득만을 취하기 쉬운 `장돌뱅이` 관행이 배어있어서 그런가, 신의(信義)와 뿌리가 없는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왜관이 낙동강변에 위치해 있어 주민들은 강변 모래알처럼 혼자 똑똑하고 쉽게 흩어져 진흙 같이 잘 뭉치는 구심점이 없는 것일까? 이 문제는 왜관읍 승격 70주년을 맞아 왜관 지명을 변경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이성원 편집국장 newsir@naver.com